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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우 May 27. 2022

친밀한 우정에 대한 간략하지만 세련된 리뷰

과학자 친구들에게 보내는 우정의 편지


A Brief, but Sophisticated Review of Intimate Friendship


Author: Miwoo Lee


언젠가 너네를 위한 글을 써보겠다고 했지. 현대 과학 저널의 시작이 각 지역의 로컬 과학자들이 왕립 과학자들에게 보낸 편지(letters)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과학자인 내가 또 다른 과학자들인 너네에게 보내는 편지가 저널의 형식을 일부 따르는 점은 아주 적절하다.


우리들의 첫 만남을 기억해?

언제였더라, 학부 3학년 때였던 것 같아. 효빈이는 나랑 심리학 그룹에서 먼저 알게 되어서 학회에서 만나 인사를 했던 것이 첫 만남이었던 것 같고, 가인이는 신경과학 논문 스터디에서 처음 만났지. 처음엔 논문 읽고 발표하면서 참 똑똑하고 열심인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스터디 끝나고 매번 막차 끊기도록 그렇게 술을 먹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까지 택시비가 3만 원 정도 나오는 터라, 어떻게 집까지 가야 할지 버스를 찾아보던 내게 효빈이가 택시비를 내주겠다고 나를 택시에 밀어 넣고는 현금을 쥐여줬는데(이때 참 다정하다고 생각했어), 택시 타고 가면서 손을 펴보니 만 원짜리는 한 장이고 천 원짜리가 두 장이더라. 고마우면서도 짜증 나는 묘한 기분은 그때부터 여전했어.

가인이는 안암에서 기절했을 때부터가 친구로서의 기억 시작이야.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셋이 그렇게까지 셋이다!라는 느낌은 없어서 내가 안 놀겠다는 걸 나 보러 안암으로 올 테니 놀자고 와서는 혼자 만취해버려서 그 새벽 24시간 오픈하는 카페에 너를 눕힌 채 효빈이와 한숨을 푹푹 쉬던 그날이 여전히 생생하다. 솔직히 얘는 뭐하는 애인데 맨날 이러나 싶었지만, 또 꿋꿋하게 놀자고 하고 매번 만취하는 가인이 그 자체를 인정하게 되었어. 부끄러움은 너의 몫이고, 보는 나야 재미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만취한 가인이를 볼 때마다 내가 술 먹고 만든 흑역사가 하나하나 위로받는 느낌이라 괜찮더라. 나 또한 너희 앞에서 만취하여 헛소리는 기본이요, 오열 등의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도 있지만 언제나 나를 압도하는 너네들이 있기에 안심된다.


너네와 정말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이 많았는데, 그중 가장 최고는 단언컨대 2년 전 갔던 제주도 7박 8일이 아니었나 싶어. 매일 다른 게스트하우스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시는 순간도 재미있었지만, 셋이 놀다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쟤네 다 뇌 연구하는 박사과정들인데(한 차례 뜨악), 한 명은 *ST 다니고, 한 명은 *ST 다니고, 한 명은 *NU래." 하면서 혀를 내두르는 것이, 말만 하면 우리의 업을 상기시키는 사람들이 불편했고 역시 셋이 노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어. 매번 들었지 않니? 우리가 무슨 일을 한다고 하든 전혀 뜨악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야. 술에 취해 자꾸 넘어져도, 목구멍을 활짝 열고 맥주를 놀라운 속도로 들이부어도, 개소리를 하면서 춤을 춰도 과학자인 것이 이상할 것은 없잖아?

나와 친한 친구들의 평균이 나라고 하는데, 우리는 평균에 꽤 영향을 주는 이상치 아니니?  그래도 우리 셋 중의 둘을 평균 낸다면 남은 하나와 꽤 비슷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 어떤 면에서는 다들 뛰어나게 특이하고, 이상하고, 특출 난 면이 있지만 셋이서 존재할 때 상보성을 가지는 조합인 것은 확실히 맞는 것 같아. 너네들을 보면 항상 더 분발해야지, 내 삶은 상대적으로 밍밍하게 느껴지는군. 싶었는데, 너네들이 나보고 특이하다고 하는 것 보면… 그래도 내가 우리 셋 중에 가장 책도 많이 읽는 감성 과학자이며, 필력이 좋기 때문인가? 특이성을 검증하기 위해 가상의 데이터를 분석해보았어. 각자의 친한 친구 풀에서(효빈: 8명, 가인: 10명, 미우: 12명)  눈치, 감성, 논리, 도덕성, 관종력, 다정함, 신뢰로움, 지능, 개방성을 평가했고, 친구 친밀도에 따라 가중치를 부여하여 어쩌고 저쩌고 계산했더니 대충 평균+-3std(표준편차) 정도의 이상치라는 결과가 나왔어. 데이터의 출처는 내 뇌피셜(효빈과 가인에 각각 빙의하여 평가)이야. (Table 1, Figure 1 -비공개, 저자에게 요청 혹은 직접 상상해보세요)


사랑하는 친구들, 너네 덕에 외롭고 힘든 대학원 생활을 어떻게든 버텨나가고 있어. 우리들을 생각하면 지금이 정말 청춘이구나 싶다. 청춘=술인 것은 아닐 테지만, 취하거나 방황하거나 하면서도 밤이든 주말이든 열심히 연구하면서 어떻게든 재미있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잖아. 우리가 만날 때마다 아무도 제정신이고 싶은 의지가 없는데, 그래도 가끔 보게 되는 발표하는 모습이라든가, 논문이라든가를 보면 새삼 너네도 참 멋진 녀석들이구나 생각해. 우리 셋이 다 참석했던 학회에서 영어로 발표했음에도 열심히 들어주고, 좋은 질문도 많이 해주어서 고마워. 겉으로는 진지하고 똑소리 나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톡으로는 솔직한 마음의 말들, 예컨대  ‘그래서 이번에 ㅇㅇ에 대해 발표하신 어느 소속 누구가 괜찮아 보이는데 저분 애인이 있는지 알아?’, ‘저분이랑 술 먹어봤는데 웃긴 분이더라 다음에 한번 불러줘’ 등의 시답잖은 말들을 주고받는 것도, 같은 분야를 연구하며 같이 커온 우리끼리만 할 수 있는 대화겠지?  우리가 그다지 연구나 과학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편은 아니지만, 하루 종일 프로그램 돌려도 그래프 하나 못 그리는 날의 슬픔과 주말에 연구실에 혼자 있는 외로움을 가장 잘 이해하고 고려해 줄 수 있는 친구들도 너네뿐이고, 내 연구에 대해서 자세하게 자랑할 수 있는 친구들도 너네뿐인 점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해. 사적인 맥락을 오래 알아왔으며 가장 공적인 일 이야기 역시 진지하게 터놓을 수 있고, 가끔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관계란 것은 정말 특별하니까.

만 30세쯤 되어보니 모든 것이 다 애매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했어. 10년 전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하더라도 동기들 중에 상당수는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했어. 하지만 몇 년 후에 실제로 대학원에 진학하는 동기는 몇 안되지. 그중에서도 신경 과학을 전공하는 것은 극 소수이고 말이야. 어떤 학문을 제대로 파보겠다는 마음을 지키는 것이 여간 쉽지 않아. 23살쯤 먹은 우리는 왜 그렇게 대학원에 가고 싶어 했을까? 그 시절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며 같이 스터디하던 사람들 중에서 석사까지 한 사람들은 여럿 있어도, 꿋꿋하게 박사과정을 거의 마쳐가는 사람들은 정말 우리 셋 뿐 아니니? 물론 이쪽 학계에 나름 오래 있었으니 알고 있는 대학원생들은 각자 학교 사람들을 포함해서 주변에 엄청 많지만, 그들은 친한 친구는 아니니, 오히려 부러움 혹은 경계의 대상이랄까, 말도 안 되는 퍼포먼스를 내는 몇몇 대학원생들을 볼 때마다 솔직히 겁이 나고 외로워지기도 해. 어쩔 수 없는 경쟁 시대에 학문 역시도 겉으로는 아닌 척할 뿐, 잠시도 방심하면 안 되고 눈에 불을 켜고 연구에 매달려야 한다는 사실들이 와닿을 때가 있어. 우리도 가끔 이야기하잖아, 결국 우리가 제일 사랑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은 연구라고. 사실 회사를 다니거나 어떤 다른 일을 하더라도 잘하겠지. 하지만 궁금해서 심장을 뛰게 하고 알아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자발적으로 바칠 수 있는 일은 과학뿐이잖아. 나는 조금 힘들었지만 역시나 굉장히 즐거웠던 석사과정을 마치고(지금은 이렇게 평가하지만 그 당시 수많은 땀과 눈물과 새벽을 갈아 넣었다, 아주 힘들었다고 일기에 썼다!) 박사 과정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아니 박사 3년 차까지만 하더라도 '나의 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음에 감사한다'라고 말하고 다녔어. 낡아버린 열정은 단지 시간 때문일까? 한 살이 얼마나 크겠냐만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1년은 한 해가 다르지 않니? 주변을 돌아보면 아직도 혼자 학생 신분인 게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면서 차곡차곡 쌓여온 불안함과 초조함을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얼마 남지 않은 인내심과 경제력을 자꾸만 저울질해보게 돼. 이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와버렸잖아. 뭐가 됐든 박사 졸업까지 참고 해내야 할 수밖에 없는데, 박사를 마쳐가는 단계가 이토록 정신적으로 힘들 줄 몰랐어. 이제는 내가 스스로 원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어. 대학원 생활과 졸업 이후의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의 기대는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부담스럽다. 이럴 때 같은 상황에서 같은 마음을 억누르고 나아가는 너네가 해주는 말이, 아니 말도 필요 없지, 그냥 말없이 잡아주는 손에 담긴 마음이면 또 한동안은 씩씩하게 견뎌 볼 용기가 생겨. 가장 먼저 곧 진짜 박사가 될 효빈이가 자랑스럽고 든든하고, 석사 학위도 없이(!) 12학기째 쭉 연구하고있는 가인이의 인내심에도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사실 말하자면 우리는 모여서 그다지 고찰을 하진 않아. 그냥 술에 취해 웃고 떠들 뿐이지. 말도 잘하고, 논문도 잘 쓰고, 다정한 너네지만 이런 솔직한 마음을 정리해서 꺼내 놓는다는 것이 쉽지 않지. 나 역시 아직은 굳이 따지자면, 문학보다 과학에 가까운 말과 글이 훨씬 취향이고 편하거든. 너네랑 떨어져 있는 동안 나 혼자 독서모임 열심히 하고, 책 읽고, 글쓰기에 심취하면서 요즘 내가 쓰는 글들에선 점점 말랑한 마음 그대로를 꺼내놓게 되고 있지만 말이야. 분명 한국어로 말하고 싶지만 조사 빼고는 영단어를 남발하게 되고, 과학뿐 아니라 일상의 어떤 현상도 통계적 수치나 과학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적확하게 와닿으며, 술과 figure 없이는 설명하기 힘들 때가 있는 우리들의 언어는 그래서 어쩔 수 없는 Geek과 Mad scientist의 어드메쯤 있을 거야.(Figure 2) 물론 우리 셋 중에 한 명은 매번 못 알아듣고 뭐야?라고 되묻지만, 그래서 터지는 웃음 벨이 우리의 발화를 완성시켜 주기 때문에 앞으로도 꾸준히 못 알아듣고 되물어주기를 바란다! 이에 더해, 정신없고 편견 없는 우리 셋의 가장 좋은 점은 과학적 사고와 표현이 익숙하지만 그럼에도 과학적일 수 없는 많은 것들에 대한 태도는 회색 지대에 머무르는 점이라고 생각해. 어떻게 보면 너그럽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좀 많이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래 그럴 수 있지-하며 새로운 발상을 하는 것이 어릴 적보다 자연스러워진 것에 대해서는 너네 둘의 영향이 아주 크다고 생각한다. 고마워!


Figure 2. Geek 벤 다이어그램


작년 가을 우리 셋이 왕산 해수욕장에 앉아서 불꽃을 터트릴 때에, 우리가 같이 여행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 셋만 보면 언제까지나 정신없고 유치한 즐거운 친구들일 텐데, 몇 년 안에 누군가는 한국에 없을 테고, 짝꿍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게 될 수도 있겠지. 그러고 보니 너네와 어울린 지난 9년의 시간 동안 내가 제일 사랑을 찾아 방황한 것 같은데 ‘염병 떨기’의 총합(빈도와 강도)으로 따지면 내가 제일 양호한 것은 너네들도 확인한 바 있지(Figure 3). 염병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랑'에 관련된 염병, '술'과 관련된 염병이 대표적이야. 기타 염병들은 결국 저 두 가지 중 하나로 귀결되기 때문에 따로 분류하지 않을게. 그래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자잘한 염병은 내가 제일 많이 하지만, 너네들의 염병은 하나하나 묵직하기에 결국 내가 제일 낫다. 그것도 참 모순이면서도 대단한 일이다. 취하고, 사랑하고, 방황하고, 불안해하고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그럼에도 가장 지적인 연구를 해나가고 있는 우리들의 청춘은 아름답고 경이로워.


Figure. 3 염병 밀도 추정치 그래프

평균= 흰색 마름모, 중앙값= 흰색 선

데이터 및 R코드-저자에게 요청 


친구들아. 곧 효빈이 박사 졸업과 미우 생일 기념으로 셋이 또 여행을 계획하고 있지. 난 요즘 그것만 생각하며 버티고 있어. 이번 리뷰를 쓰며 나는 너네에게 어떤 친구이고,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봤는데… 많은 것을 바라진 않고, (이미 나의 신뢰로움과 친절함과 요리 잘함과 똑똑함 등 좋은 친구로서의 여러 덕목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저 건강하고 웃긴 친구가 되고 싶다. 나는 너네를 위해 건강할게. 마지막으로 나도 너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계속 내 청춘으로 머물러주기를. 여러 인생의 단계들을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면서 누군가 불안하거나 초조해할 때, 어떠한 말도 필요 없이 그저 셋이 모여 트리플 포옹을 하며 힘내자! 할 수 있기를. 앞으로 펼쳐질 박사들의 삶 역시 함께여서 든든하기를! 언제나 고맙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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