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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우 Oct 11. 2023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을 읽고

엄마에 대한 분리불안이 심했던 무렵, 나는 항상 엄마의 미용실로 하원하여 미용실 안쪽에 딸려있는 방에서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부천의 어느 동네 시장 입구의 기역자로 꺾인 커다랗고 오래된 상가건물의 한쪽 획 중간쯤에 엄마의 미용실이 있고, 꺾인 다른 획의 가운데에는 족발집이 있었다. 가게마다 자그마한 방과 조그만 부엌이 딸려 있었고, 부엌에 있는 뒷문으로 나가면 풀과 자갈이 가득한 자그마한 공터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곳을 뒷마당이라고 불렀다. 1997년 여름, 뒷마당 한가운데에서 유난히 동그란 얼굴에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가진, 햇볕에 눈을 찡그리고 있는 족발집 딸 S를 처음 만났다. 어린아이 걸음으로도 15초 정도만 걸어가면 닿을 미용실 뒷문과 족발집 뒷문이었다. S와 나는 서로가 기억하는 최초의 친구가 되었다.


나의 경우, 할머니와 아빠와 이제 겨우 말을 할까 말까 한 어린 남동생이 있는 집보다는 유치원이 끝나고 엄마한테 가서 저녁까지 S와 노는 것이 무조건 더 좋았다. 조그마한 냉장고와 작은 테이블, 어린아이가 낮잠을 잘 때 쓰던 이불 정도만 단촐하게 있던 미용실의 가겟방과는 달리, 족발집에 딸린 방은 S와 S부모님이 밤에 잠을 잘 때만 빼고 생활하는 주 생활공간이어서 살림살이가 많았기에, 자연스레 항상 내가 그쪽으로 놀러 가게 되었다. 대형 마트에서 파는 비디오 게임기를 집집마다 다 가지고 있던 그 시절에 S는 유일하게 닌텐도 패미컴 기계를 가지고 있었고, 한국에는 발매되지 않은 신기한 게임들이 많아서 나를 포함한 그 상가의 또래 아이들은 매일 족발집 방에 가서 S가 게임하는 것을 구경하곤 했다. S는 신기한 게임기와 뛰어난 게임 실력으로 아이들 무리에서 패권을 잡았고, 비디오 게임에서 컴퓨터 게임으로 옮겨간 그다음 시절에도 그 위상은 공고했다.


때로는 3명, 4명, 우리 둘을 포함한 많은 무리가 있었지만 많은 친구들이 우리랑 어울렸다 멀어졌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초등학생이 된 우리는 자그마한 뒷마당에서 활동 반경을 넓혀 시장과 동네 일대를 미친 듯이 내달렸다.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한다고 온 동네를 뛰어다니다가 골목에 주저앉으면 성장통인지 근육통인지 허벅지를 콩콩 때려야 할 만큼 다리가 아팠고, 숨을 쌕쌕거리도록 놀다 온 우리에게 S의 어머니가 한 잔씩 마시라며 갈아주셨던 토마토 주스의 달콤함과 시원함이 나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대표하는 감각이었다. 언제나 S와 함께였다.


10살 무렵, 학교가 끝나면 각자 태권도, 댄스 학원, 미술 학원 등을 다녀야 했던 초등학생들은 더 이상 뒷마당과 상가 일대를 쏘다니며 망아지처럼 놀 수 없게 되었고, 그 시기에 S네가 우리 집과 가까운 아파트로 이사를 했기에 그때부터 우리는 예전처럼 매일 놀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집을 번갈아 방문하며 주로 같이 컴퓨터 게임을 했다. S는 게임 컨트롤을 아주 잘해서 나는 주로 그녀가 게임을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곤 했다. (그녀의 컨트롤로) 같이 적을 무찌르며 엔딩을 볼 때마다 든든함을 넘어 마음이 벅찼고, 우리가 같이 키워 낸 수십 명의 딸내미들이 프린세스를 비롯한 여러 모습의 어른이 되어 우리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을 때에도 유대감과 동료애를 진하게 느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S와 나는 서로가 더 이상 가장 친한 친구이지는 않았지만 같이 방송부 활동도 하고,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방과 후 활동을 같이 하면서 꾸준히 종종 놀았다. 학교에선 서로 반에 찾아가지도 않고 만나지도 않았지만 학교 밖에서는 서로의 집을 오가는 그런 관계. S는 중학교 때부터는 학원을 열심히 다니며 꾸준히 공부를 하는 모범생이었고, 나는 평소엔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라디오를 듣고, 춤을 추고, 밤을 새워 해외축구를 보다가 항상 시험 전에만 반짝 열심히 공부를 했었다. 중학교 3학년 2학기에 고등학교 원서를 쓸 즈음에, S는 비평준화 고등학교에 같이 지원하자고 나를 계속 설득을 했었고, 중학교 시절 학교 성적은 좋았지만 공부에 크게 욕심이 없었던 그때 당시의 나는 내가 그 고등학교를 어떻게 가냐며, 거기 가서 3년 동안 열심히 공부만 할 자신이 없다며 거절했지만 결국엔 같이 원서를 냈다. 그리고 그날부터 고입 연합고사 문제집을 한 아름 사서 같이 독서실을 등록했다. 우리가 지원한 고등학교는 나름 경기도의 중학생들에겐 우상으로 손꼽히던 명문 고등학교라 입시에 탈락하면 후기 고등학교를 가거나 고입을 재도전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시험 등에 한 번도 긴장한 적 없던 나도 역대급 경쟁률에 바짝 긴장했었던 2007년의 가을, 학교가 끝나면 나는 바로 독서실로 갔고, S는 다니던 학원에서 추가로 시험 대비를 하고 저녁 8시쯤에 독서실에 와서 내 옆자리에서 같이 자정까지 공부를 했었다.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시험 모의고사를 보고 와서는 S가 독서실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모의고사 점수가 예상 커트라인보다 낮다는 이유였다. 나도 심란했는데, 세상 무너진 것처럼 우는 S를 달래면서 “우리 아직 시간 많아, 아직 공부 다 안 하고 본 거잖아.” 등등의 말들을 계속했다. 사실 S가 그날 학원에서 모의고사를 보는 동안 나도 혼자 같은 모의고사 문제를 풀었는데 내가 더 못 봐서 나도 겁이 더럭 났던 상태였다. 내가 더 못 봤다고 말했는데도 자정에 S의 어머니가 데리러 올 때까지 S는 계속 고입 연합고사에 불합격할 것 같다며 울었고, 사실 뒷마당에서 뛰어놀던 우리의 어린 시절부터 내가 항상 S에게 맞춰주는 편이었는데, 16살의 그날 처음으로 S에 대한 인내에 한계를 느꼈던 것 같다.


우리는 추운 겨울날 새벽에 같이 연합고사를 보러 갔었고, 합격자 소집일날도, 반배치고사 보는 날도 같이 갔었지만 그때부터 내가 의도적으로 S와 조금씩 거리를 뒀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학창 시절 12년 중 S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같은 반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고등학생 시절엔 중학생 때까지와 달리 내가 더 S에게 까칠하고 세게 대했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 유독 많이 싸우기도 했는데, S와 나 사이에서 사소한 투닥거림 들은 별 의미가 없었지만 난 더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S와의 우정이 애매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그 나이 애들 간의 역동이 우리 사이의 갈등을 촉발했다. S와 나 사이의 문제는 아니었다. 친한 친구들은 얽혀 있는데, 서로 거슬려하던 어떤 관계가 있었고, 적극적인 편나누기를 했고, 자연스레 나뉘게 되고 뭐 그런 뻔하고 흔한 일이었다. 그때 나는 S에게 조금 화가 났던 것 같다. 아무리 지금 애매한 우정이라 하더라도 내가 아닌 다른 애의 편을 들어?


우리는 기숙사 학교를 다녔는데, 주말에 집에 돌아와도 내내 공부를 했어서 주말마다 동네 독서실에서 마주쳤지만 그 사건 이후로 어색해서 서로 못 본 척을 했었다.

어느 주말 저녁 S는 나에게 이야기 좀 하자며 독서실 휴게실로 불러냈다. 정확하게 어떤 말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S는 나에게 본인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닌데 어쩔 수 없었다며, 미안하다며 그래도 우리는 오래된 친구이니까 계속 잘 지내자 등의 말을 했었고, 친구가 된 이래 십여 년 동안 처음으로 나는 S의 앞에서 서늘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S는 나한테 사과를 하는 친구가 아니었던걸 알면서도 내가 받아주지 않았다.  동그란 얼굴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십 년이 넘게 항상 분했을 때에만 울던 그 아이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우는 모습에 묘하게 쾌감도 들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S와 멀어졌고, 졸업을 하고 대학에 가면서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23살이 막 된 겨울이었나, 동네 카페에서 각자 공부를 하다가 옆 테이블에 있던 S를 발견했다. 너무 반가워서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 당시 1년 반째 사귀고 있다는 S의 남자친구는 군대에 있었고, 나 또한 바로 며칠 전 남자친구의 카투사 전역식에 참석하느라 의정부까지 갔다는 그런 생경한 이야기들을 나눴고, 각자 열심히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 대학 생활 얘기 등등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도 귀엽고 어렸는데, 그 당시 성인이 되어 처음 대화를 나눠보는 우리는 20대 초반의 몇 년이란 얼마나 다이내믹한가, 시간의 간극을 실감하며 어색해했다. 그렇게 한번 만나고 또 자연스럽게 서로를 잊고 지냈다.


2021년 여름, S가 10년 사귄 애인과 곧 결혼한다는 소식을 엄마한테 들었다. 엄마들끼리는 동네에서 종종 마주쳐서 각자의 딸들의 근황을 공유했다. 결혼한다고 들었다, 축하한다고 내가 7년 만에 연락을 했더니 S가 반갑게 답장을 했다. 서울에 지금 혼자 살고 있지만 주말엔 부모님 집에 항상 간다고 하니 S는 아직 우리 동네에 산다며 주말에 만나자 했다. 어린 시절 열심히 뛰어다니던 그 골목 어느 카페에서 우리는 30살이 된 서로를 마주하며 완연히 어른이 된 것 같은 서로의 모습에 감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S의 결혼식 날, 웨딩드레스를 입고 앉아서 환하게 웃고 있는 S를 보자마자 나는 눈물을 왈칵 쏟았고, 당황하는 신부대기실 안 스태프들에게 S는 6살 때부터 친구였거든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아마 그날 그 결혼식에서 내가 누구보다 제일 많이 울었을 것이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S가 얼마 후에 신혼집에 놀러 오라고 초대했다. 본가 내 방 창문을 내다보았을 때, 정면으로 400m 앞 도드라지게 솟아있는 주상복합 건물이 S의 신혼집이라는 사실을, S의 집 방문 하루 전에 정확한 주소를 물어보면서 알게 되었다.  항상 바라보던 저 아이보리색 건물에 네가 살고 있었단 말이지?

S의 집에 가서 S의 배우자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사랑이나 연애는 생각도 못 할 만큼 우리는 어렸었는데 S는 평생을 같이 살 배우자가 생겼구나, 신기했다. 신나서 쉴 새 없이 어린 시절 이야기들을 했었고, S는 자기는 어린 시절이 기억이 잘 안 난다며, 어떻게 너는 다 기억하냐며, 듣다 보니 조금씩 기억이 나는 것 같다며 웃었다.


"신랑도 너랑 같은 날 태어났어."


우리가 거의 서로를 잊고 지내던 지난 10년 동안의 6월 1일에도 S는 옆에 있는 사람의 생일을 축하해 줬었고, 매년 6월 1일이 되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날 태어난 나를 생각했다고 S가 말했다.

어른이 되면 술을 잘 마실 거라고 기대했던 S는 맥주 두 잔에도 테이블에 엎어져버리는 애석한 체질이었고, 그의 배우자가 이슬 톡톡 한 캔에 취해버린 S의 빨간 볼을 애정 어린 손길로 쓰다듬을 때, 6살 어느 여름날 오후 내리쬐는 햇볕 속에서 보았던 그 동그란 얼굴이 해사하게 웃는 걸 보며 나는 바라보고 있어도 그리운 감정이 무엇인지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


"네 방 창문에서 우리 집이 보이면, 불을 껐다 켰다 하면서 우리 집에 놀러 오라는 신호를 보낼게.  내년 여름에는 우리 집 발코니에서 같이 생일파티를 하자."


모든 것이 다 바뀌어버렸어도 어떤 변하지 않는 것. 그게 S와 나의 길고 긴 서사이다. 아마 우리는 영원히 서로에게 어떤 존재일 수밖에 없다.

내 어린 시절, 유치하고 고통스럽게 같이 자라났던 청소년 시절, 떨어져 있는 동안 각자 열심히 성장해서 무언가를 이루어가고 있는 지금도, 지금에는 상상도 안 되는 까마득한 미래에도 여전할

나의

최초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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