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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은미 Apr 10. 2022

스물다섯, 첫 번째 터닝 포인트!

    “가장 뛰어난 시인은 내면의 어린아이다.” /스티븐 나크노마비치     


    어린이는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세심하고 깊은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내 부모에게 어린 나는 생각 없고 부족한, 앞으로 살면서 배워야 할 게 많은 까마득한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 속을 더듬어보면 맨드라미를 만났던 것처럼, 종종 창조성이 내 몸을 뚫고 나오는 낯선 감각을 경험했음을 깨닫는다. 어린 몸이 그것을 표현하는 게 어려웠을 뿐. 배 속이 몽글거리는 섬세한 감정은 깊게 각인되어 기억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평소에는 까마득히 잊고 있지만, 점화장치를 누르면 순식간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스물다섯. 결혼과 동시에 덜컥 데뷔해 버렸다. 어릴 때부터 끄적거리던 낙서는 만화 형태로 진화하여, 고등학교 때 만화 동호회 활동을 하고 회지를 발간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졸업을 하고 3년 직장생활을 해서 모은 돈으로 스물세 살에 울산에서 서울로 만화를 배우러 올라왔다. 친구와 둘이서 아마추어 만화 판매전인 ACA에 마지막으로 회지를 만들어 참가했는데 판매전을 둘러보던 작은 만화 출판사 사장님에게 명함을 받았다. 책을 내보자는 거다. 꿈을 좇아 서울까지 상경하긴 했는데  덜컥 데뷔를 하게 되어 작품을 만들어야 하니 앞이 깜깜했다. 자신이 없었다. 그동안 동호회에서 회지를 만들긴 했지만 그림을 양껏 몰두해서 그려본 적도, 스토리를 제대로 써 본 적도 없었다. 부랴부랴 이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마감에 대한 압박감이 엄청났다. 압박감 깊은 곳에는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위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넘쳐났고, 함께 데뷔해서 만난 만화가들은 다 천재처럼 보였다.  


     ‘나는 재능이 없나 봐. 다른 만화가들은 ‘할 이야기가 많아 벌써 다음 몇 작품을 구상 중이라잖아? 다들 창조성이 샘솟아 주체를 못 하는 것 같은데 내 안엔 들어 있는 게 별로 없으니 어쩌지? 영화감독은 일을 세분화해서 전문가들과 협업이라도 하지, 만화가는 데생, 연출, 스토리 등 전천후 엔터테이너가 되어야 하는데  난 부족한 게 너무 많은걸. 창작은 내 천직이 아닌 것 같아.’ 


     내 안에는 나를 비판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어른이 되는 동안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 존재는 지극히 평범했다.  만화가가 되었으니 짠하고 영감이 온몸을 적셔주면 좋으련만 그런 기적이 일어날 리 없다. 내 창조성은 뚜껑 달린 상자 안에 갇힌 것처럼  좀처럼 발현되지 않았다. 아니, 창조성이 상자 안에 있긴 한 걸까? 상자를 열어보면  텅텅 비어 있는 게 아닐까? 눈앞에 주어졌으니 성실히 매달리며 해냈지만 그럴수록 상자 속을 의심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무엇보다 현실의 나는 마감을 맞추려 고군분투하며 하루하루 그림 분량을 처리해내기에도 벅찼다.    

  

     내가 나를 인식하는 상태가 자존감이라고 했다. 데뷔작 이후 세 번째 만난 작품 <나는 사슴이다>는 독자의 많은 사랑을 받아 만화가로서 행복감도 안겨 주었지만 내 자존감이 높아진 것은 아니었다. 독자들이 ‘작가님~그림 너무 잘 그려요!’ ‘멋져요!’라고 팬레터를 보내와도 어색하고 낯간지러웠다. 그냥 하는 말 같았다. 그들의 반응이 진심으로 기쁘지가 않았다. 사람들이 칭찬하면 머릿속 비판자가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았다. 내 바닥을 다 알고 있다는 눈초리에 맞서지 못한 나는 순순히 인정해버리고 만다. ‘알아. 사실은 나는 모르는 것투성이고, 부족한 게 너무 많아. 진실을 알고 나면 사람들이 실망할 거야.’ 겉으로는 문제없이 척척 해 나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면에서는 현실의 나와 부족한 나, 이상적인 나 사이에서 사투를 벌였다. 그렇게 8년, 24권의 만화책을 내는 동안 나는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히 지쳐버렸다.   

   

     만화가로 산 8년 <나는 사슴이다> 3부, 9권 째 완결을 남겨놓고 첫째 아이가 마법처럼 찾아왔다. ‘잠시 충전하고 돌아올게요. 그동안 못 봤던 책도 맘껏 읽고 스토리, 연출 공부도 하고 싶어요.’라고 완결 원고 후기에는 썼지만 지쳐버린 나는 도망가듯 화실에서 내 자리를 치웠고  만화가라는 이름을 내려놓았다.    

            

20대 작품활동하면서 받은 펜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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