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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은미 Apr 10. 2022

30대, 세상과 소통을 시작하다.

   “직업이 뭐예요?”

   “....주부에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어린 아이들과 수년을 파묻혀 지내다 보니 내 안의 생기발랄한 천진은 사라지고 녹록치 않은 현실에 매몰되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10년여 육아는 내 정체성을 작가에서 주부로 바꿔버렸다. 만화가는 과거의 직업일 뿐, 현재진행형이 아니니 작가라는 호칭이 머쓱했다. 때때로 몸 안의 창조성이 신호를 보내지만 나는 대부분 그 영감의 순간들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세상과 소통을 시작했다. 둘째가 두 돌이 갓 지났을 때 우연히 어도연(어린이도서연구회) 그림책 강연에 둘째 딸아이를 데리고 참석했다가 얼떨결에 그림책 모임을 하게 된 것이다. 멤버가 된 3명이 다들 언니였고 독서력이 엄청났다. 언니들은 여월동 도서관에서 모임 하는 동안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기저귀에 똥 싸는 아이를 이해해주고 챙겨주었다. 가정 울타리에 쌓여 극히 좁았던 인간관계가 그림책 모임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내 인간관계에 가속도가 붙은 것은 큰아들이 7살에 YMCA 아기스포츠단에 입단하면서부터다. 나는 자연스레 YMCA 회원 활동을 시작했다. 도시농부를 신청해 대장동 논에 아이들과 벼를 심어 수확을 하고 한 달에  한 번 마음공부 소모임에 참여했다. 기타를 배우기 시작해 회원들끼리 작은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그중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활동은 등대생협 활동이다. YMCA 클럽인 등대는 생활공동체, 마을공동체를 지향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6~7명씩 만나서 독서 활동, 밥상 활동, 살림 활동, 사귐 활동을 하고 해마다 12월에 김장 봉사를 해서 지역 독거 어르신 가정에 전달해 드렸다. 어느새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만큼 나는 등대생협 활동을  중심으로 6년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양한 활동을 하며 사람 만나는 기쁨, 배우는 즐거움을 맘껏 누렸다.


      가족이라는 최소단위에 머물다 단체에 참가하면서, 그것도 이익단체가 아닌 시민단체가 하는 일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나는 사람들의 놀라운 창조성을 수시로 목격했다.  작은 일 하나도 ‘나’가, 아닌 ‘우리’라는 관점으로 선택하는 사람들. 공부하고 나누며 자신만의 철학을 세우고 성장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예술가들만 창조성이 필요한 게 아니다. 어떤 일을 하든, 그것에 의미부여를 하고 정성스럽게 해나가면 특별한 것이 된다.  삶의 철학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내면은 오롯이 밖으로 드러나 반짝반짝 빛이 난다.  

      

     몇 년에 걸쳐 신뢰 관계가 쌓여서일까. 어느새 나는 그림으로 나를 알리고 있었다. 등대는 1년에 한 번씩 분체 되어 매년 다른 멤버와 등대가 꾸려진다. 등대 활동 2년 차 때 멤버 한 명이  모임 때마다 활동한 사진을 잘 찍고 정리해서 1년이 끝나갈 즘엔 사진 양이 꽤 되었다. 나는 그냥 끝내기에 아쉬워 사진을 모아 앨범을 만드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고 내가 표지를 맡겠다고 자청했다. 멤버들이 멋진 아이디어라고 좋아했다. 그런데 막상 작업하려고 보니 손은 굳은 것 같고  10년 사이 만화계 또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동하여 작업환경이 컴퓨터로 바뀌어 있었다. 펜에 잉크를 찍어 종이에 그림을 그렸던 나에게 디지털 세계는 벽이었다. 작업 환경에 적응하는 게 먼저였다. 나는 데생은 종이에 하고  스캔을 해서 서툰 포토샵으로 겨우 컬러까지  완성했다. 그렇게 완성한 앨범은 등대 마무리 행사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인기 등대로 뽑혀 상도 받았다. 이 앨범 표지가  화실에 내 자리를 치운 뒤 그린 첫 그림이었다. 그 뒤 등대를 4년 더 활동했고 우리 집 책장에는 다섯 권의 앨범이 꽂혀있다.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다시 인식되기 시작하니 소소한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실무자 선생님들이 소책자에 들어갈 삽화 부탁을 해서 그려 드리기도 하고, 회관 1층에 부착할 회관 안내도를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YMCA 회보인 <광장>지에 건강한 밥상 정보 만화를 의뢰받아 <밥상톡톡>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그림은 내 정체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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