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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언정 Mar 05. 2022

오늘은 쓰러져도 다음 날 다시 시작하면 된다

잘 지내다가도 어느 날은 넘어지고, 어느 날은 기운이 아주 빠지기도 한다

2021년 2월, 구정 전 주말 일요일 오후였다. 내가 애정 하는 공구 카페에서 식재료를 주문해두었는데 내가 함께 주문을 해준 지인은 토요일 저녁에 물건 잘 받았다고 카톡 메시지를 나한테 보냈다. 함께 주문했는데 나한테는 발송했다는 메시지도 오지 않아서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다 그냥 자고, 다음날 주일 온라인 예배드린 후 점심 먹고 한숨 돌리니 오후 3시였다. 아차 싶어 공구 카페에 들어가 공지글을 확인했다. 물건은 금요일에 다 발송했다고, 생물이니  토요일까지 받아야 하고 일요일 오전에도 못 받으면 반드시 택배사에 연락을 해야 한다고 나와 있었다.

 

급히 핸드폰을 꺼내보니 밤 10시 50분에 온 문자가 있었다. 출발했다는 문자는 없이 도착 문자가 밤 10시 50분에 왔으니 나는 모르고 잠이 들었던 거였다. 그런데 대문을 열어봐도 문 앞에 물건이 없었다. 택배기사에게 전화하니 글쎄 1층 현관에 두고 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문자도 그렇게 보냈다고. 이런~~ 우리 집은 3층인데^^;;;

 

명절이라 물량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어제 배송한 것만도 엄청 애쓴 거라고 택배 아저씨는 말하는데 내 입장에서는 화가 났다. 그렇게 밤늦게 와서 1층 현관에 두고 갈 거 같으면 생물인데 전화라도 한 통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리고 1층에 두고 가면 분실될 염려도 있는 거 아니냐고 따졌다. 전화를 끊고 1층에 내려가 보니 다행히 물건은 분실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또 아이스팩이 많이 녹기는 했지만 식재료도 상해서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한참을 씩씩거리다 시간이 좀 지나 흥분이 가라앉고 나자 명절에 물량이 밀려 택배기사들이 아주 고생한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문자를 보내며 뒤늦게 수고하신다고 인사도 남겼다.

 

그런데 문제는 민준이었다. 민준이는 내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다 목소리가 조금만 높아져도 옆에서 영 불안해하며 말이 많아진다. 이럴 때는 가뜩이나 화가 난 상태인데 민준이까지 이러면 자칫 잘못하다간 애꿎은 민준이에게 내가 화풀이를 하게 되기도 한다. 이 날도 물건은 찾았지만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일 때 민준이가 와서 자꾸 나에게 쓸데없이 말을 걸었다.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너 조용히 안 해!!"하고 큰 소리가 나올 뻔했다. 민준이에게 마지막으로 소리 지른 적이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몇 년 전인 거 같은데 다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갈 뻔했다.

 

옆에 있는 남편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남편~ 얘 좀 어떻게 해줘요"

나의 SOS에 남편은 급히 민준이를 데리고 색소폰 연습을 하자며 작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짧게 연습을 마치고 나오더니, 나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지난주에 못 간 양평 두물머리 드라이브 갈까?"

 

코로나로 집에만 틀어박혀서 삼시세끼 밥을 하느라 지쳐 있는 데다 평소 같으면 적어도 2주에 한번 저녁에 남편과 부부 데이트를 하러 카페에 가곤 했는데 코로나 2.5단계 이후에는 그마저도 못하게 되어 부부 데이트를 언제 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다. 지난주 주일에 '너무 갑갑하다. 어디든 드라이브 가고 싶다'했더니 남편은 말로는 '그러자, 그러자' 해놓고 금방 스르르 깊이 낮잠이 들었다. 곤히 자는 남편을 깨우지 못하고 두었더니 오후 5시까지 주무셨고, 결국 그날은 아무 데도 못 가고 하루를 마감했었다.

 

그러고 일주일이 지났다. 남편이 보기에도 나의 한계가 보이는지 이 날은 먼저 드라이브를 가자고 제안을 했다. 그런데 거기까지 참 좋았는데 남편이 덧붙였다.

"근데 민준이도 데리고 가야 되지 않겠어? 쟤도 너무 갑갑해하는 거 같은데..."

'아~ 이건 싫은데.... 나는 민준이 안 데리고 가뿐하게 가고 싶은데....'

 

일단 아이한테 물어는 보기로 했다.

"민준아, 엄마랑 아빠랑 양평 두물머리에 드라이브 갈 건데 너 같이 갈 거야? 아님 집에 있을 거야?"

민준이는 드라이브가 뭔지도 잘 모르고, 양평 두물머리가 어디 있는지 가면 뭘 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른다. 나는 굳이 이 녀석한테 강이 보이는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음료를 마실 거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민준이 얼굴에 깊이 고민하는 표정이 나왔다. 이게 자신에게 유리한 제안인지, 불리한 제안인지 한참을 머리를 굴리며 생각하더니, "그냥.... 집에 있을래요" 다.

 

나는 입술 사이로 삐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그래, 그렇게 해라~" 하고는 안방으로 건너왔다. 남편이 안방에 들어서는 나를 보며 "당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하고 정곡을 찌른다. 어쨌든 급히 옷을 갈아입고 민준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집을 빠져나왔다. 차를 타고 조금 달리니 창 밖에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와우~ 이것만으로도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요즘은 차에 타면 아들들한테 선곡권을 뺏겨서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듣지도 못하는데 이 날은 내가 듣고 싶은 찬양을 반복해서 들었다. 요즘 핫한 CCM 팀인 '달빛마을'의 '주가 일하시네'를 듣는데 가사가 마음에 와닿았다.

 

날이 저물어갈 때 빈 들에서 걸을 때

그때가 하나님의 때

내 힘으로 안될 때 빈 손으로 걸을 때

내가 고백해 여호와 이레

 

일이 잘 풀리고 세상에서 성공할 때가 하나님의 때인 것 같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날이 저물어가고, 아무도 없는 빈 들에서 빈 손으로 걷는 것 같은 때, 내 힘으로 안될 때가 바로 하나님의 때다. 그때 내가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그래서 주님께 의지하게 되고, 내가 아닌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된다. 여호와 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부족한 모습을 다시 또 직면하게 되어 마음이 가난해졌던 나는 이 찬양을 통해 그럼에도 일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위로를 받았다.

 

두물머리는 그냥 떠오른 장소였다. 주변 사람들의 입에서 여러 번 들었지만 나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고, 드라이브를 생각했을 때 TV에서 봤던 그곳이 불현듯 생각났었다. 그런데 주말 오후에 이렇게 드라이브를 나온 건 정말 오랜만이어서 유명한 곳들이 얼마나 사람들로 붐비고 차가 막히는지 전혀 생각을 못했다. 가는 길도 막혔지만 두물머리 유원지 간판이 나오고부터는 그냥 거북이걸음이었다.

 

입구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는 게  차라리 나을까 싶었는데 망설이면서 보니 주차장마다 자리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제일 안쪽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마지막 주차장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하지만 주차장은 이미 만원인 상태라 한대가 나와야 한대가 들어갈 수 있었다. 무작정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차들이 쭉 줄을 서 있는데 우리 앞에 이미 열 대가 넘게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시간이 많으면 모르겠지만 이미 5시가 넘었고, 아이들 저녁도 챙겨주어야 하니 주차장에 자리가 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아쉽지만 그냥 차를 돌려 집으로 가자고 남편에게 말했다. 차를 돌리고 입구 쪽으로 다시 나오는데 인도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핫도그를 하나씩 들고 걸어가는 게 보였다. 방송에 나온 나름 유명한 양평 핫도그 집이라는 간판을 아까 들어가면서 봤던 기억이 났다. 어차피 엉금엉금 가고 있는 상황이니 얼른 내려서 내가 핫도그를 사 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내려서 찾아 가보니 웬걸 무슨 핫도그 집이 이렇게 큰가 싶었다. 웬만한 식당 정도의 크기로 간이 건물을 지어놓았고 사람들이 한참 줄을 서 있었다. 다행히 판매하는 사람이 여럿이라 줄 선 사람들이 많았어도 생각보다 빨리 사서 나올 수 있긴 했다. 그렇게 그날의 드라이브는 양평까지 갔다 핫도그 하나씩 먹고 오는 걸로 끝났지만 집에서 나갈 때와 달리 돌아올 때 내 마음은 무척 상쾌했다.

 

집에 오니 민준이는 TV 앞에 앉아 있다. 우리 집은 상시로 TV를 틀지 않고 보고 싶은 프로그램 한 두 개 정도만 보곤 하는데 코로나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민준이가 갑자기 TV와 친해졌다. 내가 제지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보겠다 싶을 정도여서 평소에는 선을 빼놓곤 했는데 이날은 꽂혀 있었던가 보다. 준하 말로는 우리 나가고 계속 TV 앞에 앉아 있었단다.

 

그래, 이런 날도 있어야지. 오늘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씩씩하게 잘 지내다가도 어느 날은 넘어지고, 어느 날은 아주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 내 컨디션이 좋은 날, 나쁜 날 모두 겪지만 중요한 건 다음날 다시 시작하는 거다. 민준이의 불안 때문에 맘대로 화도 못 내고, 민준이의 반복된 말들이 어떨 땐 너무 짜증 나기도 하지만 또다시 이 아이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완벽하지 못하고 쿨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해 속상해하기보다는 그런 나 자신도 인정하기로 했다. 아이를 키우며 모든 순간 아이가 사랑스러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거짓말이 아닐까. 더군다나 어떤 때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났나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한 가지만 말하고, 집요하게 불안감을 표현하는 장애아이는 더욱 그렇다.


그냥 그렇게 부족한 나를 인정하고 내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내일은 또 더 나은 상황이 주어지고, 힘든 일이 있어도 그걸 이겨낼 새로운 힘이 내게 주어질거니까. 그래서 나는 또 씩씩하게 잘 살거니까.

 

p.s. 이 날 센스 있게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준 남편이 참 고마웠다. 예전에는 하다 하다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일 때 혼자 나갔다 오겠다, 찜질방이라도 갔다 오겠다 했을 때 남편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었다. 그랬던 남편이 이제는 먼저 내 마음을 알아주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참 안 변하는 게 사람이라는데 나도 남편도 민준이를 키우며 정말 많이 변했다. 우리를 좋은 쪽으로 변화되게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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