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려나 보다. 빠끔히 창문을 열고 보니 꽃샘추위가 봄을 시샘한다. 지난겨울이 유난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게는 유난히 봄이 그리운 겨울이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에 화창한 봄날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꽃 피고 새 울고 아지랑이 피어나는 시골 같은 봄이면 좋겠다. 봄은 그저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고 아프면서 온다. 그런 봄을 기다리며 기꺼이 마중하리라.
봄은 희망이요 꿈이요, 기다림이요, 그리움이다. 나는 창가에 앉아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지독하게 몸살을 앓아 몸 야윈 사람들, 상처받고 낙담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사람들, 울분을 삭이며 인내하는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그들은 봄을 기다리는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볕뉘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아니어도 좋다. 한줄기 동살을 기다린다.
어둑어둑한 그림자 속에서 푸르스름하게 비치는 빛줄기 같은 그런 봄,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오는 봄은 진정한 봄은 아닐 터, 봄은 누구나 공평하듯 하지만, 실제는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쏠림현상 같은 소외감이 밀려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직 봄을 마중할 준비가 되지 않아서일까, 꽃샘추위 같은 비틀거리는 바람일까, 움츠리는 기죽음일까,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 그림자가 새치름하다. 어디에선가 봄기운이 풋풋하게 속삭인다. 봄 오는 소리에 눈을 뜨니 봄이 눈앞에 살랑댄다. 앙증맞기까지 한 봄, 꼼지락꼼지락 꿈틀댄다.
눈감으면 고향의 봄날이 아른거리고 케케묵은 거름 냄새며 흙냄새가 가슴 깊숙이 스며든다. 나른한 봄날 오후 개나리 피고 살구꽃 피는 고향의 봄이 그립다. 보리밭 샛길에 춘란 같은 수줍은 청순함이여! 빛바랜 추억이여! 하고많은 봄날이 오갔지만, 또 새로운 봄을 위하여 나는 그런 봄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화사한 봄, 화창한 봄, 박옥혼금(璞玉渾金) 같은 투박한 봄을 기다린다. 누구나 그리는 봄은 있을 것이다. 때로는 물질과 욕망의 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봄은 자연의 순리 같은 봄이 아니어서 어색하다. 그래서 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아프면서 오는 봄의 길목에 서서 나는 머뭇거리며 서성인다. 나를 가로막는 마음의 빙벽을 깨야 한다. 아픔을 견뎌내야 한다. 봄은 아프면서 찾아오는 길손이라 믿는다. 봄이 왔는데도 마음은 착잡하다. 봄은 봄에만 오지 않는다. 봄은 계절 없이 찾아오는 길손이기에 설레고 아프다. 나는 까만 활자를 토닥인다. 나의 봄을 위하여, 봄은 아프면서 온다.
봄/아직 서툴다/그저 오는 것 같지만/봄은/아프면서 온다
더구나 지천명을 넘어 육십령 고갯길 너머 나에게도 봄이 있다. 엔간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젊은 피와 푸른 청춘은 녹슬었어도 마음은 초록 같은 설렘이다. 봄은 소리 없이 나를 보듬는다. 이제는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으리라.
수필집《버무린 가족》(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