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 난간에 팔을 걸치고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향미는 찜찜한 기분을 떨치려 애쓰고 있다. 출근길에 광장을 지날 때 언뜻 스친 냄새 때문에 향미는 퇴근을 한 시간 앞둔 지금까지 종일 석연치 않은 기분에 휩싸였다. 광장에서 그 냄새가 났다. 실험실에서 몇 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맡고 수치를 입력했기 때문에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그 어둡고 축축한 냄새. 공기를 채운 악취 가운데서도 익숙한 그 냄새는 어김없이 존재감을 발휘했다. 지하철역으로 가기 위해 광장 테두리를 걷다가 냄새를 맡고 향미는 걸음을 멈췄다. 새삼 스스로 못 보고 지나친 것이 있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냄새가 날 만한 무언가를 뿜어내는 기계나 냄새를 묻히고 다가오는 사람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익숙한 광장이 거기 있을 뿐이었다. 어제도 보고 오늘도 본, 별일이 없다면 내일도 볼 광장. 어디서 나는 냄새일까. 고개를 돌리면서 좌우를 살폈다. 별게 없었다.
향미는 정신을 차리고 지하철역을 향해 다시 발을 내디뎠다. 걸으면서도 여전히 시선은 좌우를 살피면서.
광장의 끝, 지하철역에 거의 도착했을 때 현수막 하나가 향미의 눈에 들어왔다.
광장 내 허가받지 않은 집회 등 불법 시위를 엄격히 금합니다.
틈만 나면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시위 인파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이 광장에선 평일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피켓이나 현수막을 통해 알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평일에는 한두 사람은 몸의 앞면과 뒷면에 문구가 적힌 패널을 목에 걸고 시위 중이었고 주말이면 뉴스를 통해 대규모 인파가 참여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왜 아무도 없지?
설마. 불길한 냄새와 관련이 있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향미의 머리를 스쳤다.
향미는 옥상 난간에 걸쳐있던 한 손으로 턱을 괸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뿌옇기만 하다. 그 냄새를 가지고 뭘 할 계획이냐는 물음에 무철은 정확한 답을 피했다. 곧 알게 될 거라는 말만 고장 난 라디오처럼 반복했다. 같은 답을 반복하는 것과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것 중에 뭐가 더 별로지. 한 사람이 그 둘을 다 하고 자빠졌을 때는 그 사람이 제일 별로라는 답이 쉽게 나왔다. 그래서 향미는 무철의 연락을 며칠째 피하고 있다.
"재미는커녕"
턱을 괴고 있던 손이 저려올 만큼 생각에 깊게 빠져있었나 보다. 옥상의 문이 열리고 인섭이 의자에 앉을 때까지 그가 들어온 것을 향미는 눈치채지 못했다. 앉아있던 인섭이 향미의 옆에 나란히 서고 나서야 향미는 인기척에 깜짝 놀랐다. 그의 턱이 멍들어 있다. 푹 익은 포도처럼 보라색으로. 아래쪽부터 보라색으로 익어가는 포도처럼 인섭의 얼굴이 그랬다. 향미의 눈을 마주 보던 인섭이 향미의 놀란 얼굴을 보고 서둘러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길이 너무 막혀서 전동킥보드를 타고 출근하다가 넘어졌다고 허둥지둥 답하는 인섭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묻지도 않았는데 인섭은 미리 준비한 것처럼 말했다. 늘 일찌감치 회사에 출근하는 그가 뭐 때문에 서두르겠다고 전동킥보드를 타겠는가. 아침 시간은 항상 여유로운 게 좋다며 사람들로 붐비는 시간을 피해 출근한다는 걸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아는데.
주머니에서 계란 하나를 꺼내 턱을 문지르며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는 건가,라고 혼잣말을 하는 인섭의 팔뚝 곳곳에도 긁힌 자국과 멍이 보인다. 전동킥보드를 타다 넘어졌다고 해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한 상처 들이겠지만 그게 아닌 걸 알고 보니 누가 봐도 누군가에게 밀리고 맞아서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거라는 향미의 말에도 인섭은 솔직히 말하고 자시고 할 게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건 인생의 진리, 그런 면에서 나는 하나를 얻은 건 확실하고 잃은 건 아직 아무것도 없어."
말하기 싫다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만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는 향미의 말에 인섭이 답했다. 이건 또 무슨 선문답인지. 곧 어떤 걸 잃을지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하다고, 이딴 식으로 한다면 친구이자 동료를 잊게 되겠다는 향미의 말에 인섭이 얼굴을 구기며 웃었다. 웃느라 얼굴이 땅겨져서 멍든 부분이 아픈지 인섭은 곧 얼굴을 찌푸린다. 어정쩡하게 웃는 인섭을 마주 보며 향미는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때였다. 그 냄새가 스친 건. 사무실에서 숱하게 맡은 냄새. 그 어둡고 축축하고 불길한 냄새. 언제 꺼냈는지 인섭의 손에 손수건이 들려있었다.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향미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인섭은 손수건을 든 손을 얼굴로 뻗으려다 어정쩡하게 동작을 멈췄다. 손수건을 든 인섭의 손이 얼굴과 어깨 사이에 어정쩡하게 멈춰있다. 향미는 인섭의 손에서 손수건을 빼앗아 코로 가져간다. 그 냄새가, 분명하다. 손수건을 코로 가져간 채 생각에 잠긴 향미에게 인섭이 두서없이 말을 꺼낸다.
"그거 박무철 상무 님껀데. 아. 그게, 내가 넘어졌을 때 그때 지나가던 상무님이 나를 우연히 보고 상처 난 곳을 좀 닦으라고 하면서 주신 건데, 오늘 돌려드리려고 가져온 건데. 그때 정말 우연히 내가 출근하는 그쪽을 지날 일이 있으셨나 봐. 그래서 내가 넘어진 걸 보고 손수건을 빌려주신 거거든."
인섭을 어떻게든 구워 삼거나 그게 안되면 겁을 줘서라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알아내야겠다. 자신을 향해 내민 인섭의 손에 향미는 손수건 대신 자신의 손을 얹는다.
"그 냄새로 박무철이 뭘 하고 있는지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