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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제이 Sep 18. 2024

후회의 냄새

무철은 이번만큼은 향미의 질문에 있는 그대로 답하기로 했다. 변명도 위로도 없이 향미의 질문에 솔직히 답하기로. 집으로 향하면서 무철은 향미가 자신에게 할 질문을 미리 예측하면서 답을 정리했다. 자신을 이용할 계획으로 접근한 거냐고 한다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솔직한 답은 절반만 그랬다는 것. 향미의 능력이 탐이 났던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향미에게 접근했지만 그 이유뿐이었다면 무철은 진즉 향미와의 관계를 정리했을 거다. 처음엔 향미의 능력만이 탐이 났지만, 계속 곁에 두고 싶을 만큼 향미라는 사람이 탐이 났다. 그럴수록 무철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두려웠다. 사실대로 고백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고백하기 마땅한 때를 놓친 후였다. 그 후 무철 자신은 이 일을 통제할 권리도 자격도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향미에게 먼저 만나자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렇게 시간이 우습도록 빠르게 지났다.       


"손수건은 여기 있어."


 둘 사이의 용건이 손수건 하나뿐이라는 듯,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문제라도 되는 듯 향미가 말했다. 향미가 앉아있는 곳 옆 침대 위에 익숙한 손수건이 보였다. 침대로 다가가 향미의 옆에 있는 손수건을 손에 쥐고 앉았다. 향미의 눈을 마주 보는 것보다는 이게 낫겠다는 생각에서, 그 눈을 마주 본다면 하지 않아도 되는 말까지 하게 될까 봐. 향미가 말을 시작하기를 기다리면서 무철은 손에 쥔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수십 번 꺼내 보고 손에 쥐어 봐서 익숙한 손수건에서 낯선 냄새가 났다. 무철은 손수건을 코로 가져갔다. 손수건을 코앞에 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잠시 손수건을 코에서 떨어트렸다가 다시 코로 가져간 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벽에 딱 붙어 있지 않고 군데군데 들떠 있는 벽지, 눈을 거의 붙이고서야 보이는 벽지의 작은 꽃무늬, 불이 꺼진 것도 아닌데 회색 빛을 띠는 실내. 둥근 천장 조명의 중앙은 날파리의 시체로 검게 변해있다. 형광등을 새것으로 바꿔 끼워도, 아니 새것으로 바꿔 끼울수록 더 많은 수의 날파리가 모여드는 통에 천장 조명 가운데 부분은 늘 거무스름했다. 

칙칙한 실내 분위기와 달리 쾌활한 웃음소리가 경쾌한 음악이 나오는 텔레비전. 텔레비전에서는 서너 명의 연예인이 정해진 시간 내에 딱지를 넘기고, 정해진 개수만큼 줄넘기를 넘고, 방금 찐 김이 펄펄 나는 감자를 먹은 후 휘파람을 불기 위해 애를 쓴다. 실패가 쌓일수록 더 잦고 더 큰 웃음소리가 화면 안에서 쏟아진다. 

그리고 텔레비전 맞은편에서 모로 누운 한 사람. 기도하는 것처럼 두 손을 모아 귀 옆에 두고 등을 새우처럼 말고 옆으로 누운 사람의 몸을 형광등의 불빛과 텔레비전에서 쏟아지는 웃음 섞인 불빛이 감싼다. 꼼짝 앉고 누워있는 사람은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창문 너머 고양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뜬다. 눈을 뜬 김에 잠시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던 사람의 눈이 곧 다시 힘없이 감긴다. 감은 두 눈 눈썹 사이에 깊은 주름이 잡힌다. 


무철의 몸이 조금씩 떨린다. 손에 쥐고 있는 손수건 위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진다. 눈물을 보자마자 무철은 세게 입술을 깨문다. 이빨에 눌린 입술은 검붉은 색을 띤다. 손수건에서 나는 냄새는 무철의 눈앞에 초라한 그 방과 그 방에 여전히 혼자 남겨진 외로운 사람을 들이밀었다. 손수건에서 나는 냄새는 ‘후회’의 냄새다.      

냄새가 어떻냐는 향미의 질문에 무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이런 질문을 할 줄 몰랐는데, 미리 알았대도 답을 준비할 수 없었을 거다. 향미의 질문에 답할 수 없는 무철은 그저 고개를 더 아래로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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