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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13. 2023

머스트 해브 아이템

Ver. 2.0

 일어나자마자 미세모 오랄비 칫솔로 이를 닦았다. 가끔 시간이 없을 때는 리스테린으로 입가심만 하고 나가는데 오늘은 입이 퍽퍽해서 꼼꼼히 닦았다. 어제 야식으로 먹은 라면 탓이다. 어려서부터 밤에 닦은 이를 아침에 또 닦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냄새가 문제라면 후라보노껌 하나면 감쪽같은데. 근데 요즘에는 치과에서 결제당하는 비용을 보고 있자니 왜 아침에도 칫솔을 드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치과는 잇몸에서 피가 나서 무서운 게 아니더라. 그냥 방심하면 피 본다.


 ᅠ몇 해 전에 큰마음먹고 필립스 전동 칫솔을 샀다. 근데 한 달도 채 못 돼서 욕실 바닥에 떨어뜨렸다.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순간 메두사와 마주친 얼간이처럼 돌덩이가 되어버렸다. 기둥머리가 부러지니 보증기간이고 뭐고 수리도 안 해줬다. 그 이후로는 그냥 싸구려 칫솔만 쓴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서 우아하게 전동 칫솔을 쓰는 배우를 보면 속이 쓰리다. 처음 진동 칫솔을 살 당시에는 왠지 하루 세 번 양치해도 즐거우리라 믿었는데,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라서 전동 칫솔도 귀찮기는 매한가지였다. 역시 양치질은 손목을 대차게 휘두르면서 닦아내는 게 속 편하다.


 ᅠ출근 전에 몸을 좀 녹이고자 필립스 반자동 커피메이커를 썼다. 사회생활 초창기에 값비싼 일제 황동 드립커피세트를 샀을 때는 아침마다 여유를 부리면서 커피를 마실 줄 알았다. 근데 보아하니 내 직장생활에는 출근만 있지 아침이란 게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아까운 칼리타 드립커피세트는 당근으로 처분했다. 대신 흔하디 흔한 필립스 커피머신을 샀다. 머신은 알아서 내려주니까 나도 이제야 영화처럼 신문이라도 읽으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신문은커녕 점점 더 잠이 부족해져서 커피를 입에 댈 시간도 없다. 이 또한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지. 그래도 필립스 커피 머신은 참 잘 산 것 같다. 십만 원 내외하는 가격이지만 예약 내림도 되고 원두도 자동으로 갈아준다. 전동 칫솔에서부터 내 첫 전기면도기, 처음 산 CD 플레이어(Compact Disk Player)까지 모두 필립스였던 걸 떠올려보면 난 이 네덜란드 기업과 궁합이 잘 맞는 모양이다.


 ᅠ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배낭 여행할 때 기차 옆자리에서 만난 노부부에게 내 이름을 필립스라고 소개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이 네임 이즈 필립스. 아이 해브 빈 유징 필립스 커피 머신. 두 유 언더스탠드?' 난 유머랍시고 환히 웃으면서 당시 내가 입었던 박지성 선수의 PSV 에인트호번 축구팀 유니폼을 가리켰다. 유니폼에는 에인트호번 축구팀 스폰서 사인 필립스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필립스 이즈 소 굿. 베리 아주 좋아. 아이 라이크 필립스 레이저 앤드 지성 팍.' 노부부는 내 얼굴과 유니폼을 번갈아보면서 진의를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미소를 지었다. 박지성 유니폼을 입고 필립스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얼간이는 좀 무서웠으리라. 수염도 없으면서 면도기 운운하는 꼴도 기이하게 보였겠지. 그리고 내 발음은 면도기의 Razor와 레이저빔을 구분해내지 못해서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사람 좋아 보이던 할머니는 점차 등을 보이며 나를 외면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네덜란드 축구 리그에서 암스테르담 지역 연고 팀은 아약스 축구팀이다. 그리고 그 아약스 축구팀 전통적인 라이벌팀이 PSV 에인트호번이다. 만약에 부부가 열혈 축구 팬이었다면 필립스 면도기를 쓰는 지성 팍의 이 어이없는 농담을 웃어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ᅠ폭스바겐 골프를 타고 사무실에 출근했다. 춥고 피곤해서 걸어가기 싫을 때는 승용차를 활용하는데, 정말 딱 출근할 때밖에 안 써서 조만간 처분할 생각이다. 내가 폭스바겐 차량을 산 건 순전히 무라카미 하루키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하루키 소설을 좋아했는데, 소설 주인공이 종종 폭스바겐 차를 탔다. 나도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처럼 방 두 칸짜리 맨션에 혼자 살면서 폭스바겐 골프를 타고 회한에 젖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하루키의 표현대로 폭스바겐은 안전하고 경제적이면서 화려하진 않지만 꾸준하고 평범한 미덕이 있다. 매일 조깅을 하고 정량의 글을 쓰는 하루키와 잘 어울린다. 처음 딜러 말에 이끌려서 팸플릿을 보고 시승했을 때, 이 차야말로 내 평생 연인이라고 느꼈다. 운명적이라는 말은 참 진부하지만, 난 처음 골프를 영접하고서 운명 비스름한 뭔가를 느낀 것 같다. 나도 왠지 폭스바겐을 타면 하루키처럼 달리고 하루키처럼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근데 지금은 어떤가. 하루키를 예전만큼 좋아하지도 않고, 차는 애물단지처럼 세금과 기름값만 잡아먹는다. 딜러는 처음에는 잘해주더니 이제 문자까지 씹는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며 변하기 마련이고, 내 신형 폭스바겐도 이제 많이 낡아버렸다.


 ᅠ내가 남과 다르게 차를 애용하는 시간이 있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이 시끄러우면 난 골프에서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잔다. 언젠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기 작품에 등장하는 '폭스바겐'에 달린 '라디에이터'에 관한 묘사를 읽은 한 독자가 폭스바겐에는 라디에이터가 없다고 따지자 이렇게 답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에서는 폭스바겐에 라디에이터가 달렸다고 상상해 주세요.” 그가 만든 세계에서는 라디에이터가 작동하니, 실제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변명이다. 지극히 문학적인 대답이지만, 내 귀에는 폭스바겐을 타면 실재하는 것을 벗어나 어떤 허구의 것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점심이 되면 난 폭스바겐이 제공하는 강렬한 엉따를 즐기면서 마치 아늑한 료칸 다다미방이라고 상상하길 즐긴다. 상상은 힘이 세서 그런지 비좁은 차 안에서 커피도 마시고 책도 한참 읽는다. 청소도 안 해서 더러운 데다가 공기가 차가워서 손도 시리지만, 차 안은 도시에서 드문 내 일 인분의 공간이다. 덤으로 폭스바겐은 스피커가 훌륭해서 배경 음악으로 깔린 쳇 베이커의 가래 끓는 목소리가 근사하고, 거금 주고 단 천연가죽 시트가 내 몸을 요람처럼 감싼다. 거기다가 남 눈치 볼 필요도 없이 캄캄한 루마 선팅 필름을 설치한 덕분에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해 준다. 오늘은 정영목 씨가 새로 번역한 민음사 판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면서 뉴욕에서 배회하는 홀든 콜필드와 홋카이도 료칸 여행을 했다. 이쯤 되면 아무래도 차를 팔기는 어려울 것 같다. 


ᅠ 오후에는 영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서 보고서를 쓰며 남몰래 아이폰 12 mini로 유튜브를 시청했다. 한쪽 귀에는 에어팟 프로를 끼고 안 보는 척하면서 곁눈질로 JTBC 뉴스룸을 즐겼다. 오늘은 여당 대표에 출마한 후보들의 공약 발표가 이어졌다. 귀를 기울여 봤지만 사실 별로 들을 만한 건 없었다. 정책은 사라지고 네거티브 공세만 이어졌다. 레퍼토리도 식상 그 자체였다. 땅 투기, 성 인지 감수성, 가족 특혜, 과거 행적, 진정성, 계파 갈등까지. 어쩌면 이렇게들 쓰는 용어가 전형적인지. 야당 당 대표 사법 리스크도 심각하지만, 집권 여당의 혼란도 못지않았다. 상대 후보를 야설 작가라고 규탄하는 발표를 듣고서는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무실에서 딴짓하는 걸 들킬까 봐 목을 킁킁거리면서 웃음소리를 기침 소리로 둔갑시켰다. 사실 난 네거티브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진지한 정책 토론을 하면 지루해서 보지도 않을 것이다. 네거티브에 어 독한 네거티브를 얹는 싸움 구경을 하느라 정치 유튜브를 시청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시계를 확인하고 퇴근하기 전에 동기부여 차원에서 헬스 유튜버의 브이로그를 시청했다. 보디빌더 김성환 선수의 팔뚝은 무시무시하지만, 거기에는 그 어떤 공격성도 없어 보여 신기했다. 오히려 제주도의 너른 들판에서 뛰노는 순마처럼 보였다. 보통 흔히들 헬스인이라고 하면 매일 운동하니까 잘 먹으면서 살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알고 보면 보디빌더는 무척 배고픈 운동이다. 대회를 앞두고는 바비큐나 생고기 같은 건 꿈도 꾸기 어렵다. 김성환 선수는 오늘 운동을 끝내고 오트밀과 달걀흰자를 김치도 없이 먹더라. 지방은 걷어내고 오직 근육으로만 몸을 꽉 채워야 하는 선수들의 고충이 다 보였다. 초원에서 풀을 뜯는 한 마리의 말이었다. 나도 오늘 밤은 꼭 닭가슴살 하나만 먹고 잘 수 있기를.


ᅠ 요즘에는 사무실에서 에어팟 끼고 일하는 걸 금기시하는 분위기다. 온라인상으로 답 없는 MZ세대를 풍자한 밈이 만들어지는 모양이다. 아마도 타인의 말에 잘 휘둘리지 않고, 조직 생활에서도 제 목소리를 내는 요즘 세대의 특징을 과장한 콩트인 것이리라. 나도 몇 번 봤는데 살짝 찔렸다. 난 쉰세대에 가깝지만, 에어팟을 끼고도 잘만 일해왔다. 그렇다고 에어팟을 끼고 남 말을 쌩까는 건 아니다. 그냥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켜서 사위를 고요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니까 전화 소리나 동료들 목소리 정도는 다 듣고도 남는다. 그 정도 눈치는 있다. 근무 시간에 집중이 안 되거나 너무 졸리면 에어팟으로 슈베르트 즉흥곡이나 뉴스 채널 따위를 들으면서 기분을 전환한다. 에어팟 밈이 유행처럼 번지기 전까지는 귀에 콩나물을 꽂고도 별문제가 없었는데, 요즘에는 확실히 눈치가 보인다. 양쪽 다는 포기하고 한쪽만 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결국 난 수업 시간에 몰래 라디오를 듣던 고등학생 시절처럼 한쪽 손으로 귀를 막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접신한다.


 ᅠ일할 때까지 에어팟을 쓰니 거의 종일 귀를 막고 사는 꼴이다. 특히 집안일을 할 때나 걸어 다닐 때 참 좋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경험처럼 뭔가를 눈으로 볼 땐 다른 걸 동시에 하기 어렵지만, 라디오처럼 듣는 매체는 충분히 들으면서 다른 걸 할 수 있다. 자투리 시간에도 뭔가를 들으면서 배우고 즐길 수 있다는 건 에어팟이 내게 준 축복이다. 그리고 퇴근 후에 헬스장을 가거나 강변을 뛸 때도 에어팟은 내가 힘들지 않도록 이런저런 좋은 말을 많이 해준다. 난 이동진, 김혜리, 유시민, 김종배, 김겨울, 김지윤 님의 인플루언싱을 몸소 체감하면서 하루를 이야깃거리로 꽉꽉 채운다. 세상이 떠드는 소리에 귀를 막고 지식인의 교양을 배워간다. 그리고 에어팟은 은밀하게 대화를 차단하는 효용도 있다. 에어팟을 끼고 일하면 아무래도 귀가 막혀있다 보니 꼭 필요한 일 아니면 동료가 대화를 걸어오지 않는다. 빨리 일을 끝내고 퇴근하고 싶은 나로서는 동료의 잡담 시도를 완전히 차단해 내는 에어팟 실드를 애용한다. 나는 귀 막고 사는 놈이요, 하며 귀머거리를 자처한다.


ᅠ 한참 일을 하다가 참호에 몸을 숨긴 군인처럼 파티션 밑에 바짝 엎드려서 코털을 다듬었다. 인그로운 헤어까지 뽑아낼 수 있는 고가의 전문가용 족집게다. 내가 털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십 년 가까이 뽑다 보니 반 전문가로 볼 수 있다. 면도기 대신 족집게로 코털과 수염을 다듬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였다. 처음에는 아파서 눈물이 다 났지만, 털이 별로 타입이라서 할만했다. '그거 잘못 뽑으면 피부 다 망가져요. 피부암도 걸릴 수 있다고요.' 자주 이런 말을 들었지만 내 피부는 여전히 건재하다. 일하다가 가끔 졸릴 때 참호 밑에서 웅크리고 손바닥만 한 거울을 보면서 흘러내리는 눈물과 터져 나오는 재채기를 참아가며 마지막 한 올까지 다 제거한다. 코털을 뽑으면 뇌척수막염이 생길 수 있다는 전문가 인터뷰를 본 적은 있지만 별로 개의치는 않는다. 내가 왜 이렇게 겁이 없나 생각해 보니 다 형 탓이다. 어릴 적에 형은 늘 외출하기 전에 현관 거울 앞에서 가츠비왁스를 바르고 남자의 향기 스프레이를 뿌리고 다이소 눈썹 칼로 눈썹을 다듬은 후에 최종적으로 코털을 점검했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족집게로 보란 듯이 굵은 코털을 뽑아냈다. 그게 참 꼴 보기 싫었던 난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코털 뽑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하듯 얘기했지만, 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형은 잠자코 남은 털을 다 뽑아내고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야 코털 뽑다가 죽을 운명이라면 내가 그냥 뒤질 테니까 신경 꺼, 이 새끼야. 그건 그렇고 나 나간 사이에 내 방에 들어가면 뒈질 줄 알아라.' 그건 그랬다. 그게 그렇게 위험하다면 코털 뽑다가 죽은 사람도 한 해에 한두 명쯤 뉴스에 나와야 하는 거 아닐까. 사망률이 더 높아 보이는 건 형 방에 침입하는 행위다. SNS가 이토록 발달한 요즘도 코털 뽑다가 병원에 실려 간 사람 얘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족집게로 수염을 뽑다가 피부암에 걸린 사람도 내 기억에는 없다. 내가 SNS를 잘 안 해서 그런가. 나도 최근에는 병원에서 레이저 제모를 했다. 조금 아프긴 하지만 깔끔하고 위엄하지 않았다. 소독부터 상처 치료에 피부 진정까지 케어를 받으니 돈이 좋구나 했다. 이렇게 다들 손쉽게 털을 뽑아대니 필립스 면도기가 요즘 안 팔리지.


ᅠ 퇴근하고 곧장 사물함에서 '신타' 프로틴 두 스푼과 찬물을 블렌더보틀 셰이커에 넣고 열심히 흔들었다. 블렌더 보틀은 동그란 알이 들어가 있어서 뭉치기 쉬운 프로틴 가루를 맑게 풀어준다. 블렌더 보틀은 이 동그란 알 덕에 헬스인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되었다. 간을 보호하기 위한 밀크티슬과 크레아틴도 헬스인 필수 영양제다. 개인적으로 영양제를 챙겨 먹지 않는 헬스인은 직무 유기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영양제 무용론도 있다는 건 알지만, 김종국이 그러지 않았나. 먹는 것까지가 운동이라고. 오늘은 무거운 중량을 다뤄야 해서 챔피언 벨트처럼 생긴 SBD 리프팅 벨트를 매고 복압을 유지하면서 데드리프트를 했다. 허리를 다치면 인생이 허무해질 것 같다는 생각에 들어 리프팅 벨트는 꼭 찬다. 부끄럽게도 무릎보호대와 팔목보호대도 찼다. 왜 부끄럽냐면, 관절마다 보호대를 차고 거울을 보면 내가 꼭 프로레슬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관절은 한 번 손상되면 돌아오지 않으니까. 운동화는 밑이 평평한 나이키 메트콘을 신었다. 쫀쫀한 바닥 재질이 지면을 강하게 눌러준다. 사실 반스 운동화를 신어도 괜찮은데 왠지 나이키를 신어야 '저스트 두 잇' 할 것 같아서 비싼ᅠ돈 주고 샀다. 이제 나이도 있으니까 쓸데없이 멋 부린다고 맨몸으로 쇠와 싸우진 않는다. 그러고 보면 헬스를 맨몸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온갖 장비를 쓰니 격세지감이 든다. 겁 없이 무게를 치던 시절은 지나갔고 삐끗해서 몇 번 다치고 나니 겁이 많아져서 준비운동만 십 분 넘게 하는 요즘 내가 낯설다. 예전만큼 운동능력이 나오질 않으니 비싼 도구의 힘을 빌리려는 심보가 생겼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냥 헬스장에서 주는 티셔츠를 입어도 되는데 스우시가 빛나는 나이키 타이츠와 트레이닝 쫄티도 챙겨 입었다. 간지를 포기하고 운동을 할 수는 없다. 거울 속 내가 멋져 보여야 피로를 무릅쓰고 헬스장에 다니는 의미가 생긴다. 과학적으로 입증하진 않았지만, 기분이 모든 걸 좌우한다는 신념이 내 나이키 계정을 VIP로 만들어냈다.


ᅠ 가만히 보면 미니멀리스트로 산다고 떵떵거렸는데, 축소지향은커녕 잡다한 물건에 둘러싸여 산다. 여전히 터치 몇 번으로 인스타에서 본 필수템 따위를 쇼핑한다. 책, 연필, 라코스테 티셔츠는 정기적인 지출을 요한다. 이러니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물건이 신상에 밀려나 별 쓰임도 없이 버려진다. 꼭 필요한 걸로만 이뤄진 삶을 원했지만, 내가 지금 사는 꼴을 보면 켜켜이 쌓인 물건에 끌려다니는 형국이다. 물건도 사람처럼 궁합이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를 형성한다. 그래서 물건에는 사람 간의 이야깃거리가 담기고, 손때 뭍은 물건일수록 추억이 페이스트리처럼 포개진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좋은 추억이 담긴 물건만 갖고 살아야 마땅하다. 비슷한 얘기로, 소설 <일식>으로 유명한 히라노 게이치로는 우리가 자기 전부를 좋아하기는 어려워도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의 내 모습을 좋아하는 건 어렵지 않다는 취지로 얘기한 바 있다. 스타벅스에 가서 오늘의 커피를 시키고 맥북으로 글을 쓰는 날 사랑하긴 어렵지 않다. 필요 없는 모든 세간을 가져다 버리며 비좁은 집을 넓게 쓰는 라이프스타일은 자긍심을 부른다. 어떤 물건을 곁에 두는가가 나를 긍정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일 수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람마다 머스트 해브 아이템은 다 제각각이겠지만 내 취향이 묻어나는 물건 속에서 나는 고유해진다. 끝도 없는 실망과 혐오가 엄습하는 이 우주에서 난 어떤 물건을 사랑하고 어떤 물건은 밀어내며 나를 만들어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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