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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16. 2019

당신의 취향은 어떤가요

구별짓기, 피에르 부르디외 저

월요일,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어렵사리 집에 들어왔다. 몸이 말이 아니었다. 78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쓴 <구별 짓기>라는 책을 읽다가 잠들었다. “우리가 취향이라고 부르는 건 사회에서 자신보다 밑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상징이다.” 침대에 누워서도 이 문장이 눈에 붙들려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누구나 제 취향을 카톡과 인스타를 통해 공유한다. 어디를 갔는지, 무엇을 입는지, 어떤 식당에서 무얼 보는지, 지금 읽는 책이 뭔지 낱낱이 오픈한다. 각자 취향을 비교하고 그 우위를 점하기 위해 강도를 높여가는 경주 같다. 스스로 낮은 취향을 가진다고 여기면 온라인에 풀지 못한다. 누가 봤을 때도 내놓을만한 고급 취향이라 여겨지면 오픈한다. 취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모든 것, 즉 인간과 사물 그리고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를 가지는 통로다.

내가 이른바 콤플렉스에 가까운 역부족을 느끼는 건 클래식 음악이다. 없던 관심이 갑자기 생길 리도 없거니와, 최근 부쩍 관련 책을 읽어보아도 그 복잡한 맥락 앞에서 갈피를 못 잡는다. 카라얀의 열정적인 지휘를 유튜브로 봐도 여전히 베토벤 교향곡 번호만 보면 속이 울렁거린다. 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지 않지만, 전인에 대한 맹목적 이상으로 껍데기뿐인 연주곡을 플레이리스트에 올린다. 누군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인생을 행복하게 산다고 했던가. 난 이렇게 다시 고쳐 말한다. 지적 열등감이 당신의 취향을 고양한다. 내게 남들보다 뭔가 잘 모른다는 인식이 내 지적 허영을 자극한다. 난 늘 책을 옆구리에 끼고선 열등감의 발현을 마주할까 두려워한다.

토마스 부르디외 작가의 '구별 짓기'

화요일, 과거 누군가 내 책장을 찍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그 부탁은 결국 책을 좀 추천해달라는 요지였는데, 난 부탁을 단호히 거절했다. 누군가 내 가방 속 물건을 보자고 하면 순순히 열어서 보여줄 테다. 하지만 난 책장을 보여주긴 꺼린다. 내게 책장은 속내를 비추는 투명 거울과 같다. 그 자체로 나 자신이라는 말이다. 난 누군가와 몇 시간을 대화해도, 심지어 종종 만나 데이트를 해도 그 사람을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책장을 본다면 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믿는다. 난 지하철에서 누군가 책을 읽으면 책 제목을 보려고 몸을 이리저리 꼰다. 그가 읽는 책 제목으로 그 사람과 내 거리를 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손쉬운 단정은 책을 향한 무차별적인 애정이 불러온 오류다. 근거도 미약하고 편협하기 그지없는 시각이지만, 내가 가진 취향이란 딱 그 정도다. 당신이 읽는 책이 당신을 말해준다.

내게 취향이란 ‘맥락’이다. 오늘날 지식이란 깊이와 넓이는 의미가 없어졌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인터넷에 버젓이 있으니까. 3초면 그와 관련된 모든 지식을 총망라할 수 있다. 인터넷은 지식에서 맥락의 중요성을 심화시켰다. 우리는 모르는게 있다면 손 안에서 알아내고, 일반상식 책을 통째로 외운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을 제 방식으로 꿰맞출 수 있는 사람이 지식인으로 통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 차이를 강조하는 취향의 시대에 지식이 가진 맥락을 자유롭게 놀릴 수 있는 사람이 독창성을 획득한다. 어제 본 영화의 주연배우가 생각이 안 나 구글을 검색해서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영화가 지닌 장르 특성을 이해하려면 영화 역사의 흐름을 짚을 수 있어야 한다. '누벨바그'인지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향인지 판단하려면 흐름을 이해하고 차이를 짚어낼 수 있어야 한다. 지식의 폭이 넓은 사람은 그만큼 하나의 예술작품에서 더 많은 재미를 찾아낼 수 있다.    

영화 일일시호일

수요일, 영화 <일일시호일>을 보았다. 키키 키린 여사가 세상을 떠난 후 처음 뵈었다. 돌아가시기 전 최근까지 계속 투병 생활을 해오셨는데, 이 영화는 그녀의 건강한 모습이 느껴져서 오히려 슬펐다. 영화 속에서 늘 밝은 모습만 보았기에 마음이 편했다. 일부 영화관은 그녀를 추모하는 영화들을 극장에 건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주마등이라니, 요즘엔 그 누구도 말을 타고 환한 불빛을 스쳐 지나가지 않는데. 키키 키린 할머니라면 내 구질구질한 표현을 구박했을 테지. 조금은 뿌루퉁하고, 가끔은 얄미운 그녀의 말투가 무척 그립다. 그녀가 없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과연 내 취향에 맞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에 나오는 작은 고택이 떠오른다. 능청스럽게 며느리를 구박하는 할머니. 적당히 때가 묻고, 난데없이 천진한 할머니.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설탕물을 얼린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아들의 가슴을 시리게 하는 잔인한 할머니. "떠나고 난 뒤에 그리워해 봤자 소용없어. 도대체 언제까지 잃어버린 것을 쫓아가고, 그렇게 살면 하루하루가 즐겁지 않은데, 행복이라는 건 무언가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받을 수 없는 거야"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목요일,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 관한 글을 읽다 보니 엉뚱하게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 생각이 났다. 2010년, 캐나다 밴쿠버의 새하얀 빙판, 상기된 표정으로 이어폰을 꽂고 차례를 기다리던 ‘아사다 마오’도 떠오른다. 우린 늘 냉철한 얼굴로 신기록을 달성하던 김연아를 기억하지만, 난 당시 자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아사다 마오’의 울음이 더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패배를 직감한 순간 표정엔 스산한 기운이 있었다. 모든 이의 기대를 저버린 망연함. 경기가 끝난 후 우리 국민이 그토록 미워했던 작은 소녀는 애처로운 얼굴로 은메달을 걸었다. 올림픽이 뭐라고, 금메달이 뭐라고.

난 당시 올림픽 영상을 유튜브로 종종 찾아본다. 살면서 단 한 번도 피겨스케이팅을 본 적이 없었는데, 경기 당일만큼은 사무실 TV 앞에서 짝다리를 짚고 몰입했던 기억이 난다. 그 어떤 예술에서도 본 적이 없던 육체성. 온 나라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감탄을 쏟아냈기에 내가 더 보탤 말은 없다. 그저 그녀가 입은 파란색 의상과 프리스케이팅 배경음악이었던 ‘조지 거슈윈’ 피아노 협주곡 바장조 멜로디를 떠올린다. ‘글렌 굴드’ 전기를 보면서 깨달은 사실이지만, 예술이 고양되는 순간은 육체의 움직임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글렌 굴드의 굽은 등과 현란한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출 때, 피아노와 한 몸으로 용해되길 원했던 한 예술가의 육체를 목격한다. 액션 페인팅을 하는 ‘잭슨 폴록’처럼, 난 김연아의 곡예와 같은 움직임에서 궁극을 목도한다.

샤갈의 그림들

금요일, 몇 달 전 한가람 미술관에서 '마르크 샤갈' 전을 떠올렸다. 장난기와 귀여움을 동반한 샤갈의 작품은 안온하다. 미술관에 들르기 전, 그의 인생 이력을 읽어보았다. 예술 사조와 동료 작가들을 익혀두고 같이 간 친구에게 아는 척을 했다. 몸이 붕 떠 있는 여인의 얼굴과 난데없는 말 대가리의 등장. 천사는 공중에서 배꼽 없는 배를 드러내고, 큰 나무는 고향의 뿌리를 간직한다. 작가에게 독창성이란 과연 뭘까. 샤갈의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밝은 감정을 표현한다. 100년을 해로한 이 노인은 죽는 날까지 고향과 가족에 관해 수많은 그림을 쏟아냈다. 행복한 자아도취랄까. 미술관의 수많은 인파가 샤갈을 보며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진 않았을까. 한없는 그리움과 연애의 애틋함을 그렸을지도 몰라. 완전한 낙원을 그렸던 샤갈의 기개에 퍽 감화된 나는 하염없는 망상에 젖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엔 집에서 몇 분 안 걸리는 여의도에 머문다. 주말 여의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카페들은 텅텅 비어있다. 마치 독서를 위한 섬처럼 느껴진다. 식당들은 거의 다 문을 닫았지만, 분식집은 건재해서 다행이야. 최근 여러 독서 모임을 신청한 탓에 시간에 쫓기며 책을 읽는다.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빡빡하게 읽는다. 무려 조지 오웰과 밀란 쿤데라, 장 자크 루소와 씨름한다. 제한된 시간에 여러 권을 소화하다 보니 카페 안에 들어서면 마치 창작의 압박에 시달리는 작가가 된 기분이다. 낯선 타인과 몇 주 전까진 전혀 몰랐던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 틀을 벗겨내는 시간을 고대한다. 이 누추하고 부박한 삶에 잠시나마 사유를 마련하고자. 한 주도 이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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