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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03. 2020

그 마들렌 맛이었다

여행의 이유

 퇴근하고 갈피를 못 잡다 망원역에 내렸다. 보기 드물게 공기가 상쾌해 내키는 대로 걷는다. 버지니아 울프가 옷 속에 돌덩이를 넣고 우즈강에 스며들 때도 이렇게 맑았다. 어쩌면 날씨는 그 자체로 문학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뒤바꿀 수 있는, 그날의 기분을 달리하니까. 다행인지 아닌지 오늘은 무구한 하늘이다. 한참을 걸어도 힘들지 않을 만큼 청량하다. 괜스레 들떠 뭐라도 눈에 들어올까 두리번거린다. 골목이 실종된 서울에서 이 부근은 신기할 정도로 길이 곱이곱이 나 있다. 집 구경 사람 구경 고양이 구경에 여념이 없다. 그러다가 바람에 휘날려온 전단에 눈길이 간다. 녀석은 머리 위까지 날아오르더니 내 앞에 툭 떨어졌다. 어쩐지 의미심장해진 난 종이에 적힌 글자를 읽는다. 오픈! 초대박 세일! 헬스 등록하면 요가 필라테스 복싱까지 무료! 난 삶 속에서 뭔가를 찾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이런저런 곳에 의미를 부여하곤 잘도 떠든다. 한낱 전단에 적힌 글자마저도 달리 보여 번거롭다. 그렇게 쉼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연희동에 다다랐다. 연희동엔 의미가 없지만, 결국 연희동에 이르렀다. 이제 어디든 들어가 앉아야겠어. 손도 아프고 다리도 쑤시고 배도 고파. 어디로 갈까. 골목마다 카페가 그득하니 갈피를 못 잡겠다. 난 다수의 선택지 앞에서 피로를 느낀다. 어디 커피 맛이 좋을지, 어디 주인이 친절할지, 어디 의자가 안락할지, 어디 화장실이 깨끗할지 알 수 없다. 난 가방을 고쳐 매고 발길을 돌려 늘 가던 스타벅스에 눌러앉는다.


 작년 한 해는 일정이 빼곡해 제대로 휴가도 못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낯선 동네를 정처 없이 걷거나, 여행에 관한 책으로 아쉬움을 달래 보는 일 따위였다. 산해진미를 맛보고 오성급 호텔에서 셀카를 찍는 빌어먹을 인스타그램은 되도록 멀리하고, 저만의 고유명사를 가진 여행책을 읽으며 맘을 달랬다. 하지만 세상에 괜찮은 여행책을 찾기란 꽤 어려운 일이더라.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는 보기 드물게 마음을 잡는 구석이 있는 여행책이었다. 무엇보다 <여행의 이유>는 관광의 호의호식에 집중하기보단 여행이 한 개인에 끼치는 여파에 집중한다. 책이란 어쩔 수 없이 간접 경험이라 아무리 곡진하게 적어도 당사자가 아니면 한갓진 소리로 들리기에 십상이다. 맛집 탐방과 기가 막힌 경치는 글이 다다를 수 없는 스펙터클이다. 누군가의 여행기를 읽고 공명할 수 있으려면 결국 저자의 속사정에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여행의 이유>는 대부분의 걸출한 산문이 그렇듯 여행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실패담을 통해 저자 특유의 색을 입힌다. 여행의 교훈이라거나 실패를 딛고 성장했다는 뻔한 전개가 아닌, 일상을 벗어난 자가 마주한 시공간의 확장을 대리 체험할 수 있다. 여행에서 저만의 고유한 서사를 뽑아내고, 누구나 가는 여행지에서도 전혀 다른 경험을 끄집어낸다. 난 좌충우돌 모험기를 읽으며 마치 편안한 소파에 앉아 재난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흥미를 느꼈다. 기억 어느 한 편에 묻어두었던 여행지를 떠올렸고, 우여곡절 끝에 실패로 끝난 저자의 여행기가 결코 나와 멀지 않음을 깨달았다. <여행의 이유>는 이처럼 여행이 가진 실체를 포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낭만적인 여행이 끝난 후에 곱씹을 수 있는 여파를 그려낸다.


 김영하는 프랑스 작가 실뱅 테송의 말을 빌려 여행은 여행자가 외부 세계에 감행하는 습격이며, 여행자는 언젠가 노획물을 잔뜩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약탈자라고 말한다. 나 역시 간혹 명동 거리를 걸을 때 무수한 관광객에 질리곤 한다. 어릴 적 추억이 새겨진 명동 성당마저 빼앗긴 기분이 들어 얼른 군중을 피해 을지로 귀퉁이로 달아난다. 현지인은 타국에서 온 손님을 달가워 않는다. 어렵사리 돈을 모으고 짬을 내 휴가를 왔을 이들이 그저 귀찮고 성가실 뿐이다. 유럽에서도 요즘 주요 관광 도시가 오버 투어리즘으로 고생한다. 도시를 점거한 여행자로 인해 거리마다 인산인해고, 현지인이 찾는 카페가 관광객에 잠식된 지 오래다. 작가 수전 손택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진다 해도 여행은 영혼의 식민주의라 칭하기도 했다. 이는 최근 전 세계에 화두로 떠오른 난민 문제와 엮어 생각해보면 더 골치가 아프다. 전 세계적으로 외지인에 대한 배척이 만연하고, 혐오를 조장하는 움직임이 횡횡한다. 이런 적대적인 기류에 대해 김영하는 자신이 배낭여행을 하던 일화를 언급하며 경계를 내비친다. 그는 이십 대에 떠난 유럽 배낭여행에서 기대치 않은 환대를 받았다. 여행자란 늘 초행인지라 어리숙하기 마련이고, 타인의 친절 없이는 곤란에 빠지고 만다. 돈도 없고 마음이 고달플 때 낯선 타국의 시민들은 친절을 베풀었다. 그가 잘나거나 불쌍해 보여서가 아니라 그가 그저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커피 한 잔을 대접했다. 김영하는 이런 기억에 보답하기 위해 가끔 한국에서 길을 헤매는 외국인에게 친절을 베푼다고 한다. 자신이 받은 덕을 순환하고자 한다. 그것이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무수한 여행자가 서로에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라고. 김영하는 여행이 지닌 폭력성에 비추어 순환하는 환대의 가치를 상기한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질병을 안고 작품을 썼다. 현대인이 앓는 각종 질병을 온몸에 품었다. 사망하기 16년 전부터는 나는 곧 죽는다고 떠벌리고 다녔을 정도다. 늘 불면증과 만성 통증에 시달렸던 그는 잠이 안 오면 열차 시간표를 읽었다. 밤낮을 거꾸로 살며 집필에 몰두했고 여행보다는 안내 책자를 읽으며 만족했다. 프루스트는 일이 틀어지기 전에는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고 단언했다. 행복은 몸에 좋지만, 마음을 키우는 건 슬픔이라며 고통 없는 인생의 허망함을 말했다. 그는 통증이 뭔가를 깨우친다고 믿었고, 그 생각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포갰다. 그는 마들렌을 먹다가 불현듯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홍차 향기가 잠든 심연을 떠올리게 했다. “갑자기 모든 기억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맛은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고모가 차에 살짝 담가 내게 건네주던 바로 그 마들렌 맛이었다.” 난 저녁마다 홍차와 마들렌 대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신다. 저녁 11시,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고개를 드니 카페 직원들이 분주하다. 잔여들이 나가주길 바라는 눈치다. 난 153번 버스를 타고 영등포를 지나 내린다. 여전히 바람은 시원하고 커피 때문인지 피로한 기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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