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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스 Dec 05. 2022

엄마는 열한 살입니다.

느리지만, 가고 있습니다.

아들 둘과 동거 중이다. 모두 내가 낳은 아들이다. 대개는 시어머니의 아들까지 포함하며 이런 경우 아들이 셋이라는데, 다행히 '큰'아들은 열한 살 된 내 아들이다.


나는 민증 잉크가 말라비틀어진 사십대 중반인 아줌마이다. 산전수전까지 겪어보진 못했지만 인간으로 마흔의 세월 값은 하고 살고 있다, 생각했다. 남편 바라기 아내의 역할도, 아빠와 엄마의 큰딸로, 시부모님껜 K며느리로 살뜰한 삶을 꾸린다. 다만, 엄마라는 역할 앞에서 고운 수식어를 붙이기엔 쪼그라드는 것이 진짜 내 모습이다.


아이의 나이만큼 엄마로 살아온 나도 열한 살이 되었다. 막 엄마 딱지를 붙이고 떡진 머리에 젖비린내 나는 수유복을 입고 아이와 함께 씨름하던 애송이는 이제 없다. 애송이 딱지를 떼고 나면 육아는 순풍을 타고 흐르듯 아름다울거라 믿었다. 밥을 한 시간 씩 먹는 아이들에게 화가 나고, 친구한테 맞고 오는 녀석에게 도리어 소리를 지르고, 미끄럼틀 꼭대기에서 곡예쇼를 벌리는 놈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육아는 아름다움보다는 화를 속성으로 배우는 길이었다.


마흔의 내공을 보여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나이는 그냥 먹는 것이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나란 인간과 엄마란 존재는 지킬과 하이드 이상의 차이를 보였다.  눈에 보이는 테크닉은 한 걸음씩 전진했지만, 웃으며 말하고 참을 인을 새기는 기술은 늘 일보 씩 멀어져 갔다.


왜? 아이는 태어나 젖을 빨며 머릿 속에 세상사는 법을 차곡차곡 저장하며 커가는데, 나는 그 세월만큼 아이 키우는 법에 유연함이 생기지 않을까. 우스갯 소리로 '아이의 뇌가 자라는 크기만큼 엄마의 뇌는 쪼그라드는 것 같다' 라고 말해버렸지만, 일말의 거짓도 없는 고백이었다.


이렇게 쓰고보니, 내가 세상 별난 아들 둘을 키우는 것 같다. 뒷끝없고, 섬세하고 다정한 녀석들이 우리집 형제들이다. 종일을 책에 묻혀 사는 시현과 개구쟁이로 통하지만 제 할 일은 다 하는 지현. 엄마의 감정에 공감할 줄 알고, 나의 말상대가 되어는 주는 귀여운 녀석들이다. 또 이렇게 쓰고보니 세상 귀하고 고운 아이들인데, 뻣뻣하기만 한 열한 살의 엄마탓에 못난이가 되었지도 모르겠다.


속성으로 내공 짱짱한 엄마로 거듭날 수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할까.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혹'하고 구미가 당기는가? 당연히 없을 길이지만 그러고 싶진 않다. 애증을 반복하며 제자리에서 걷더라도 느리게 엄마가 되련다. 오늘도 버럭과 온화함 사이에서 11년 쌓아올린 내공을 깎아 먹지만, 오롯이 나의 아이들과 함께 엄마 나이를 먹어가고 싶다.  


엄마는 열한 살이다.

느리지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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