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술램프 3화

by Outis

<서기 1세기, 기억에서 지워진 밤>


"하아."


나는 고개를 위로 쳐들고 한숨을 쉬었다. 쓸데없이 반짝대는 저 가스 먼지 덩어리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평온하기만 하다.


난감하다.


하도 시끄러워서 일단 살려주겠다고 하긴 했는데, 이제 어쩐다.

나는 아이의 몰골을 곁눈질로 보며 아까 들은 사연을 떠올렸다. 쯧. 입매가 비뚤어지고 혀가 절로 튄다.


'골치 아프네. 그렇다고 내가 거두긴 더 싫고.'


인간 여자아이의 보모 역할? 그런 귀찮은 짓을 내가? 말도 안 되지.

동물이든 인간이든, 동족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게 제일이다. 무리로 돌려보내는 게 최선이다. 그래, 그게 맞다.


그렇다면 할 일은 두 가지다. 얘가 마을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고 마을에 당도했을 때 그곳 사람들에게 죽임 당하지 않도록 수를 쓰는 것.

이 둘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자 제일 간편한 방법은.


"야. 너 다리 좀 이쪽으로 뻗어 봐."


"예?"


"얼른. 다친 거 치료해 줄 테니까. 발목이 나아야 뭘 하든 할 거 아냐."


아이는 주춤주춤 볼품없는 얇은 다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몸을 숙여 양손으로 아이의 발목을 감싸 쥐었다. 하도 작아서 쏙 들어온다.


'번거롭게 됐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다. 주변 살갗이 발갛게 부어올랐고, 벌써 상처가 검게 변했다.

하긴. 깨끗한 칼로 그어줬을 리가 없지. 쇠독이 들어가 이미 피 속으로 퍼지기 시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네? 네... 아!"


내 손바닥에서 녹색 빛이 나오자 아이가 움찔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잔뜩 긴장한 어깨는 서서히 사라지는 다리의 통증과 함께 느슨히 풀어졌다.

완전히 긴장이 풀린 아이는 반딧불처럼 주변에 퍼져나가는 에메랄드빛을 경이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눈물과 먼지가 뒤엉켜 지저분하게 말라 있는 뺨에 아데니움(사막 장미)처럼 붉은 화색이 돌았다.

이 보잘것없는 아이의 미소가, 검푸른 하늘에 별처럼 박혔다.


"... 다 됐다."


"아, 감사합... 어? 이게 뭐예요?"


이전에 없던 문신이 다리에 생긴 걸 보고 아이가 놀라 물었다. 옅은 갈색 문신은 발목 상처 자리에서부터 무릎 아래까지, 종아리와 정강이를 휘감고 올라가는 잎사귀덩굴 모양이었다.


"표식."


"표식?"


"네가 내 가호를 입었다는 증표야. 이걸 보면 마을 놈들도 내 화를 살까 두려워 널 함부로 죽이진 못할 거다."


뭐, 그것도 알아볼 놈이 있을 때의 얘기지만.


"아... 감사합니다..."


기껏 안 죽게 손을 써줬는데 어째 애 표정이 어둡다. 내 말을 못 믿겠단 건가? 그러든가 말든가. 난 할 만큼 했다고.


"그럼 이제 너희 마을로 가는 방법 말인데, 저기 북극성을 기준으로..."


나는 손가락으로 밤하늘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어떻게 방향을 계산하는지 알려주었다. 그렇게 한창 설명에 집중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애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서 날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걸.


“그렇게만 가면... 되는데...”


나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그래, 눈높이에 맞춰서 쉽게 가자.


"잠깐 이쪽으로 서서 눈 감아봐."


나는 마을이 있는 쪽을 향해 아이를 세우고 감긴 눈 위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눈에 반짝임을 새겼다.


"눈 떠."


"아! 아까 없던 별이 생겼어요."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정령님 별도 만들어요?"


"아니. 네 눈에 새긴 것뿐이야. 그걸 따라 쭉 가면 돼. 눈을 감아도 보일 테니까 낮에도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어."


"우와, 정말이다.. 너무 예뻐요. 헤헤."


이쁜 건 부차적인 거고, 나침반이라니까.


"꼭 보석 같아요."


하여간 인간 여자애들이란. 예쁘고 반짝이는 것만 보면 사족을 못 써요.


"정령님처럼요!"


"..?!"


어, 뭐... 그래. 내가 좀... 생기긴 했어. 너희 인간들 눈에는 더, 그렇... 겠지.


"그런데 낮에는 눈을 감아야 보여요?"


"당연하지. 햇빛이 강해서 잘 안 보일 거 아냐."


"눈 감고 걷다가 넘어지면 어떡해요?"


맙소사. 내가 이런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챙겨줘야 하냐? 그냥 한쪽 눈을 감고 가거나, 아님 감았다 떴다 하면서 가면 되잖아! 하여간 이 멍청하고 무능한 것들이랑 엮이면 피곤하다니까...


“......”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한 커다란 갈색눈. 아이가 울상을 짓고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알았다... 해 줄게.


나는 모래 한 줌을 집어 오므린 손안에 살살 숨을 불어넣었다. 그런 다음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의 발 위에 내 숨결을 머금은 모래를 조심스레 뿌렸다. 사라락. 떨어지는 모래가 간지러운지 아이가 키득거렸다.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내 머리 위에서 통통 튀었다.


"자. 이러면 모래가 네 앞길에 편평한 길을 내어줄 거야. 마을에 도착할 때까진 뭐에 걸려서 넘어질 일은 없어. 네 다리 빼고는."


아이는 자기 발이 향하는 곳마다 모래가 알아서 편평하게 펴지는 걸 보고 신기한 듯 웃었다.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만이야. 그 이후엔 없어질 능력이니까, 너무 익숙해지진 마."


"그럼, 눈에 새겨진 별도요?"


"어."


뭘 그런 당연한 걸 묻지. 어째 좀 많이 실망한 눈치다.


"그 편이 너를 위해서도 좋아."


영문을 모르는 커다란 눈이 깜빡거렸다.

특별함. 무리와 다르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넌 아직 모르겠지.


나는 사막의 입을 벌려 어떤 불운한 여행자가 남긴 가죽 수통을 집어 들고는, 작은 오아시스를 열어 수통에 물을 채웠다.


"자, 그만 가라."


아이는 말없이 내가 건넨 수통을 받아 들고 머뭇거렸다. 알아달라는 듯 슬쩍슬쩍 흔들리는 몸. 고집스럽게 땅에 딱 달라붙은 발바닥. 그리고 꼼지락대는 발가락.

안 될 일이다. 아무리 떼를 써도 그건 안 돼.


"가."


매몰찬 내 목소리에 떠밀려, 아이는 걷기 시작했다.

사라락. 길을 내어주는 모래 위에 사뿐히 걸어간 작은 발자국이 남았다.

자꾸만 돌아보길래 넘어질까 싶어,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나지막이 훌쩍이는 소리가 모래와 함께 바람을 타고 별을 쓸었다.




소녀는 걷고 또 걷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걸었습니다.

유일하게 가진 수통을 꼭 안고서, 반드시 살아서 마을에 돌아가겠다 다짐하면서.

전에는 그저 죽고 싶지 않았다면, 이제는 절대 죽을 수 없는 이유가 그녀에게 생겼습니다.


저 멀리 익숙한 마을의 모습이 한낮의 열기 위에 어렴풋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을 때, 소녀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해냈어요. 저 해냈어요!'. 그녀는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눈에 새겨진 빛은 어느새 사라졌어도, 그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선명한 빛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이 스스로를 어떤 길로 인도할지 알지 못한 채.

그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시간을 넘어, 그 운명이 어디에 닿을지 알지 못한 채.


소녀는 마을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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