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누라 Jun 03. 2024

마음에 마음이 답하여

[LA에 있는, 일본인 거리에 있는, 한국인들이 손에 쥔 아이스크림이야기

낯선 곳에서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건 행운이요, 그 좋은 사람을 근거리에 두고 긴 시간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이다.  


  이렇게 선생님 같은 가이드는 처음이었다. 존칭으로써 흔히 쓰는 그 ‘선생님’이 아니라 교단에서 가르치는 ‘teacher’ 같은 가이드분이었다. 일정에 대해 조곤조곤 알려주시고, 이동하는 중에는 목적지에 대한 정보 등을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때론 ‘이따가 잘 시간 줄 테니, 지금은 잠시 이 설명을 들으셔야 합니다.’라고 하실 때면 영락없는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일정이 진행되던 어느 날, 한참 동안 본인 이야기를 해주셨다. 미국으로 넘어와서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미군에 입대하여 오랜 기간 복무하셨고, 지금은 개인 사업체를 운영하시면서 때때로 가이드 일을 병행하신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 같으면서도 약간 결이 다른 느낌이었는데, 그래, 마치 군대 조교님 같았어. 가이드님의 이야기를 듣고 때론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는(?) - 아이들의 입장은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에게 빠져들었다. ‘좋은 사람이군. 다행이야.’




그의 마음


  Grand Canyon West의 투어 일정 중 하이라이트는 역시 Guano Point였다. 붉은 바위 언덕을 올라 최상위 꼭대기에 서면 사방에서 거대한 협곡이 둘러쌓음을 느낄 수 있다. 고개를 들면 대한민국 가을하늘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푸르디 청량한 하늘이 있고 서서히 고개를 내리다 보면 어느 경계에서 갑자기 붉게 솟은 지층이 층마다 제 색깔을 뽐내고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지층을 따라 고개를 숙이면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 회색빛 물이 흐느적거린다. 한참을 둘러보아도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남에 감탄을 거듭한다.

정신없이 협곡을 즐기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돌아가는 길목에서 이쪽을 향해 고정된 자세로 지켜보는 가이드 선생님이 계셨다.

  “여기서 뭐 하세요?”

  “혹시 몰라서 여기서 지켜보는 중입니다.”

  일행들이 즐기는 동안 잠시 휴식을 취하시나 싶어 가볍게 말을 건넸으나 그게 아니었다. 그랜드캐니언의 절벽에는 울타리가 없다. 난간에서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추락이다. 몇 년 전에는 한국의 대학생들이 와서 서로 밀치는 장난을 하나가 한 명이 추락사한 예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 학생들은 그런 장난을 할 정도의 괴팍한 친구는 없어 보여 다행이라고 하셨다. 다만, 몇몇 혼자 구경하는 아이들을 주의 깊게 보는 중이셨다.

  “혼자서 느긋하게 경치를 즐기는 것인지, 낯선 타지에서 문득 고독 혹은 외로움을 곱씹는 중인지 확인해야겠습니다.”

  가이드 선생님은 바위 언덕 옆으로 돌아 뒤편으로 사라지는 한 친구를 가리키며 걸음을 옮기셨다. 덩달아 나도 다시 협곡으로 향했다. 다행히 그 친구는 혼자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가 이제 다시 모일 시간이라며 함께 돌아갔다.  먼 곳을 응시하던 그의 눈빛은 가이드로써 문제 상황을 예방하려는 직업의식 그 이상이었다. 누군가를 지키고자 하는 투철함. 바로 그 마음.




그의 기분

 

 Las Vegas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LA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본인의 가족을 이야기하셨다. 결혼이 늦었고 그래서 남들 더 많은 나이에 아이를 얻으셨다. 투어 준비 및 가이드로 인해 일주일 동안 쪼그마한 딸내미를 못 본 상황. 오늘 밤에는 하루 일정이 끝나면 딸아이가 있는 집에서 고 올 거라며 듬직한 선생님께선 들떠있으셨다.

  “물론 끝나고 가면 딸내미는 자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계속 잠들어 있는 아침 일찍 나와야겠지요. 자는 모습이라도 직접 보는 게 어딥니까. 아! 맞다. 기념품 사 오라고 했는데 어떡하지. 요즘 우리 딸이 포켓몬에 빠져있는데 게 중 이브이(?)라는 캐릭터를 엄청나게 좋아하더군요. 사실 저는 이브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하하하. 나이 들어서 꼬맹이 키우려니 이것저것 알아야 할 것도 참 많네요. 하하하.”

  모두 이제 집으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음에 아쉬움을 곱씹고 있는 와중에, 그 홀로 집에 가는 길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 이렇게 수다스러우셨나? 그만큼 우리가 편해진 것인가?

  “오늘은 원래 호텔에 들어가면 일정 끝입니다만, 제가 기분이 좋아서 여러분들 모시고 가까운 곳으로 산책하러 가도록 하겠습니다.”

  Las Vegas와 달리 LA에서는 밤에 함부로 돌아다니면 위험하다. 대부분의 미국이 그렇다. 그렇기에 오늘은 모두 호텔에서 밤을 즐기고자 했다. 그런데 가이드 선생님께서 본인이 안전하게 가이드하겠다며 모두를 근처의 일본인 거리로 안내하셨다. 어여쁜 딸내미 보러 얼른 집에 가셔야 할 텐데. 우리가 그렇게 좋으신가? 뭐 암튼 감사한 일이다.




아이들의 마음


 갑자기 소란스럽다. 내내 차분하시던 가이드 선생님이 매우 부산스러우시다. 급하게 아이들을 불러 모으신다. 그러고는 마감하려는 매장에 사정사정하시더니 벌꿀 아이스크림을 왕창 사서 아이들에게 나눠주셨다. 그 덕에 나도 한 입 얻어먹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사건의 전모는 이러했다. 몇몇 아이들이 거리를 둘러보다가 상점에서 ‘이브이’ 캐릭터 인형을 사서 가이드 선생님께 선물로 드린 것이다. 그것이 그의 마음을 한껏 건드려 놨다. 그와 어울리지 않은 그 부산스러움은 주체할 수 없는 행복의 표현이었다. 잠든 꼬맹이 머리맡에 놔줘야겠다며 인형을 꼭 쥔 그 손. 이 세상 행복이 응집된 그 손. 그 행복을 이끈 아이들의 마음.

  너희들 어디서 그런 생각을, 그런 마음을 배웠니? 어떻게 상대의 마음을 바라보고 그 마음을 어루만질 생각을 한 거니? 멋지다. 이곳에서 이번 해외 탐방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선생의 자격으로 왔지만, 조용히 큰 울림의 깨달음을 얻었다. 부끄럽고 고맙다.


낯선 곳에서 좋은 배움을 한다는 건 행운이요, 그 배움을 넘어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것은 행복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겨진 화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