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야구를 보는 이유

by Kerve

"그래서, 야구를 왜 좋아하는데?"


내 또래들한테서 종종 듣는 질문이다. 야구의 본고장이라는 명성이 무색하게도 내 주변에는 야구를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야구가 정적인 스포츠라 지루하다는 게 주된 이유다. 내 나이대에서 스포츠를 본다 하면 체감상 70%가 NBA를 좋아한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야빠라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구를 보다 보면 지루해지는 순간이 오고는 한다. 예를 들자면 시즌 중반 8대 1로 이기고 있는 경기의 9회 초라던가. 뭔 일이 일어날 확률이 0프로는 아니지만 0프로에 한없이 가까워서 무시해도 될 그런 순간들 말이다. 그럴 땐 하품을 떡하니 하며 스마트폰으로 딴짓을 하고는 한다.


물론 농구에서도 '가비지 타임'이 존재한다. 점수차가 30-40점으로 벌려진 4쿼터를 누가 흥미진진하게 보겠는가? 빠른 템포를 가지고 있고, 역동적인 액션들이 즐비한 농구에서차도 그런 순간들은 '쓰레기'로 취급된다.

하지만 농구에서의 가비지 타임은 야구에 비해 훨씬 짧다. 한 경기에서 1쿼터 중반에 점수가 23대 7로 벌어져있다고 해 보자. 대부분의 경기는 23점을 낸 쪽이 이기겠지만, 그 시점에서 마음을 놓고 그 경기를 바로 가비지 취급을 하는 팬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중반에 좋은 흐름을 탄다면 역전의 여지가 충분히 남아 있으니까. 정말로 일방적인 경기라도 가비지 타임이 되려면 경기의 4분의 1은 지나야 한다. 경기도 금방 끝난다. 아무리 재미가 없는 경기라도 4-50분이면 끝난다.

야구는 다르다. 1회에 5점 이상을 내줬다면 그 경기는 십중팔구 망한 거다. 막 시작한 경기에서 팬들의 절망감이 섞인 탄식이 쏟아져 나오고는 한다. 만약 1회 초에 10점을 내주기라도 했다면, 지고 있는 쪽만이 아니라 이기고 있는 쪽에서도 그 게임의 나머지를 흥미진진하게 시청할 이유가 없어진다. 한 경기의 90%가 바로 쓰레기가 되어버린다. 이미 승부가 난 경기에서 3시간 동안 이닝을 채워야 하는 투수와 타석을 채워야 하는 타자의 맞대결을 지켜보는 건 흡사 고문에 가깝다. 지는 쪽의 팀을 응원한다면 더더욱. 그런 점에서는 야구는 굉장히 지루한 스포츠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지루한 야구를 왜 보는가. 나는 야구를 밥과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한다. 시즌 동안에는 거의 매일 경기가 있고 또 그동안 봐 온 경기가 있으니까 그냥 밥 먹듯이 자연스럽게 매일 경기를 보는 거다. 먹는 밥이 매일 맛있을 수 없듯이, 펼쳐지는 경기가 매일 재밌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때때로 지루하더라도 습관적으로 야구를 보게 된다.

하지만 때때로 맛있게 먹은 밥이 기억에 남는 것처럼, 매일 보는 야구에서도 재밌고 흥미진진한 순간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8회 말 4대 3, 무사 주자 2루같은 상황들 말이다. 어느 쪽이건 상관없이 손에 땀을 쥐고 1구, 1구 몰입해서 경기를 지켜보게 된다. 한쪽에서는 막을 수 있다는 기대를, 다른 쪽에서는 따라잡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위의 4대 3 상황에서 다음 순번에 나올 타자가 2할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다고 해 보자. 만약 감독이 이 타자를 빼고 3할을 기록하고 있는 타자를 대타로 낸다면 팬들의 기대는 더욱 커질 것이다. 타율이라는 기록을 통해서 대타로 나온 타자가 안타를 칠 확률이 더 높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원래의 타자는 타수 하나당 0.2개의 안타를 기대할 수 있지만 대타로 나온 타자는 0.3개의 안타를 기대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두 타자들이 쌓은 기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정보다.

타율 외에도 홈런 수, 방어율 같은 기본적인 기록들과 wRC+, WAR 같은 일반인이 계산하기 힘든 기록들이 존재한다. 야구가 기록의 스포츠라고 불리는 이유다. 적지 않은 수의 팬들이 이런 기록들을 분석하고 비교하면서 야구를 즐긴다. 나 역시 이런저런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기록들을 찾아가지고 엑셀을 돌리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그렇다면 야구는 왜 기록의 스포츠가 된 걸까? 그건 역설적이게도 야구만큼 불확실한 스포츠가 없기 때문이다. 2할 타자가 나오건 3할 타자가 나오건 결괏값은 0이나 1안타다. 0.2, 0.3안타는 없다. 심지어 0할 타자가 나와도 안타를 칠 확률은 존재한다. 힘 있게 담장을 향해 뻗어나가는 타구가 외야수의 점핑 캐치에 잡히기도 하고, 힘없이 붕 뜬 타구가 행운의 안타가 되기도 한다. 삼진을 잡았는데 포수가 공을 잡지 못해서 타자가 출루하는 경우도 생기고, 안타를 쳤는데 무리하게 뛰다가 2루에서 아웃되어 버리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불확실함 속에서 어떻게든 운이라는 요소를 걸러내고 기대치를 수치화하기 위해 여러 전문가들이 발버둥을 치는 과정이 야구를 기록의 스포츠로 만든 것이다.

그렇기에 기록은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않는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위에서 1회 초에 10점을 내주면 그 경기의 나머지는 쓰레기가 되어버린다고 언급했었다. 그런데 1회 초에 10점을 내주고도 그걸 15-11로 뒤집어버린 경기가 있었다면 어떤가. 그리고 그 경기에는 이전 6년 동안 수백 경기를 뛰면서 홈런을 딱 한 번 때렸던 선수가 있었는데, 그 선수가 이 경기에서 홈런 2개를 때리면서 이 대역전극의 주인공이 됐다면? 놀랍게도 전부 실화다.

야구의 불확실함은 때때로 이 같은 경이로운 현상들을 보여주고는 한다. 확률과 통계에 기반한 우리들의 기대를 완전히 업신여기고서는, 야구의 신이 정녕 존재하는가 묻게 만든다.


하지만 그 불확실함이 있기에 우리는 야구에 빠져든다. 2대 5로 뒤지고 있는 9회 초에 혹시나 싶어서 살짝 중계를 다시 틀어 점수를 보기도 하고, 경기가 그대로 끝나버리면 역시나 하면서 낙담하지만 다음날 또 중계를 틀고는 한다. 시즌 초반에 팀이 연패를 달리며 하위권에 있더라도, 중반에 잠시 2연승 3연승을 보여주고 나면 어떻게 포스트시즌에 발은 걸칠 수 있진 않을까 희망을 품어보고는 한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 올해 야구를 보며 이런저런 것들을 바라게 된다. 내 팀이 리드를 지켜내기를 바란다. 내 팀이 막판에 경기를 뒤집어내기를 바란다. 내 팀이 연승을 이어나가기를, 혹은 연패를 끊기를 바란다. 최고의 타자가, 투수가, 그 좋은 기록을 계속 이어나가기를 바란다. 내가 응원하는 선수가 부진을 씻고 반등하기를 바란다. 그동안 잦은 수모를 겪었던 언더독 팀이 기적 같은 드라마를 만들어내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팀이 그동안 겪었던 기대와, 환희와, 절망의 굴레 끝에 통쾌하게 트로피를 들어 올리기를 바란다.


맨 처음에 받았던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그래서, 야구를 왜 좋아하는데?"



나를 기대하게 만드니까. 기대하는 게 재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