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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도 Godot Aug 2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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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일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결국 문학이 되고 말까봐 두렵기 때문에. 혹은 내 말들이 문학이 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언젠가 접한 이 한 문장 때문에 나는 아주 피상적인 템포로 이야기를 기술할 필요를 느낀다. 내가 당한 최대의 배신에 대한 이야기말이다.


 최대의 배신, 이라고 스스로는 생각하지만 사실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 일에 대한 기록을 남겨보고자 한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가장 싫어했던 나지만 진짜로 시간이 약인 것 같아, 이 말이 이 이야기의 교훈이 될 것 같아 이걸 기록으로 남기는 데에 그동안 거리낌이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나는 성인이고 성인의 최대 덕목은 스스로 헤쳐나가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내가 그간 겪었던 두려움과 슬픔 그리고 분노 따위의 부정적 감정을 청산하는 의미에서 기록을 남기는 것이 필요한 과정인 듯하여 기록을 시작한다.


*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수능이 끝나고도 몇 달이 지나서였다.


 지난했던 재수의 결과가 작년 수능의 결과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우울했던 기간이 지나고, 아마도 5월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조금 마음을 추스를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가장 먼저 요양원에 계신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집안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편인 내게 할아버지는 당신의 자식, 나의 아버지로부터 거두었던 명문 대학교 진학의 희망을 거신 지 오래였고 실제로 나는 그런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데에 거의 다가갔었다. 비록 결과는 죽 쒀서 뭐 준 꼴이 되었다마는 할아버지께 직접 말씀은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어머니께 말했다.

 “어머니, 주말에 뭐 하세요?”

 “뭐 없는데. 왜?”

 “할아버지한테 가요, 오랜만에.”

 “할아버지?”

 그때의 ‘할아버지?’, 라는 말에서 나는 예상하지 못한 뉘앙스를 읽었다. 굉장히 생뚱맞은 질문을 받았다는 듯한 어머니의 어조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나는 그로부터 약간의 당황감을 느꼈다. 아마도 그 지점에서 나는 형이 몇 년간 내게 하던 말을 떠올렸을 것이다.

 “예, 할아버지요.”

 “......아.”

 어머니의 짧은 탄식과도 같은 ‘......아.’로부터 나는 앞서의 그것을 포함하여 두 번째로 당황감을 느꼈다. 어머니는 나의 질문을 모종의 문제라고 여겼음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그 문제에 최선의 답안을 찾기 위해 ‘ÿÿ아.’라고 말했다.

 “할아버지, 돌아가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꽤 쉽게 말했다.

 “예?”

 “돌아가셨어, 작년 겨울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돌아가셨다고?

 “돌아가셨다고요?”

 “응.” 어머니의 말은 꽤 짧았다.

 “언제요?”

 “작년 겨울에.”

 “작년 겨울이요? 저 수능 치고 나서?”

 “아니, 수능 치기 전에.”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네가 수능을 망칠까봐 그랬다. 할머니께서 그러라고 하셨다. 집안 사람들 모두한테.”

 어머니의 짧고 간결한 언술로 미루어 보아 어머니가 허튼 농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런 농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때문에 나는 당황감에서 좀 더 발전한 어떤 기분을 느꼈다. 심장이 철렁한다는 수사적 표현을 실제로 겪은 몇 안 안되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당혹스럽다’와 ‘화가 난다’의 중간 어딘가 즈음에 속하는 기분이었을텐데, 하여 나는 당분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 그래요?”

 내가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나는 태연한 척을 했다. 어쩌면 실제로 태연했을지도 모른다. 안 좋은 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미루는 편이었던 나는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그런 종류의 사실에 대해서도 신경 쓰기를 미루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나는 내가 배신당했다는 사실에조차 그런 태만함을 저질러버리고 말았다. 그랬다. 그즘에서야 나는 내 기분의 이름이 ‘배신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항상 그랬던 대로.


*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다. 한 분은 사업을 하셨고 다른 분은 교정직 공무원으로 일하셨다. 그래서 어렸을 때 나는 부모님을 자주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으며 그것 때문에 슬퍼하지도 않았는데, 슬퍼해도 된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형도 마찬가지였으므로 당연히 안 슬퍼하는 것이 맞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방치되었던 것도 아니다. 부모님 대신에 친척들이 나를 그리고 형을 돌보아주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런 식의, 정을 나누기 어렵고 유대가 느슨한 가정의 상태가 불만족스럽기는 했다마는 달리 어떤 뚜렷한 방도가 떠오르지도 않았기 때문에 고분고분 그들의 손길에 나를 맡겼던 것 같다.


 주로 내가 살던 아파트의 주변으로 친척들이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집에서 지냈던 나는, 어느 날은 아버지의 차를 타고 몇 시간이나 어딘가로 갔었다.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보편적이었던 그 시절의 나는 자동차 시트에 찌들어버린 담배 냄새에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간만에 아버지와 어딘가를 간다는 생각에 신이 나 뭔가를 조잘댔었다. 근엄한 성격의 아버지는 그런 나의 재롱 같은 수다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신이 났었다.

 차가 멈추고, 차에서 내렸을 때 나는 어떤 외딴 시골 마을에 도착해있었다. 파란 슬레이트 지붕에 누런 빛의 시멘트 벽으로 올려진 큰 촌가의 마당에 내린 나의 인상은 ‘이게 뭐지?’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집으로> 라는 영화가 유행했었는데, 그 내용은 잘 모르지만 어떤 아이가 시골집에 버려졌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어서 ‘내가 지금 영화 속에 들어와있나’ 하는 어린 착각도 들었다. “아버지!” 하고 아버지는 소리쳤고, 곧이어 양철 문을 열고 거구의 노인이 집에서 나왔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


 재수를 마친 그 해 여름 즈음에 부모님과의 어떤 싸움이 있었고 그들과의 협의 하에 나는 삼수를 했다. 결과는 아주 좋았다. 할아버지가 바라 마지 않았던 바로 그 학교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 이유에서 그 사실이 꽤 탐탁지 않게 느껴졌다.

 가장 큰 이유는, 사실 대충 짐작할 수 있을 텐데, 바로 ‘할아버지가 바라 마지 않았던’ 학교에 내가 입학했기 때문이었다(그때의 우울하고 배배 꼬인 심사를 내가 몇 년도 더 지난 지금에 와서 기술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느껴지지만 애써 그 실체를 규명해보자면 그렇게밖에 말할 길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 그러니까 당신이 요양원에 누워있다 죽음과 조우하시기 전에 내가 기쁜 소식을 들려드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의 어떤 무능함을  일깨우는 것만 같았다. 운이 좋아 성적이 좋게 나왔다든가, 부모님과 싸워서 들어갔다든가, 내가 남들보다 두 살이 더 많은 시점에 신입생 생활을 다시 시작한다든가, 친구들을 다시 사귀어야 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부차적인 문제였다(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금 서술해야 하는 바가 아니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뭉뚱그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학교에 입학하고 두 번째 신입생 시절을 만끽하던 나는 전술한 무능함의 감각, 나의 보잘것없음을 부정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밴드부에 들어가기도 하고, 술을 많이 마시기도 했으며, 다이어트를 하기도 하고 여자친구를 사귀기도 했다. 얼마 안 가기는 했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그런 번잡한(이때 나를 사귄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표현이지만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만 하는 점을 양해해주기를) 활동들에 치중하면 치중할 수록 나의 부족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 감각은 가없이 커져만 갔고 학기 말이 될 즈음에 나는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져버렸다.


*


 테가 얇은 안경 뒤로 굳은 인상이 강한 할아버지는 거구의 사내였다. 그 옛날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일흔이 넘어서 키가 180cm가 넘는 사람은 흔치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젊었을 땐 장정 여러 명 분의 일을 혼자 해치울 만큼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그런 사내를 키가 100cm가 채 될까말까한 숫기 없는 남자 아이가 처음으로 마주하면 십중팔구는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옛날의 나는 그런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잘 지내셨습니까.”

 “야가?”

 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존대를 하는 옛스러운 화법으로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고, 그런 아버지의 말을 할아버지는 경상도식으로, 그러니까, 화제에서 벗어나는 말로 가뿐히 무시하는 방식으로 받아쳤다.

 “예. 인사해라, 할아버지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배꼽 인사를 했다.

 “밥은 먹었나.”

 “아직 안 먹었습니다.”

 “밥 먹자, 들어온나.”

 내 키만큼 오는 단차를 간신히 올라가 들어간 할아버지의 집은 서늘했고, 쿰쿰한 냄새가 났다. 노란색 장판이 바닥에 성의 없이 깔려있었고 방은 세 개였으며 나와 아버지는 그 중 문 옆에 붙은 가장 큰 방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장판과 흔들의자, 장농 그리고 TV가 있었다. TV는 씨름 방송을 틀어주고 있었다. 그 위로는 다양한 액자가 붙어있었는데 그것은 그때까지의 내가 아직 알지 못하던 다른 친척 어른들의 이런 저런 사진들이었다. 그중에는 아버지의 대학 졸업 사진도 있었고, 그게 아버지와 닮은 누군가라고 생각한 나는 그 액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문 열어라, 상 들어간다.”

 TV 옆에 위치한 문을 열자 허리가 구부정한 노파가 반상 위에 요리를 들고 들어왔다. 할머니였다. 나는 사람 피부가 저렇게 쪼글쪼글할 수가 있나 하고 신기해했다(다시, 나는 티를 내지 않았다).

 “잘 먹겠습니다.”

 반상 위에 내 몫으로 나온 밥은 당시의 내가 다 먹기에는 버거운 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음식을 남기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어린이집 선생님께 들었기 때문에 그걸 꾸역꾸역 다 먹었다. 반찬은 맛 없는 것들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물과 무침 따위의 것이 그런 것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다 먹었나.”

 “네.”

 아버지와 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식사를 마치고 할머니가 상을 들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시면 우리 셋은 씨름을 보았다. 사실 나는 씨름은 재미없었고 다른 무언가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이 재미있을지도 잘 알지 못했을 뿐더러 경상도 남자들 특유의 중압감 있는 침묵이 어색하다못해 두려워 그저 가만히 있었다.

 “가보겠습니다, 아버지.”

 마침내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도 재빨리 일어났다. 시골의 분위기가 도무지 어색하고 재미 없어 그곳에 있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자.”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두고 시골집을 떠났다.


*


 전후 관계가 명료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데, 내가 본격적으로 병명을 진단 받고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때와 할아버지의 유해가 모셔진 납골당을 처음으로 방문한 것은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


 시골집에서 머물게 된 첫 날 밤에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이에 누웠다. 그러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 일도 없고, 그럴 일이 일어날 거라고 전에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부모님이 나를 이곳에 버리고 도망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불안을 해소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한 즈음의 나는 버려졌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사로잡혀 벌벌 떨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고, 야가 와 이라노.”

 내 오른쪽에 누워 계시던 할머니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어쩔 줄 몰라하다 꽃무늬 잠옷의 소매춤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셨다. 한참 잠이 몰려오는 즈음에 갑자기 손자가 울음을 터뜨려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던 할아버지도 주춤주춤 휴지통을 가져오셨다. 나는 그 사실이 더더욱 무서워 소리 죽여 울었는데, 그러니까, 만약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사실인 것으로 밝혀졌을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마저 나를 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울지 않고 의젓한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는 생각까지 다다랐기 때문이다(이쯤에서 눈치챘겠지만 나는 꽤 예민하고 귀찮은 아이였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할머니는 나를 진정시키려 어떻게든 어르고 달랬으며 할아버지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기를 몇십 분이 지나고서야 나는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나는 할아버지의 팔을 베고 누워있었고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났다. 몇 분 정도 지나자 할아버지는 잠에서 깼고, 할머니는 부엌에서 라면을 끓여오셨다. 우리는 아침 식사로 라면을 먹었다.

 “맛있나?”

 “네.”

 전날 울고 불고 난리를 친 것이 부끄러웠던 나는 평소보다도 더 조용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생각해보면 할아버지는 나의 부모님께 전화를 하셨음에 틀림없다. 애가 우는데 어떡하냐, 무엇으로 달래느냐 하는 말을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라면을 아침부터 먹이신 것이다. 어르신들이라 기름지고 자극적인 라면을 별로 먹고 싶지도 않으셨을테고, 더군다나 집에 라면이 없었을텐데 손주가 좋아하는 라면을 사오기 위해 새벽에 어디선가에서 라면을 구해오시느라 힘드셨을 테지만 당시의 나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잘 먹었습니다.”

 “니 내랑 어디 좀 가자.”

 드디어 팔려가는건가, 하는 생각에 바짝 위축되었던 나는 밥을 먹자마자 눈꼽도 안 뗀 상태로 옷을 입었다.


 더운 8월의 여름이었다. 할아버지와 나는 할아버지의 스쿠터를 타고 시내의 오일장으로 향했다.

 “갖고 싶은 거 있나? 뭐 갖고 싶노?”

 그날, 무서운 인상의 할아버지가 내게 꼬깃꼬깃한 쌈짓돈을 건네며 사고 싶은 것을 사주마 하셨을 때 나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약하게나마 그가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모님과는 달리.


*


 “775273, 775273......”

 주술처럼 번호를 외우며 나와 부모님은 참전 용사 납골당을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할아버지가 모셔진 곳을 찾았다. 할아버지의 뼛가루를 담은 도기는 <775273>라는 숫자 위의 공간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처음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느꼈다. 산 사람 살 땅도 없다지만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었던 존재가 그런 협소한 공간에서 영면해야 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합리했다. 그 뒤를 이어 무수히 많은 감각이 차마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어쨌든 불합리함이라는 말로 큰 틀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께 인사드리자.”

 우리는 참배를 했다.

 “아버지, 우리 왔습니다.”

 “아버님, 저희 왔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자 납골함 앞에서 뭐라고 중얼거리며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건넸다.

 “너도 인사해라.”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도기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때 납골함 앞의 유리에 비쳤던 내 눈동자를 그리고 내 표정을 설명하자면, 부적절하게 느껴지지만, 그건 분노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왜 아무 말 안 하셨어요?”

 참배를 마치고 납골당을 나서며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침착한 어조로 질문했다.

 “뭘?”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요, 왜 말씀 안 하셨냐고요.”

 “말했잖니? 할머니가 결정하신 사안이다. 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점이었어. 네가 시험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모두가 도와주자는 의미에서 네겐 말하지 않았어.”

 “그러면, 그 뒤로는요? 수능이 끝난 뒤엔 왜 먼저 아무 말도 안 하신 거예요?”

 부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더 묻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얼버무려지는 대화가 나와 부모님 사이에 많았다.


*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이걸 왜 당신에게 보여주는가? 당신은 왜 나를 보는가?)


*


 내가 대학을 갈 준비를 하는 나이가 되었을 즈음에야 부모님의 사업과 용무가 정리되어 한결 내게 집중할 수 있게 되셨고 그 즈음부터 우리 사이에는 대화랄까, 교류가 많아졌다. 그러나 십 년 이상의 단절은 꽤 큰 상실이었다. 그런 모양이었다. 우리는, 최소한 내가 느끼기로는, 터놓고 진심을 나누는 대화나 서로를 신경 써주는 말에 인색했달까, 그런 것이 어색했다. 그래서 인생의 문제들을 다루는 종류의 대화들에 있어 우리는 얼버무리는 식으로 끝을 내는 일이 잦았고 그건 그 뒤의 몇 년 동안 빈번히 있던 문제였다.

 아무래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야만 할 일이었다. 결국 부모님이 나를 신경 쓰지 못한 것은 그리고 나와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주지 못한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고, 그 돈은 나와 형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자산을 일구고 집안을 일으키신 분들이었다. 그런 말을 주변 어른들로부터 종종 들었던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불만 없이 행동했다.

 그러나 답답함. 아무래도 답답함이 해소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당시에 우리 사이에는 너무 큰 간극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고등학교 시절 폐렴에 걸린 일이 있었다. 시작은 독감이었지만 병원의 엉터리 처방으로 인해 몇 주가 지나도록 낫기는커녕 병세가 악화되었던 탓에 내 기관지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고 40도에 육박하는 고열이 며칠이나 지속되었다. 결국 나는 대형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고 입시에 매진하고 있었던 나는 크게 우울해했었다. 그때 어머니는 만사를 제쳐두고 나를 간호하기 위해 병원에 함께 상주했었는데 나는 어머니와 함께 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어머니 하실 일도 많을 텐데 저 때문에 시간 쓰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나을 병이잖아요.”

 처음에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런 말에는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달린 체력에 인내심이 떨어진 나는 그제야 본심을 드러냈다.

 “이제 와서 보살펴주는 척 하지 마세요.”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어머니는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내 병간호를 멈추신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표정이 통쾌했었다. 그리고 그런 때일수록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


 할아버지가 사주신 옷을 입고 시골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매일 라면을 먹는 생활이 즐겁고 익숙해질 때 즈음에 아버지는 나를 데리러 오셨다. 알고 보니 부모님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친해지라고 일주일 동안만 나를 시골에 보낸 것이었는데 내가 까먹은 탓인지 부모님이 까먹은 탓인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싫어요.”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싫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놀란 표정으로 내게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랑 있을래요.”

 “집에 안 가고 싶니?”

 “가고는 싶은데, 여기가 더 좋아요.”

 아버지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보았다. 할아버지는 어떡하겠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가 하고 싶다카는 대로 하게 둬라.”

 “하지만, 아버지.”

 “여가 더 재미있는갑지.”

 결국 나는 할아버지와 일주일 더 지내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스쿠터에 태우고 시골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내게 많은 것을 보여주셨다. 외양간, 시냇가, 가재, 뱀(그리고 그걸 잡아 만든 뱀탕), 시골의 이곳저곳에 위치한 문화재들 따위가 그것들이었다. 꽤 재미있는 시간들이었다. 집에서는 아무리 재미있는 것들을 해봤자, 과보호 성향이 있던(그것 역시 어쩔 수 없었다고도 생각하지만) 부모님의 방침 때문에 밖에 나가 친구를 사귀지 못했으므로, 혼자 놀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겐 오래됐지만 장난감도 있었고 나를 돌보아주시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있었지만, 솔직히 그분들과 내가 뭘 하며 놀 수 있겠나? 같이 놀기에 당신들은 할아버지와 달리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분들이셨다(그러나 당신들께서 나를 사랑하고 돌보아준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 그와 달리 시골에는 할아버지라는 친구가 언제나 나와 놀아주었다. 할아버지는 대단한 친구였다. 그는 아는 것이 많은 친구였고(실제로 할아버지는 전쟁 이전까지는 마을의 훈장님이셨다), 스쿠터를 타고 다닐 줄 알았으며, 소에게 여물을 먹일 줄 알았고, 경운기를 몰 줄 알았다(그럴 줄 모르는 할머니와 별로 친하지 않았던 것을 어린 아이들 특유의 잔인함이라고 해야 할까?).

 “할아버지, 평생 할아버지랑 살고 싶어요.”

 아마도 마지막 날 밤, 할아버지의 팔을 베고 잠에 들기 전에 나는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오냐. 내랑 평생 살자.”

 할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물론 그 다음 날, 미취학아동과 놀아주기에는 아무리 그래도 일흔 넘은 노인이라 체력이 달리셨던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차에 나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갈 때 입을 싹 씻고 나를 배웅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볼에 뽀뽀를 하고 그와 헤어졌다.


*


 그 후로 나는 명절이 좋아졌다. 일 년 중 몇 안 되는, 할아버지를 만날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


 내가 약을 먹는 것이 마뜩잖았던 부모님과 몇 번의 언쟁과 다툼이 있었던 그 해 여름 아버지는 나와 단 둘이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처음엔 포항의 어느 부둣가에 가서 낚시를 하는 일정이었는데, 날씨가 좋지 않아 결국 낚시도 못하고 속마음에 넣어놓은 얘기도 채 못 털어놓았던 그는 대뜸 설악산을 가자고 했다. 만성적인 탈력감에 지쳐있던 나는 그의 제안을 마뜩잖은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어차피 운전은 아버지가 하는 것이니 내가 힘들 이유는 객관적으로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동해안의 국도와 삼척-속초간 고속도로를 타고 몇 시간이 걸려 속초에 도착한 우리는 어플리케이션으로 간단히 숙소를 예약한 뒤 바닷가로 향했다.

 바닷가는 적막했다. 날이 더워졌다뿐 아직 성수기도 아니었고 평일이었던데다가 전세계적인 유행병이 퍼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남녀들은 더러 보였다. 불가피한 이유로 여자친구와 헤어졌던 당시의 내 눈에는 그런 것만 보였던 모양이다. 아버지와 나는 해변에 붙어있는 횟집에 갔다. 실내가 시원하고 좋겠지만 해도 지고 있었고 깊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아버지는 밖에서 회를 먹자고 했다. 우리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모둠회 소자와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소주가 나오고, 잔을 나누고 회가 나와 첫 몇 점을 먹기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유가 알고 싶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아버지였다.

 “무슨 이유요?”

 “네가 병에 걸린 이유말이다. 원인과 결과. 원인이 있을 것 아니냐.”

 “몰라요.”

 “그러지 말고.”

 “진짜예요.”

 지금의 나라면 당연히 스트레스와 호르몬의 상관 관계, 유전적 결함, 또는 환경의 문제 따위의 여러 학설들을 거론하며 아버지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내가 약을 먹게 된 것에 객관적으로 그의 책임은 전혀 없으므로) 설명해줄 수 있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아마도 내 남은 인생을 포함하여 가장 기운이 없었을 시기였으므로.

 “뭐라도 하나 말해줄 수 없니? 너도 이런 걸 묻는 내 마음을 이해해주면 좋겠구나.”

 “어떤 마음이요?”

 “아버지의 마음.”

 그 말에 문득 화가 치밀었던 나는 그의 눈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옅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막연하게 아버지에게 내 병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 ‘도의적인 책임’이라는 것이 뭔지 곰곰이 생각했다.


*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형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미래를 대비하기에 나는 어렸다(아니면 철이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진짜로 돌아가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최초의 공황을 경험했다.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동안 부족했던 부모님의 관심을 우수한 학업 성적을 통해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다른 무엇도 다 제쳐놓고 기숙사에 틀어박혀 공부에 열중했다. 내가 기숙사를 나서는 것은 교실로 갈 때나 학원을 갈 때 말고는 없었다.

 기숙사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하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아차 싶었다. 몇 년 전 아버지가 형과 내게 그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났다.

 “할아버지의 연세가 연세인 만큼 만약을 각오하거라.”

 별 생각 없이 듣고 넘겼던 그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던 나는 통화를 마치고 휴대전화를 반납한 뒤 자리에 다시 앉은 이후로 몇 시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오직 할아버지가 얼마나 편찮으실지를 상상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불안함, 그 공포는 그날 나로 하여금 최초의 부정맥을 경험하게 했다. 부정맥은 할아버지의 지병이기도 했다.

 그 주 주말, 학원을 모두 뺀 나는 아버지와 함께 시골의 요양원으로 차를 타고 갔다. 요양원은 할아버지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 역시 스쿠터를 타고 할아버지와 지나갔던 곳이었다. 아버지가 요양원 앞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주차 스티커를 받는 동안 나는 아버지가 일러준 절차를 밟고 할아버지의 병실에 먼저 들어갔다.

 죽음이라는 막연한 종착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거대함으로 위압감을 주던 할아버지는 말라 비틀어진 북어처럼 피골이 상접한 채 병실의 침대 위에 누워있었고 몸은 커녕 목을 가누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시꺼멓던 당신의 눈동자는 경계가 흐려진 채 색을 잃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입은 힘 없이 벌려져있었다. 할아버지는 방의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고개를 조금, 겨우 몇 밀리를 움직이셨다. 말도 못해 힘 없이 ‘허어.’ 하시는 것을 들었을 때에 나는 세상이 무너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세상이 무너진다는 것은 자기가 딛고 있던 바닥이 무너져내리는 감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저예요, 저.”

 너무 놀라 어쩔 줄 몰랐던 나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그는 내 목소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그의 귓가에 대고 내 이름을 말했다. 그제야 할아버지는 희미하게 웃었다. 슬픔이라고 해야 할지, 좌절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러나 울음을 지향하는 것이 확실한,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수식어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고유 명사 그 자체에 대한 두려운 감각이 지각되자마자, 어떤 강한 감정이 내 턱 끝까지 차올랐고, 나는 생에 최초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경험을 했다.


 아주 무서운 공포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 안에 들어가게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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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중에 아버지가 들어오셨을 때 나는 방바닥에 쓰러진 채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죽은 줄 알았다고 하셨다. 내 생각에 나는 너무 울어서 탈수 증세를 경험했던 것 같다. 나도 내가 죽을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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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때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니. 나는 네가 그토록 마음에 담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나는 그와 잔을 부딪혔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예요. 아까 말씀 드렸듯이 저는 제가 왜 약을 먹는지 도저히 짐작 못 하겠어요.”

 이건 거짓말이었다. 그때의 나는 스트레스와 탈력감에 젖어 상담사에게 부모님에 대한 저주를 퍼붓고는 했다.

 “다만, 그냥, 그런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약을 먹게 된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할 뿐이예요.”

 “약을 끊을 수는 없겠니?”

 “그건 당분간 힘들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그렇구나.”

 우리는 소주를 네 병이나 마셨지만 모둠회는 반도 먹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속초 시내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군것질거리를 사먹었다. 꽃게빵이라든가 오징어빵 같은 것들.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기억하는 것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신경증적 증세에 대한 나의 비전문적 추측을 들은 아버지는 오히려 쾌활해진 모습이었다. 그것 역시 ‘아버지의 마음’ 이라는 걸까, 나는 고민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쾌활함과 나의 고민은 그 다음 날, 설악산에 케이블카를 타고 갔다온 뒤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어졌다.

 집에 돌아간 날 밤, 아버지는 나와의 여행을 어머니에게 어떻게 말하실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기차를 타고 학교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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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 후로 나와 아버지는 친해졌다. 어머니도. 형도. 그리고 할머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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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민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그 사건을 배신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구성원의 부고를 다른 구성원에게 숨기는 집단을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에 나는 윤리적 거부감을 느낀다. 그건 내게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나이를 조금 먹었고, 가족 구성원들과 더 친해졌다. 배신을 지시한 할머니에게조차 나는 효심 깊고 예의 바른 멋진 손자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함을 느낀다. 나는 내가 용서하지 않은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눌 수 있고, 그럴 때면 행복을 느낀다. 심지어 나는 내가 배신 당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가끔 느낀다.

 이 기록은 그 혼란함을 해명하기 위해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이 기록은 그 혼란을 해명할 수 없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것은 나의 과거의 편린들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배열한 텍스트이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내뱉은 순간 그것은 현란한 생명력을 발광하며 현재로 탈바꿈하고 곧 나의 미래가 되어버린다. 나는 그것들을 잡아두기 위해 텍스트를 이용하지만 텍스트는 결코 내 편이 아닌 셈이다. 텍스트는 배신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렇다고 이로써 내 감정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언술을 진척시키면 시킬수록 어지러움을 느낀다. 그것은 거의 신경증적이다. 가끔씩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억누를 때 나는 기록이 실패했다는 감각을 지울 수 없다.


 결론을 내리자, 이 글은 총체적 실패 그 자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추동하는 어떤 강한 감각이 나로 하여금 기록을 끝마치도록 종용했다. 나는 그 감각의 이름을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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