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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도 Godot Aug 29. 2024

K의 세계

K의 세계

 


 일러둘 것은, 아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일러두는 것인데, 성실함과 모호함이 진리다. 그 외의 무엇도 한계일 뿐이다.


*


 K는 학교에서 차로 십 분쯤 걸리는 강변 공원의 벤치에 불확실하게 앉아있다.

 그는 책을 읽고 있다. 손에 잡히는 크기의 양장본이다. 바타유의 책이다. 그러나 그는 프랜치 에로티시즘의 허상에 사로잡혀 그것을 읽고 있지 않다. 그가 그것을 읽는 것은 직업적인 이유에서이고, 좀 더 정확히는 타성적인 이유에서이다. 타성은 그의 삶을 설명하기에 용이하다.


 “오, 회한도, 불안도 없는 몰상식한 불행아! 격렬하게 이글거리는 그 불길 속에서 나는 타오르고자 하는 욕망으로 타오른다. 죽음과 육체적 고통을 놓고-그리고 죽음보다, 고통보다 심오한 쾌락도 함께- 침울한 밤, 나는 잠의 경계를 어슬렁거린다.”


조르주 바타유, <쥐 이야기(디아누스의 일기)>


 책의 절반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지점에서 K는 책을 덮는다. 그리고 오늘은 이혼한 지 꼭 일 년 하고도 이틀이 지난 날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 발상을 무엇이 촉발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알려 하지도 않는다. 불행한 프랑스인은 어디로부터 흘러들었는가? 아마도 전처가 좋아하는 작가였겠지, 하고 어림짐작할 뿐이다.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그것을 알기에 그런 추측을 한다. 그림자는 지난 것들의 족적이다. K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K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것에 동조하려 한다. 제 살 깎아먹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서도. 그는 반쯤 죽어있고, 병세는 악화되고 있다. 그것은 오만하다. 그것 역시 그는 알고 있다.

 ‘아이가 없기를 다행이지.’

 전처와의 사이에 자식이 있었더라면 문제가 좀 더 빨리 악화되었으리라, 그는 짐작한다. 그는 책임지는 것과 별로 연이 없다.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해왔고 그로부터 아무런 문제도 겪지 않았다. 전처도 그런 사람일 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K의 상심이 크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드리워진 어두움은 곧 의심이다. 다시, 의심은 그의 특기이다. 내가 과연 아이가 없기를 바란걸까? 이게 책임지는 게 아닌 걸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그는 책을 덮는다. 한숨을 길게 내쉰다. 그 앞으로 네발 자전거를 탄 아이와 그의 부모가 지나간다. 그들은 한숨이 없다.

 열등은 자존의 문제가 아니야. K는 생각한다.


 “불문과 K입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P조교인데요. L교수님이 왔다가셨어요.”

 “무슨 일로?”

 “같이 저녁 식사나 하시자던데요?”

 그럴 리가 없어, K는 노련하게 씹어 말한다. 자신이 L에게 느끼는 중압을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K와 L은 절친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오늘?”

 “네.”

 “내가 연락할게. 고마워.”

 뭐라 말해야 할까? 그것은 순발력의 문제이다. 그는 자신의 순발력에 자신이 없다. 그러나 어쨌든 손을 놀려 전화를 건다. 희고 얕은 살갗 밑으로 힘줄의 장력이 세다.

 “어.”

 “저녁 먹자고?”

 “아내가 먼저 제안했어. 지난 번에 너무 안 좋아보였다고, 맛있는 걸 먹자고 하더라고.”

 “미안하지만 오늘은 연구 때문에 조교들과 선약이 있어. 제수씨에겐 고맙다고 전해줘.”

 “그래…… 이봐, 정말 괜찮은 것 맞지?”

 “그럼.”

 “혹시나 힘들면 알려달라구. 언제든지 달려가겠네.”

 고마운 마음으로 K는 전화를 끊는다. 진실한 마음이다. 그러나 진실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나도 내 진실을 진실로 믿지 않는데, 나는 무얼 근거로 진실을 호소하는 걸까? 아무래도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러니 내 마음은 실은 진실하지 않고, 실은 고맙지 않다. 바타유가 K를 집어든다. K는 다시 바타유를 집어든다.


 기억해야 할 에피소드가 있다;

 인신공양을 숭앙하는 컬트 집단이 있었다. 그들 모두가 스스로를 공양할 것을 약속하고 가입한, 독실한 신앙인들이었다. 그런데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공양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들은 죽을 용기는 있었지만 죽일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집단은 일 년 후 와해되었다.

 K는 이 에피소드를 사랑한다. 그것은 많은 진리를 투영한다. K는 그 중 하나이다. K는 투영하는 동시에 투영된다. 공양되되 공양하지 않는다. 이것은 전처에게 들은 이야기 중 하나이다. 그리고 전처가 그에게 베푼 유일한 선행이다.

 어쩌면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관계성을 규명하는 효과적인 우화일지도 모른다. 공양이라는 단어를 헌신으로 바꾼다면 적확한 표현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맺은 모든 관계에 효과적인 미사이다; 부재하는 용기.


 K는 흐르는 강물을 내다본다. 여피적인 독립 영화를 오마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쩌면 아닌 게 아닐지도 모른다. 미메시스는 의도가 아니다. 피투된 구도는 운명처럼 해석된다.

 아이가 없기를 바랐을까? 내가? 그녀가? 그는 확신하지 않는다. 어쩌면 확신하지 못한다. 내가 분열하는 걸까? 그 질문 역시 확신을 결여한 채, 질문인 채 K를 멤돈다. K는 그런 양태가 못마땅하다. 무섭다.

 강물에 난반사된 빛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윤슬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K는 그것에 이름이 붙어있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그는 여지껏 그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극동의 순종적인 아시안은 잔존한 열강 지식인들의 생활 양식을 답습하느라 제 언어를 놓았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도 결국 어떤 시인에게서, 아니, 어떤 시인을 제 입맛으로 조리한 어떤 학자에게서, 아니, 시인을 먹기 위해 학자가 토해낸 언어로부터 비롯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품는다.

 의심은 여지껏 뭉근하고 애매했으나 점점 제 모양을 찾아간다. 정글의 바닥을 배회하는 독사처럼 그의 주변을 서성인다. 언제 K를 잡아먹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최근에서야 발견한 불편함이다.

 아닌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그는 오마주를 시도한다. 책을 덮는다. 덮은 책에 대고 묻는다.

 “내가 잘못인 걸까?”

 책은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그는 할 말이 많다.

 “그녀의 잘못은 뭘까?”

 K의 말투는 절박하다.

 “잘못이란게 있긴 한걸까?”

 다시, 책은 아무 말이 없다. 그 이상을 바랄 수도 없다.

 “널 강에 던져버릴까?”

 K는 책도 자신만큼이나 절박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는 할 말이 없다.

 정말로, 그는 책을 던져버릴 결심을 한다. 책을 쥔 손을 높이 올려.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책이 나뒹굴 것만 같은 자세를 취한다. 부동 자세. 이내 그는 순순히 포기한다. 전처의 생각이 난다. 그럴 수는 없지.

 스스로를 섬뜩하다고 느낀 K는 저도 모르는 새 책을 던져버린다. 예쁜 포물선을 그리며 책은 물 속에 잠긴다.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야?”

 L이 K를 집으로 초대했고, K는 L의 부인이 차려준 음식을 멀뚱히 쳐다본다. 그 모습이 답답한 L은 참을성 있게 K에게 질문한다.

 “응.”

 “어째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겐가?”

 K는 잠시 생각한다.

 “변화할 필요를 느껴서 말이지.”

 “그렇군.”

 사려깊은 L은 더 묻지 않는다. K는 말수가 적지만 한 번 말한 것은 지키는 사람임을 그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러자 L의 부인이 말을 건다. L의 부인은 L만큼이나 K에게 관심이 많은 친절한 사람이다.

 “K씨, 저번에 하셨던 대중 강연 기억나세요?”

 “교내 문화센터에서 했던 것 말씀이신가요? 기억합니다. 불문학의 미와 추, 였나요?”

 “맞아요. 주간지에 다니는 제 친구가 주선한 행사였는데 그때 반응이 아주 좋았었죠.”

 “솔직히 기억이 아주 잘 나지는 않는군요. 개인적으로 복잡한 일이 훨씬 많았어서…… 이해해주실거라 믿습니다.”

 “물론이죠. 제가 그 얘기를 꺼낸 건 K씨의 아픈 곳을 찌르려고는 아니었지만 말이예요. 아무튼 그 행사의 반응이 좋았어서 친구가 후속 강연을 주선해달라고 그때 말했거든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알다시피 우리 시엔 돈 있는 사람은 꽤 많지만 문화적으로 수준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없잖아요. 이런 곳일수록 K씨 같은 인물이 중요하단 말이죠. 게다가 말이죠, 좀 재미있는 얘기를 해드리면, 그때 관중엔 I사 회장의 내연녀도 있었답니다.”

 “그런 얘기를 왜 해.” L이 부인을 타박한다. 그러나 호사가 기질이 있는 L의 부인은 만류를 제치고 신이 나 얘기를 떠들어댄다.

 “어쩌다보니 그 사람과 친해질 계기가 있었더랬죠. 그녀는 주로 시 외곽에 위치한 별장에 기거하고 평소엔 I사 소속 직원인 것처럼 다녀요. 회장이 올 때마다 며칠씩은 사라지는 특이한 직원이겠죠. 아무튼 그 여자는 허영심이 대단해요. 명품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지식적인 측면에서도 말이죠. 이해하시겠어요? 말로는 해외 명문대를 졸업했다던데, 그래서 그런가, 주변에 사람들이 있을 때 자신이 가장 똑똑하기를 바라더군요. 친구도 그런 사람들만 사귀죠. 감이 잡히시겠지만 K씨의 강연에도 온 적이 있답니다. 그녀가 제게 말하더군요, K씨는 먹물 중에서 가장 섹시해보이는 사람이라고. 물론 이건 농담이랍니다. 또 이렇게도 말하더군요. 그룹이 후원하는 문화 재단과 K씨를 연결해주고 싶다고요. 수강료도 최고 수준으로 드릴 수 있고, 재단과 학교를 연결해줄 수 있다고요. 만약 일이 그렇게 되면 그건 오롯이 K씨의 공이 되는 거겠죠.”

 “와.” K는 탄식한다. 다음 할 말을 위해선 물 한 모금이 절실히 필요하다. “좋군요.”

 “그렇죠?”

 “왜 이런 제안을 제게? L도 충분히 섹시한 먹물인데.”

 “해외 학회 때문에 당분간은 학교에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 L은 얼버무리듯 말한다. “더군다나 그녀가 관심있는 건 아무리 봐도 자네뿐이란 말이지. 그날 연단에 선 사람들 중에선 말야.”

 “현기증이 오는군.” K가 말한다. 진짜로 그는 현기증을 느낀다. 그리고 메스껍다. 질량이 큰 음식이 목구멍을 억지로 넘어가 소화를 요구하는 형국이다.


 그들은 불멸하는 진리를 얻었는가? 아니면 그 근처에 가보기라도 했는가?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나 알기는 했을까? 딱딱한지, 뜨거운지 아니면 아름다운지는 알았을까? 역린이다.


 K는 생각한다, 아내의 진단;


 환자: K.

 직업: 교수.

 증상: 지와 무지를 헛갈리다.

 진단: 미치광이.

 처방: 이혼 요법 1회.

 소견: 남성은 구제불능이다(이 모호한 참인 명제에 대해 환자는 남성의 그것에 견줄 여성의 결함을 주장하나 설득력이 없다/ 정신분열증을 의심).


 아내는 의사가 아니다. 그러나 K는 여적 아내의 진단을 믿는다. 그가 아는 한 그녀는 최고의 명의다. 전공 분야는 어리석음이다.


 “의견을 구하고 싶은데요.” 잠시 소파에 앉아 숨을 고르던 K는 L과 부인에게 묻는다. “내게 결점이 있다면 그건 어떤 겁니까?”

 “갑자기요?” “그런 걸 왜 묻는 거지, K?” 그들은 저의를 파악하지 못해 혼란스럽다. 저의는 뱀 같은 것. K는 그들의 주변에도 그림자가 도사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질문을 바꾸고 싶습니다. 생각해보니 잘못된 걸 물었군요.” K는 부인이 건네준 물 한 모금을 마신다. 그 저의를 궁금해한 채. “당신들에게 결점이 있다면 그건 어떤 겁니까?”

 “당황스럽군. 하지만 이 질문이 자네에게 중요하다면 답하기 위해 노력해보겠네……”

 “아니오, 됐습니다.” K는 저어하다.


 K는 처방 받은 약을 먹는다. 아내는 약에 대해 믿지 않는다. 자신과 함께 아이를 낳고 싶다면 몇 달 간 약을 먹지 않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K는 일견 이해할 수 있다. 아내는 심하게 앓은 적이 있다. 모든 종류의 육체적 관계를 조심해야 하는 무서운 열병. 아내는 죽음을 각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K의 죽음이 아니다. 그래서 K는 각오하지 않은 진단을 신뢰하지 않는다. 다툼. K는 분쟁이 싫다. 아내의 농도가 옅어진다. 이것은 문학적 비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 눈 앞에 보이는 한 인간의 색이 투명에 가까워진다. 그가 막을 수 없는 진화가 발생하고 K는 속수무책으로 존재를 상실한다.

 그런 꿈을 자주 꾼다. K는 그걸 악몽이라고 할 수 있을지를 모른다. 판단은 그에게 결여된 덕목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처방 받은 약을 먹는 것뿐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새벽 5시. 아마도 고향에 계신 부모님은 잠에서 깼겠지. 일어나 산책도 하고, 식사도 했겠지. 노인들에게는 성실성이 발견된다. 성실하지 않은 인간은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당신들은 흔히들 얘기했지. 난 안 그러고 싶은데. K는 생각한다. 생각했던 것을 생각한다. 그러다 모든 것이 지루해진 K는 자위를 시도한다. 그런데 발기가 되지 않는다.


 최초의 사건이다.


*


 “반갑습니다, K교수님. I문화재단 기획팀에서 나온 N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유능해보이는 여성은 안경을 낀다. 제 아름다움이 유능함을 갉아먹지 않게 하기 위해. 이건 참일까? 내연녀는 나와 같은 상상을 한 걸까? K는 무례한 상상을 한다. 묻고 싶다.

 “지난 번 대강당에서 진행하신 <불문학 입문: 미와 추의 독사(doxa)>는 아주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모든 내용을 잘 이해했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들으면서 아주 즐거웠어요.”

 “감사합니다. 불문학에 관심이 많으신 편인가보군요.”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위고예요.”

 “그렇군요.” 그러시겠지. “낭만주의는 참 매력적이예요. 그렇죠?”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순진한 N은 눈앞에 등장한 음험한 남성성을 눈치채지 못한다. 모든 내연녀는 순진한 감이 있다. K는 모파상처럼 눈을 뜬다.

 “도와주신다고 해서 뵙기는 했습니다만, 도무지 시간도 많이 지난 제안이기도 하고 그저 도와주고 싶다는 분이 계시다는 말밖에 들은 것이 없어서요. 혹시 설명을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간략하게.”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회장님의 고향이기도 한 I시에는 문화 사업에 대한 수요가 이미 충분하고, K교수님을 고문으로 모신 것은 단지 몇 번의 강의 진행과 몇 명의 강사 초빙에 힘을 써주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필요한 지원은 재단 측에서 책임지겠습니다.”

 “정말 간략하군요.” K는 중얼거렸다. “정말 간단해.”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은 그저 K교수님의 의사를 확인하고 몇 가지 기본적인 서류에 서명을 받기 위해 온 거라서요.”

 “만약 제가 안하겠다고 하면요?” K는 도발하듯 투정한다.

 “그러면 정말 당황스럽겠죠.” N은 침착하게 답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기를 정말로 바랄 것이다.

 “농담입니다.”


 K는 요청에 응하고 N으로부터 몇 가지 설명을 듣는다. 그러나 모두 행정적인 면의 이야기다. 법률로부터 비롯한, 강박적이고 엄한 단어들의 조합이 겨우 몇 장의 종이 위로 범람한다. 그 꼴이 가관이다. 문학의 속도를 준수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 정말로 내게 권한을 일임하려는 모양이군! K는 문득 자신감을 잃는다. 자신이 정말이지 연구 외의 분야에 문외한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식사를 제안받은 K는 N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다. 주로 말을 하는 것은 N이고, K는 맞장구를 치거나 질문에 답을 하는 수준으로 담소를 이어나간다. 이 여자의 언변이 대단하다, 는 것이 N에 대한 K의 전반적인 인상이다. 꼭 아내를 떠올리게 하는 꼴이다. 지치지도 않고 쉴 새 없이 발음을 이어가는, 매력적으로 이어가는 사람이다.

 N은 K에게 불문학의 매력을 묻는다. K는 다양한 이유를 댈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어렵다고 답한다. N은 그 중 가장 큰 것을 골라달라고 한다. K는 그 말의 섹슈얼리티를 감지하고 혼자 웃기다. 아마 내 모습을 더러 N도 웃겠지하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모양새가 우습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겠지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불문학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그것이 정신분석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러 불문학이 놀랍고, 신기하며 하다못해 무서울 것이라는 편견이 있더군요. 하지만 무의식이라든가 전이라든가 하는 용어들, 소위 은폐하는 언어들을 다 치워놓고 생각해본다면 불문학의 세계는 전혀 놀라울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이고 인물들은 거리낄 것 없이 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세계를 아사리판을 만들어놓습니다. 웃긴 일이죠. N씨가 좋아하는 위고를 예로 들어봅시다. 장 발장이 지나가는 곳에는 큰 소란이 일어나죠. 이건 그에게 채워진 족쇄 때문입니다. 장 발장은 평생 족쇄를 이고 살아야 하는 사회적 의무가 지워져있는 인물이죠. 그런데 그는 그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작중에서 장 발장이 저에게 채워진 족쇄를 짊어진 기간은 실로 아주 짧습니다. 자유에 대한 그의 욕망 때문에요. 이건 잘잘못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그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도처에서 사고뭉치 같은 일들을 저지르지요. 그가 아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을 항상 일으키는 게 바로 그라는 존재이지요. 그의 족적이 시대적 배경 때문에 숭앙받는 부분이 있지만 불문학엔 실로 장 발장과 비슷한 존재가 넘쳐난답니다. 작품 안팎을 막론하고요…….”

 “그렇군요.” N이 말한다. “정말 흥미로워요. 앞으로 이런 주제로 강연을 진행해주시면 좋겠어요.” K는 그 말이 진심인지 헷갈린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진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도 진심으로 말한 것이 없다. 위고는 농담일 뿐이다.

 “위고는 제 분야가 아닙니다만, 뭐 그런 이야기들을 해보겠습니다. 허수아비 때리기 같은.”


 일정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들의 대화는 무르익고 분위기가 아주 좋다. K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종류의 흐름이다.

 “강연 이후로 답이 늦었는데 혹시 저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있거나 그러지는 않았나요?”

 “전혀요. 저희는 저희가 후원하는 사람들의 자율성에 모든 걸 맡기는 편이라서요. 다만 도사견처럼 절대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릴 뿐이죠.”

 “그 비유는 좀 무섭네요.” 조소(실소).

 “하하.” 실소(조소).

 “어떤 일이 있었나 아는 편이 N씨에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런가요? 어떤 일이 있었죠?”

 “흔한 얘기긴 합니다. 아내와의 이혼, 갱년기 우울증, 자신감의 결여, 긴 휴가. 뭐 그런 것들.”

 “아아.”

 “크게 해결된 부분은 아직 없습니다.”

 “저희가 도와드릴 일이 혹시라도 있을까요?”

 “있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어디 좋은 병원이라도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군요.”

 K는 N이 속뜻을 알아차렸기를 바란다. 완곡한 거절. 돈은 받겠지만 다른 사람 찾아보고 귀찮은 일은 그 사람에게 다 맡기기를, 마드모아젤(나는 당신을 마담이라 부르지 않겠어). 적임자로는 L이 좋겠군. 귀찮은 일은 이제껏 L이 잘 하니까 말이야.

 “일전에 L교수님과 만났을 때에도 동일한 문제점을 지적해주셨거든요.”

 “그랬나요?”

 “하지만 문제 없을 거라고 들었어요. 변화할 준비가 되었다고 하셔서.”

 “그런 말을 했었죠, 분명.”


 호의, 호감, 공감, 사랑. K는 일단은 네 감정을 일렬로 배치한다. 나열은 우울하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단어의 사이에 들어갈 것이 너무도 많아보인다. 그러나 K로서는 도무지 그것을 골라낼 재간이 없다.

 N에 대한 이야기이다. K는 N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래서 N이라는 여성에게 K는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일종의 신앙고백인데, 그러니까, 자신의 속에 도사리는 그림자, 즉, 비열함과 용기 없음과 결핍된 남성성의 조잡한 융합, 을 그녀가 과연 알아차렸는지,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그 죄를 어떻게 사할 수 있을 지를 묻고 싶다. K는 컬트를 떠올린다. 그는 자신을 사할 용기가 없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N이라는 여성은 건강한 사랑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N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발견되는 결점은, 비록 만난지 몇 시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전통적인 가족 체계에 위협이 되는 행동을 한다는 것뿐이다. 그것 외에 없다. 그런데 그게 뭐가 어쨌단 말인가? 전통은 죽었는데. 죽었다고 애진즉, 백 년도 더 전에 선고를 받았는데.

 예쁜 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말도 안되는 공감각이다. 예쁘다는 건 시각적 심상이고 사랑이란 건 촉각적 심상인데 그 성정이 도무지가 어울리기는커녕 명백히 이율배반적이다. 일과 생활을 구분하지 않는 그는 대부분의 공감각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K는 N에게 모순적 표현을 덧씌울 수밖에 없다. 충동을 느낀다. 아마도 N이 예뻐서겠지.

 ‘N은 회장에게 매력적인 선택지겠지. 회장도, 최소한 그의 무언가는, N에게 매력적이고.’

 아내도 예뻤나? K는 묻는다. 지금도 그는 아내를 그리워하지만 예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면 나는? 나의 어떤 것이 결혼이라는 제의를 통과하게 했나? 나의 어떤 것이 내 기록을 무효 처리시킨 건가? K는 아내가 자신을 그리워하기를 바라지만, 잘난 머리를 아무리 쥐어짜 고뇌해도 그럴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합리적인 추론을 거쳐 내린 결론이므로 우울의 부산은 아니다. 그냥. 그에겐 그냥 그럴 이유가 없다.

 발기. 발기의 문제가 결정적이다. 모두, 그저, 발기 부전으로 설명 가능하다. 그는 발기할 수 없다. 그의 자존심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끝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성별로서 기능하지 않는 살덩어리에 불과하다. 평균의 키와 평균 아래의 몸무게를 지닌, 왕성히 활동하는 두뇌와 그렇지 못한 나머지 신체 전부를 가진, 그리고 누구와도 무언가를 공유하지 않는. 발기 부전은 고기에 매기는 등급 도장이다. 나는 잡고기 취급을 당해 형체 없이 갈려 그저 햄버거 패티 몇 장이 되겠지.


 아름다움 앞에 무력해 말도 못 건넨 나는 한없이 추에 가깝군. K는 생각한다.


*


 K가 재단과의 협업을 통해 성공적으로 첫 강연을 마치고 난 뒤의 일이다. 아카데미즘을 신봉하는 신시대의 종교인들 사이에서 K는, 이제, 가장 인상적인 강연을 펼치고 전석을 매진시키는 구루가 되었다. 그가 출연하는 방송의 시청률은 높았고 이곳저곳에서 그를 초빙하기 위해 높은 금액을 제시했다. 시의 많은 유명인사들이 대기업의 후원을 받는 석학 K와의 사담을 통해 인사이트를 얻기를 바랐다. 

 그는 존경 받았다. 그는 이 사실이 언뜻 마음에 들었다.


 “어떤 일로 오셨을까요?”

 “그, 제가, 성기가 잘……”

 “뭐, 그러시겠죠. 나가서 기다리세요.”

 “예?”

 “환자분 나이대가 우리 병원을 찾아오는 건 다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나가서 수납하시고 기다렸다가 처방전 받아가세요.”

 “아.”

 몇 달 후, 자조가 된 의심은 단 십 초, 몇 알의 실데나필로 치료되었다. K는 그 편리함에 일종의 허무감마저 느꼈다.


 편리함은 아주 쉬운 인정을 유도했다; 의심은 자존의 문제다.

 I재단과 L, 그리고 N의 설득으로 K가 자신에 대한 의심을 자존감의 문제, 정신의학과 뇌과학의 문제로 인식하고 접근법을 바꾸자 문제는 아주 쉽게 해결되었다. 두 가지의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하나는 심리 상담이었고 다른 하나는 발기부전 치료제였다. 모두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그것들이 어떻게 그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지를 K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의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비로소 문제가 과거의 것이 되었다.

 K는 이제 한결 편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부인. 요새도 L은 바쁜가요?” 운전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K는 L의 부인에게 전화를 건다. “잘 안 보이더라구요.”

 “학회가 끝나고 귀국한 후로는 I재단과 만나는 일이 잦더라구요. K씨가 인맥으로 다른 지역의 학자들을 우리 시로 데리고 오는 것처럼, 남편도 인맥 때문에 여러 지역을 오가며 강연하고 있어요.”

 “테뉴어가 확정적이라죠, 아마?”

 “당당할 얘긴 아니지만, 재단과 학교를 연결해준 데에는 K씨와 남편의 공이 컸으니까요. 협의회에서 조만간 공식 발표할 거라는 소문이 돌아요.”

 “사모님들의 네트워킹이 참 무섭군요. 나도 덕 좀 볼 수 있으면 좋을텐데.”

 “호호.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줄까요?”

 “괜찮아요, 당분간은……. L이 돌아오면 연락하라고 전해주세요.” 전화를 끊는 K의 의식이 뭉근해지는 것만 같았다.


 K는 최근 들어 겪고 있는 병적 탈력의 원인이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그의 직업적 소명이 닳아빠진 것이 우선이었다. 최근 연구에 소홀해진 그는 스스로 자신의 지적 날카로움이 많이 무뎌졌다고 생각했다. 업자들과 대중을 상대로 선 연단 위에서 중요한 것은 엄밀함보다는 흥미로움이기 때문에, 다소 어정쩡한 단어들을 현란하게 동원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 K는 전혀 불만족을 느끼지 않았다. 학내에서 그와 동료 L의 입지가 탄탄해졌고, 명성을 얻었으며, 무엇보다도 지난 십 수년 간의 경력 중 가장 높은 소득을 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K는 그것을 도취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K는 그것으로부터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단지, 그거면 됐지, 하고 가끔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 다음이 문제인데, 약의 성분들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항우울제와 실데나필은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의사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오히려 항우울제가 발기부전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실데나필을 병행하여 먹는 것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논문을 보여주며 K를 설득했다.

 그러나 그런 설득은 K가 경험하는 착란을 설명하지 못했다. 종종 K는 환상을 목격했다. 언제나 같은 환상이었다; 우선 K는 아내와 섹스를 한다. 길고 오래. 그는 섹스를 감각한다. 흥분은 질병적으로 감지된다. 그러다 절정과 환희에 다다를 무렵 모든 것은 형체를 잃고 물감처럼 와해된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정액의 빛깔을 띤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K는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행복한 산책을 한다. 그가 바타유를 내던진 바로 그 강변 공원이다.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웃는다. 그는 행복을 감각한다. 열병과 같은 아지랑이가 도처에 피어오르고 그 와중으로 가족은 걷는다. 은근한 열기와 자외선의 따끔함, 이따금 불어오는 오솔 내음의 바람 따위를 감각한다. 이 지점에서 K는 어떤 의심과 함께 목격하는 존재로써의 스스로를 와해한다. 그것은 선택에 따른 결과이다. 대가는 자신이 어떤 의심을 했는지 알지 못한 채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그건 겨우 오 초 남짓한 비전이다. 오 초면 세상살이를 하며 별 지장을 일으키지 않는 시간이다. 그런데 환상에서 깨어날 때 대부분의 경우 그의 성기는 발기돼있었다. 이 사실을 최초로 발견한 때에 그의 하반신은 다행히도 책상에 가려져있었는데 이후로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그는 연단 뒤에서 강의를 하거나 앉은 다리 위로 외투를 올려놓는 방식으로 자신의 국부를 숨기고자 했다.

 아무래도 환상이라는 것은 평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는 의사들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사코 약물 부작용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성분이 애초부터 처방된 약에는 없다고 주장했다. 몇몇과는 드잡이하기 직전까지 언성이 높아지고는 했지만 결국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한 건 K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은 그의 사례를 학회에 보고하여 다른 학자들과 공유하는 것이었다. K는 꺼림칙했지만 별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환상이 도래하는 것은 L의 부인과 전화를 마친 직후였다. 차 안이었다. 정체된 도로 위라 오 초는 커녕 오십 초가 지나도 차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그 부분만은 안심이었고 K는 환상을 받아들였다. 발기와 행복이 순차적으로 K를 찾아왔다. 강렬한 신경증적 카타르시스에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전율했다. 그러나 차 안에 K와 덩그러니 남겨지는 것은 발기뿐이었다.

 희미한 판단력의 와중으로 K가 알아낸 사실은, 그 모든 환상 속의 전경에, 바타유의 책이 없다는 것이었다. 강변 공원이 그의 기억에 체류하는 것은, 그의 의식이 강변 공원의 어떤 전경을 굳이 제 목책 안으로 끌어들여야만 한다면, 그건 K가 던져버린, 아내가 선물한 붉은 책 외에 다른 연유가 없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K로서는, K의 무뎌진 지성으로는 도저히 추측할 길이 없었다. 자신으로부터 탈락한 어떤 성정이 아니고서는 그 이미지를 해석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이래나 저래나 에로스가 그의 스트레스를 가중하고 있었다.


 뭉근해진 정신이 다시 형체를 되찾을 무렵 그는 어둡고 눅눅한 방에 누워있었다. 벌거벗은 채였다. K는 당황했다. 그가 구조를 채 파악도 하기 전에 방문을 열고 어떤 여성이 들어왔다.

 젊은 여성이었다. 사실 젊은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조명도 컴컴한 데다가 인종이 달라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젊다는 건 주름이 없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여성은 익숙한 듯 옷을 벗고 K에게 뭐라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K는 그녀가 화대를 요구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손사래를 쳤다. K는 살면서 단 한 번의 불법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는 이 상황이 외려 무섭기까지 했다. 아니오. 아니오. 노. 노. 노.

 그 모습이 다급해보인건지 구릿빛 피부의 아시안은 웃으며 오케이, 하고 느긋하게 말했다. 그게 그녀에겐 그저 전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K는 뒤늦게 깨달았다.

 여성은 벗은 몸으로 K에게 밀착했다. 여성의 전면부가 그의 등 위로 온전히 느껴졌다. K가 포르노에서 익히 본 장면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발기하지 않으리라, 하고 스스로 다짐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게 현실인지 아니면 새로운 종류의 환상인지 알 수 없었다.

 환상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은 모든 것이 K의 심상에 떠오르는 포르노의 장면들을 꼭 닮았기 때문이다. 은근하게 뒤섞인 신음, 파괴적인 쾌감, 피부와 피부 사이로 관능을 띠고 흐르는 오일. 무엇보다도 그의 몸이 그 모든 것을 견뎌내고 있었다. 결코 젊다고 할 수 없는 신체가 생애 처음으로 오르가즘에 다다를 때 그의 판단력은 결여되었다.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하는 접촉은 수십 분을 이어가고 마침내 K는 어떤 믿음에 다다랐다. 즉, 지금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은 현실의 것이고, K의 세계는 도파민의 범람으로 영구히 침수되었으며, 그걸 벗어날 재간이 없다는 믿음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것으로 보였다.

 포르노와 메타적 시선이 중첩되었을 때,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깡마른 중년 남성이 젊은 동남아 여성으로부터 오르가즘의 폭발을 최초로 경험하게 되었을 때, 그는 오직 한 가지만을 바랐다; 신이시여, 이게 부디 환상이기를.

 “하우 머치?” K가 말했다.


 십 몇 여 분이 지났을까. 그는 기진맥진한 채 샤워를 했다. 노곤하고 끈적해진 몸을 씻어야만 했다.

 샤워 헤드의 물세례를 받는 동안 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제정신이었다. 그러니까, 그저 너무 제정신이기 때문에,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양가성은 거의 조울의 그것에 준했다. 

 기만적인 소망에는 단 한 줌의 그림자도 끼지 않았다. 이제 그를 배회하던 망령은 사라졌다. 저질러버렸다. 아내로부터 느끼지 못한 감각을 그는 이국으로부터 온 창녀에게 느꼈다.

 매춘은 소설에서 읽던 모티프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에게 매춘은 곧 어떤 단어들의 연결에 불과했다. 쾌감, 환희, 타성, 질투, 고독, 병약 따위의 나열로서. 그런데 이제 단어가 심상이 되었다. 전환은 아주 격렬했다.

 모든 것이 한데 얼키고 설킨 아주 지저분한 공감각이 그 뒤로 남은 모든 것이었다.

 그는 샤워를 길게, 아주 오래 했다. 그러고난 다음에는 주변을 뒤적여 자신의 옷가지를 찾아내고자 했다. 베이지 색의 치노 팬츠와 흰 폴로 셔츠, 붉은 넥타이, 그 위로 브이(V) 자로 파인 네이비 컬러의 니트 조끼. 흰 양말과 검은 구두. 그는 매무새에 집중했다.

 그러면서 그는 최선의 결정을 내렸다. 만약 이게 환상이라면, 환상으로부터 깨어나 L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좋은 인연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해야겠다고. 그리고 만약 이게 현실이라면, 누구도 모르게 은밀히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일어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 완전범죄를 완성해야겠다고. 그리고 약을 중단하고, 모든 일정을 L에게 위임한 뒤, 그에게 결여된 무언가를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그가 심호흡을 하고 방을 나갔을 때 K는 L과 마주쳤다. “자네도 이곳에 다녔나?” 

 서로가 서로를 마주칠 일이 결코 없는 곳이었다. L은 당황해 새빨개진 얼굴로 짐짓 반가운 듯 손을 내밀었다. K는 아연실색해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인신공양 컬트같았다. 두 추한 중년 사내들의 사이를 죽음같은 정적이 내달렸다. 매매된 오르가즘만큼이나 폭발적으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빌어, 감히 주장하건대, 이 글은 거짓이다. 물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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