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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도 Godot Aug 29. 2024

춤추는 벽

춤추는 벽



 부모에게 물려받은 SUV는 서스펜션이 한껏 굳어 노면을 따라 가감 없이 흔들렸다. 차체가 흔들릴 때마다 인형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아마도 혼자여서 그럴 거야, 인형은 중얼거렸다. 이 차를 탈 땐 거의 항상 누군가와 함께였다. 그러니까, 가족이나 친구들. 트렁크에는 짐과 가방을 한껏 싣고 조수석에는 사람들을, 스피커는 시끄러운 노래를 틀고 계곡이나 캠핑장을 향해 어디론가 가는 게 줄곧 이 차의 정체성이었다.

 지금 인형이 차를 몰고 향하는 곳은 도로가 굳고 많이 부서졌을 어느 어촌이었다. 유명하지도, 번성하지도 않은 그 어촌으로 향하는 길을 심지어 그는 일렁이는 인상을 더듬거리며 따라가고 있었다.


 마음이 허술했다.


 불현듯 코피. 검은색에 가까워 흡사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른 듯한 피가 뚝뚝, 바지에 떨어졌다. 에이 씨, 하며 반사적으로 욕 할 틈도 없이 인형은 을 떠올렸다. 이 피의 색에 가까웠던 그 이 제 힘으로 심상까지 떠올랐다.

 인형은 왼손으로는 운전대를 잡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안 보이는 포켓 티슈를 찾아 손을 휘적였다.


*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인형은 어린 날 위대한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꾸던 자신을 꿈에서 보았다. 스터디 카페가 따뜻해, 한구석에 놓인 책상에서 공부를 하다 졸고 있다는 것 역시 느끼고 있었다. 꾸벅꾸벅 졸며 본 어린 아이의 모습은 곧 글자가 되었다. 공공 선택론, 과학적 관리론, 인간 관계론, 조직 구조론 따위가 살아서 춤을 추고 있었다. 재미 없어. 아이는 불만족스러운 그 모습을, 그 꼴을 봐줄 수 없었다. 그러면 글자는 곡선이 되고, 풍만한 마음으로, 이윽고 여자가 되어 인형을 보듬었다. 좋은 향기와 부드러운 촉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감촉이 뾰족한 한 끝으로 모이고…

 쾅.

 발작 환자처럼 몸을 튕기며 잠에서 깨고야 아이는 다시 어른이 되었다. 큭큭, 어디선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그런 소리를 내지 않았어도 인형은 그 소리를 분명 들었다. 그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카페를 나왔다. 문턱을 지나며 새끼 발가락을 아주 세게 찧었지만 고통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밖에 나오고서야 발끝이 아렸다. 슬리퍼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새끼 발가락을 휴대폰의 불빛으로 비추어보니 부러지거나 하진 않았다. 문득 허기가 몰려왔다. 배고플 시간에 한 글자라도 보라는 공시 강사의 말과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이 죄책감이 느껴졌다. 내 배가 고픈데, 어쩌라고 그럼. 인형은 꿍얼거리며 편의점으로 갔다. 컵라면 하나를 들어 계산을 하고 취식대에서 대충 조리를 하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곧 시험이 가까워 핸드폰 사용을 자제하는 중이었다. 삼 년째에 접어드는 가혹한 공시생활 동안 유일한 낙은 SNS 확인이었다. 전시된 멋진 삶들과의 유일한 연결점. 사진으로 보이는 그들의 빈틈에 자신을 대입하는 건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은밀함은 건조했다. 메마른 표면에 물을 뿌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정도로 건조했다. 누구라도 논과 밭과 연못에 물을 대고 싶어하지, 다 말라 생명의 흔적도 없는 사막에 물을 대고 싶어하지 않는다.

 때문에, 어떤 경우, 한 방울의 비나 이슬을 운으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잘 지내?>

 가령 그의 메신저에 도착한 짧은 안부가 그러했다. 인형은 멈췄다. (알 수 없음). 보낸 사람의 이름이었다. 메신저상 친구로 추가되어있지 않은 사람, 그러니까, 낯선 사람이었다. 낯선 사람의 간단한 문자 한 통을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지만, 그러나, 이유도 맥락도 없었다.

 ‘어떤걸까......’

 컵라면의 뚜껑을 열면 갇혀있던 김이 삽시간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는 젓가락으로 면을 휘휘 

저으며 뭉친 스프 덩어리를 풀어헤쳤다. 면을 한 젓가락 들어올려 후, 후, 불고는 입술을 대보지 

도 않고 빨아들여 우물우물 씹었다. 하지만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혹여 뜨거워 그런건가 싶었지만, 그릇을 만져보면 전혀 뜨겁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다소간 놀랐다. 그제서야 그는 마음에 먼지가 부산히 차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문자가, 단어의 덩어리들이 마음 속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지금 그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국물을 한 모금 마신 인형은 먹던 것을 모두 음식물 쓰레기통에 비워버리고는 편의점을 나섰다. 그리고 한참을 가만히 서서 고민했다. 그는 문자를 다시 읽었다. 하지만 그의 깊은 곳 어딘가에서 그것이 누군가의 목소리로 재생되어 머릿속에 가득히 울려퍼졌다.

 그리고 인형은, 만약 그의 생각이 맞다면, 그 누군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잘’, ‘지내’, ‘?’. 잘 지내냐고? 누군지도 모르는 당신에게 그걸 답해야합니까? 당신, 내 연락처를 어떻게 구한 거야? 하고 싶은 말이 퐁퐁 샘솟았지만 그는 침착하게 생각하기로 하고 조심스럽게 자판을 두드렸다.

 <ㅇ>

 이 정도면 적절해. 침착하고 조심스러운 손짓, 단 한 번의 두드림으로 인형의 심장은 수십 번이고 더 뛰었다. 인형은 부정맥을 의심했다. 하지만 그 맥박들은 그저 착각이었다. 손목의 맥을 짚었더니 심장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그냥 뛰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잘못이 없으면서도 잘못한 사람처럼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유령처럼 집에 들어가, 침대에 몸을 숨기고, 오지 않는 잠을 재촉하는 동안 두려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답장이 오지도 않았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이틀 뒤에 온 답장은 다소 당돌했다. 인형은 스터디 모임이 끝나고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눈에 띄게 집중력을 잃고 당황한 그의 모습을 팀원들이 걱정하고서야 그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속이 좋지 않다는 핑계였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갑자기 속이 안좋아졌다. 숫총각같은 긴장감. 내가 문자를 보내면 저 사람은 언제서야 다시 답장을 보낼까. 질박한 미련이었다. 과거로부터 손을 뻗고 있는 종류의 질박함이었다.

 <?>

 <이기적인 행동인 것, 알아. 하지만 오빠 말고 부탁할 사람이 없어.>

 끊었던 담배를 사는 동안 답장이 왔다. 비닐이 반쯤 벗겨지던 담뱃갑은 호주머니에 처박혔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읽고서야 인형은 묵은 기억을 떠올리고 발신인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바로 떠오른 것은 밈(meme)이었다. SNS에 유행하는 게시글들, 지난 연인들이 미련을 버리지 못해 보낸 연락에 대한 조롱과 경멸을 캡처한 사진들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나 무슨 상황인거지?

 이거, 그런 건가?

 나중에 놀림감인 것 아냐?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은 야박했다. 야박하게,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빠 말고 부탁할 사람이 없어’. 이 말의 의미를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느끼지도 생각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는 결정을 내렸다.

 <전화해. 오늘 좀 바빠.>


 침착해보이려 공을 들인 문자가 그 자체로 우스워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형은 사흘 후에 깨달았다. 이른 아침이었다. 영등포역의 하늘은 구름이 조금 껴 푸근했다. 훈기가 도는 날에 그는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가디건을 대충 걸쳐, 한 손에는 정장 한 벌이 담긴 면 케이스를, 다른 한 손으로는 커피 두 잔이 담긴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보스턴백도 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크게 옷가지와 수험서 따위가 들어있었다. 구두도 있었다.

 타임 스퀘어를 내다보며 저 건물의 이름이 왜 ‘타임 스퀘어’일지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인형은 길가의 차 한 대가 자신을 기다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상쾌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같은 소리가 반복되고서야 그쪽으로 관심을 보였다. 그녀가 있었다.

 “오랜만이다, 오빠. 트렁크 열어줄게.”

 그녀는 버튼을 눌러 익숙하게 트렁크를 열었다. SUV였다.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이 넉넉했다. 그는 보스턴백을 한 곳에, 짐이 없는 다른 곳에 정장 케이스를 놓았다. 정장이 구겨지지 않게 조심했다. 짐을 다 싣고 트렁크를 당겨 닫으려는데 잘 닫기지 않았다. 그녀는 트렁크의 한 쪽에 난 버튼을 보여주었다. 버튼을 누르니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손이 끼면 어떡하지?”

 “자동 감지 기능이 있어서 괜찮아.”
 “감지 기능이 고장나면?”

 “그러면 진짜 재앙이지.”

 차가 움직이고 체감상 이십 분은 지나고서야 인형은 그녀와 처음으로 말을 나누었다. 인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운전은 언제부터 시작했어?”

 “용인에서 자취를 해. 교통이 안 좋아서, 차가 있는 편이 아무래도 낫더라.”

 “취업?”

 “응. S전자, 생산.”

 “조졸이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형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인형은 언젠가 그녀가 학교를 조기 졸업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는 졸업 너머의 세계를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차가 깨끗하다. 신차야?”

 “중고. 근데, 시세보다 너무 낮은 거 있지. 사람 죽은 거 아닌가 몰라.”

 “맙소사. 그게 진짜 재앙이지.”

 “하하.”

 그녀의 웃음을 보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아까 보니까 뭘 많이 들고 있던데, 뭐야?”

 “내 짐이랑 정장, 커피도.”

 “커피 사왔어?”

 “내 건 아메리카노 샷 추가, 네 건 아인슈페너.”

 “그거 아직도 기억하는구나. 새내기때, 할리스.”

 ‘기억하는구나’. 인형은 그 말만 애써 모른 척 하며 웃었다. 조수석 차창 밖으로는 하늘이 파랗고 구름이 점점이 흘러다녔다. 아마 창문을 내리면 더 파랄 것 같았다. 그리고 구름도 더 하얄 것이다. 마치 그녀의 아인슈페너처럼. 인형은 자기가 들고 온 아메리카노 샷 추가때문에 그녀도 새내기때를 떠올리고 있을지 알고 싶었다. 너도 내 생각을 하니?

 “정장은 왠 일?”

 “상여 지는 날이라 입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인부 쓰니까 상관 없어. 편한 옷 입고 온대.”

 “아.”

 그는 창문을 조금 내렸다. 맑은 날이라 차창을 거세게 넘어오는 바람을 마시고 싶었다.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입자의 맛이 좋았다. 약간 익은 물기가 코털을 간질였다. 동양인에게는 빛을 세게 쬐면 재채기를 하게 만드는 유전자가 있다던데, 그 말이 꼭 맞는 것만 같아 그는 조수석의 차양막을 내렸다. 창문을 여는 것에 대한 허락을 구해야 했나 하는 걱정이 뒤늦게 들었지만, 그녀도 딱히 별 말 하지 않았다. 산들한 바람이 뺨을 쓰다듬으면 긴장이 되는 자리였지만 외려 마음이 좋아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졸음을 마주하고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등받이의 각도가 점차 완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눈을 떠 시선을 차창 밖으로 향하면 비가 오고 있었다. 툭. 투툭. 줄기가 얕고 가늘었다. 잠에 혼미한 와중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창을 올리려 했다. 그러나 창은 이미 올라가 있었다.

 “미안. 요새 잠을 못자서…”

 “요새도 공부해?”

 “으응.”

 ‘요새’라는 단어에서 인형은 희미한 감각을 느꼈다. 그러나 그게 어떤 건지 특정할 수 없었다. 졸음 때문인걸까? 생각하며 그는 등받이의 각도를 높혔다.

 “많이 힘들지? 몇 년 동안.”

 그녀는 그에게 다정한 말을 건냈다. 인형은 생각했다. 그건 분명 누구라도, 누구에게라도, 어떤 관계에서라도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말이라고. 하지만 그 말이 그토록 자연스럽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녀가 진정 다정한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고. 그녀는 항상 다정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별로 다정하지 않았지만 그건 누구라도 다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 때문이었던 건 아닐까? 불현듯 떠오른 의문이 뇌리를 강타했다.

 “괜찮아. 근데, 얼마나 남았어?”

 “이십 분 정도? 조금 늦었어. 관이랑 사람들은 도착했을테니 우리도 내리면 바로 움직여야 해.”

 “비가 오는데, 괜찮나?”

 “내려서 잠깐만 걸으면 돼. 좀 더 자.”


그녀는 네 살 때부터 할머니와 살았다. 부모가 맞벌이를 한다던가, 이혼을 했다던가 하는 촉촉한 이유는 아니었다. 인형이 기억하기로 그들은 그녀의 생일에 가족이 함께 차를 몰고 캠핑을 가다가 빗길에 과속을 하던 트럭과 충돌해 끔찍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녀가 그 사고를 생생하게, 동시에, 건조하게 묘사하던 것을 기억했다. 트랜스(trance). 그땐 그녀가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멀리 떨어진 어딘가로 훌쩍 떠난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마치 그게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나레이터가 다큐멘터리에서 말을 읊조리는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비가 왔다, 미끄러지듯 차는 멈춰섰다, 건널목의 트럭은 그러지 못했다, 그것은 여러 대의 차들을 피해 한 대의 차를 향하여 핸들을 꺾었다, 그들은 ‘그냥’ 거기 있었을 뿐이다, 트럭은 차의 앞부분을 밟고 지나갔다, 진득한 점액질의 감촉과 비릿한 철가루 냄새 따위의 자극들이 강한 힘으로 의식을 강탈했다.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담담함은 인형의 호기심을 건드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린 몸이 병원에 뉘여저있었다. 그녀는 병원에 가본 기억이 없었지만 그 특유의 답답하고 건조한, 치밀하게 정제된 공기의 냄새가 그 경험을 보증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몇 달을 지냈다. 물리적으로 다친 곳은 얼마 없었고 그마저도 경미해서 그녀는 자신이 왜 병원에 있어야 하는지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 이유를 찾아준 것은 친척들이었다. 다시, 촉촉한 이유는 아니었다. 돈과 법 따위의 날선 것들을 다룰 때에 어린아이는 거추장스러웠다. 일가족 중 특출하게 성공한 그녀의 부모는 아주 많은 재산을, 넓은 땅과 여러 채의 집과 고액의 현금과 증권 따위를 소유하고 있었고 이제 그들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남은 자들이 그것들을 ‘공정’하게 분배받아야 했다. 공정이란 어려운 과제였다. 누구는 아비의 형제였고, 누구는 어미의 사촌이었기 때문에 그것 외에 자격이랄 것이 없는 자들이 각자 자신의 몫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들이 몫을 주장하는 꼴은 동화책에서 도적들이 약탈물을 두고 아귀다툼을 하는 꼴과 같았다. 가족을 이유로 분배를 주장하기에는 그들은 가족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꿔서 법을 샀다. 법은 그들의 밥그릇의 크기를 잘 정해주었다. 핏줄이 곧바로 이어진 이들은 많이, 한두 다리를 건넌 이들은 조금 받았다. 그들은 도적떼가 두령의 말을 듣듯 얌전히 제 몫을 챙겨 홀연히 사라졌다. 아귀들이 엉망진창으로 싸우던 결투장에 흙먼지가 가라앉으면 남아있는 것은 돌멩이와 낙엽 몇 조각 그리고 아이가 한 명 있었다. 법은 돈과 말로 굴러간다. 돈이 있기는 커녕 돈이 뭔지도 모르는, 그리고, 말을 이해하기는 커녕 말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모호한 선의는 없었다. 그런 존재를 지키는 것은 병상이었다. 병상을 차지하고 눈 먼 지출을 발생시키는 아이는 골칫거리였고, 병원은 병동에 아이를 덜렁 버려두고 홀연히 사라진 보호자들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충분한 돈을 손에 쥔 이들은 그런 연락이 오는 것조차 불쾌해했다. 겨우 연이 닿은 것은 벙어리 노파였다.

 구불한 서해안의 도로를 타고 차를 몰아 내려가면 생각이 반쯤 없어지는 즈음의 어딘가에 새마을 깃발이 나부끼는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 집이 있었다. 뭉근해진 기억에 따르면 그녀는 제 발로 그곳까지 갔다. 바퀴가 달린 어떤 것들이 그녀를 그 언저리까지 실어다 주었음에 분명하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제 발로 걸어다닌 장면들뿐이었다. 그곳에는 마당에 심은 대파에 물을 주고 있는 늙은 여자가 허리가 굽은 채로 쪼그려 앉아있었다. 당시의 그녀는 자신이 눈 앞의 노파와 앞으로 십 몇 년을 함께 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자신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오라고 손짓하며, 괴상한 ‘어어어’ 소리를 내는 거무죽죽한 이 물체를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다가 비명을 지르고는 집 앞 도로를 가로질러 해변가로 도망쳤다. 고관절이 잘 움직이지 않는 노파도 주춤주춤 걸어서 그녀를 쫓아갔다.

 그게 첫 기억이라고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알몸으로 말했었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그는 알몸으로 그 말을 경청했었다. 그리고 그는 꿈결에 그런 기억들을 떠올렸다.


 “내리자.”

 계기판의 바늘 끝이 완만한 호를 그리며 내려앉았다. 그는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다른 한 손으로는 버클을 더듬더듬 찾아 풀었다.

 산등성이까지 용케 길이 가닿은 끝에 작게 공터가 났다. 비는 오는둥 마는둥 허설프게 나리고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그녀는 공터의 한 끝에 차를 댔는데, 다른 끝에 꾀죄죄한 용달 트럭이 먼저 와있었다. 나이 깨나 먹은 듯한 사내들이 트럭 주변을 서성이며 담배를 피거나 산세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들은 제각기 편한 작업복을 입고 왔다. 다섯쯤 되는 그들은 인형과 그녀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는 하던 것을 대충 정리하고 트럭 뒤편에 씌운 덮개를 벗겼다.

 조금 밝은 색의 조잡한 관 한 짝.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사내들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사내들은 인사에 엉거주춤한 목례로 화답하고는 관을 내렸다. 상여를 지기 위해 필요한 손 여섯 중 다섯을 그들이 맡고 인형은 남은 자리에 들어갔다. 깨나 무거웠다. 관이나 관에 들어간 이의 무게가 그리 무겁지 않을텐데도 어깨며 팔이 육중함을 느낀 것은 아마도 그녀의 슬픔을 그가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내들은 낮고 구슬픈 상여 소리를 냈다. 음산했다. 인형은 그들의 노래를 어물쩡 따라했지만 이윽고 관뒀다. 뒤로는 그녀가 따라오고 있었으며 아래로는 땅이 질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물기가 묻어 부드러워진 입자가 사람과 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인형은 중심을 잡기 위해 발걸음 하나마다에 힘을 많이 실었다. 인부들이 수시로 자리를 바꾸어주고, 중간에 쉬어가며 경사를 올랐다. 그러나 끝이 보이질 않았고 인부들의 짜증도 스멀스멀 일었다. 상여중이라 말은 않아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십 여 분을 걸으니 빽빽하지도 듬성하지도 않은 침엽수림 사이로 난 같잖은 길 끝, 작은 구덩이가 보였다. 구덩이를 들여다보니 물이 깨나 차있었다. 인부들이 전날 미리 와서 땅을 파놓고 그 위로 큰 방수포를 덮어놨는데 그 위로 물이 고이면서 방수포가 그대로 구멍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팔을 뻗어 꺼내기에는 애매한 깊이였고, 꺼내다가 중심을 잃으면 사람이 빠지거나 바닥에 물이 철철 쏟아져 고일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인부들은 난감해했다. 자연히 그들의 시선은 상주인 그녀를 향했다. 그러나 그녀라고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시선이 인형을 향했다.

 “보통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합니까?”

 인형이 사내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는 한 명이 그에게 말했다.

 “비가 그쳐야 관을 묻지. 이런 날 상여지는 것도 재수 없는 일인데, 번번이 무슨 일이 생기니 앵간하면 오늘은 안 하는 것이 좋아.”

 “다른 날을 잡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인부 다섯을 한 번 더 부르기엔 돈이 없어.”

 “너, 얼마나 있는데?”

 그녀는 통장 잔고를 밝혔다. 딱히 건장하지도 않은 이 사람들을 또 부르는 데에 정확히 어느 정도 액수가 필요한 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이 잔고로는 부족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통장 잔고를 떠올려보았다. 그런 다음 간단한 덧셈을 해보았다. 확실하지 않지만, 그것 역시 부족했다. 그런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렬하게 돈을 벌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이대로 해야 할 것 같아. 바닥에 고인 물은 어쩔 수 없겠어.”

 “......그렇지?”

 그녀의 목소리가 구겨졌다. 인형은 구겨짐의 주름들로부터 강한 기시감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런데 그것들이 어디에서 왔냐하면 그건 확실하지 않았다. 어쨌든 비는 오고 있었고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인부들에게 매장을 속행할 것을 지시했다. 인부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방수포를 치운 다음 관을 들었다. 그리고 힘을 모아 관을 조심스럽게 구덩이 속에 내렸다. 긴장을 풀지 않고 계속 일정한 힘을 주면서 조심스럽게 관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물이 고여 철벅,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관이 썩지는 않을 거요, 저렇게 반딱반딱하니 처리가 잘 된 걸 보면 비싼 관이니까. 사내들 중 키가 작은 인부가 부러 크게 말했다. 말을 건 대상이 인형인지, 그녀인지, 사내들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녀는 입을 꾹 닫고 관이 내려가는 것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관은 값이 꽤 나가 보였다. 인부들을 고용할 돈이 없는 것은 그만큼의 돈을 관을 사는 데에 썼기 때문이리라, 하고 인형은 추측했다.

 사내들 중 두 명이 삽을 들었다. 물에 오래 젖은 흙더미가 퉁명스럽게 한 삽, 한 삽 씩 지하로 낙하하고 짧은 간격 이후로 척, 척 소리를 내며 쌓였다. 작업은 십오 분 남짓 이어졌다. 다른 사내들은 잡다한 소품과 장비들을 챙겨 먼저 하산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종이 봉투를 한 개 씩 건네었다. 그 안에는 감사의 인사를 짧게 적은 메모지와 정성스럽게 깎은 과일 약간이 들어있었다. 돈이면 더 좋은데, 하며 너실너실 웃은 인부도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봉투를 받아들고 그냥 그곳을 떠났다.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든 사내들은 봉투를 받아들지도 않고 그냥 떠났다. 그들은 단지 비가 그치고 땅이 마르면 흙을 더 보강할라고 말할 뿐이었다. 가능하면 능선을 따라 고랑을 약간 파헤쳐서 물 흐르는 길을 만들어 주라고도 했다. 방법을 상세하게 말해주지도 않았다. 다만, 아무리 젊어도 부부가 돈이 그렇게 없어서 되나, 하는 말을 남겼다.

 사내들이 떠나고, 그녀는 바리바리 챙겨온 작은 돗자리를 펴고 절을 했다. 허섭한 반상에 작은 과일을 올려놓고 그녀는 두 번 절했다. 할 말이 많았는지 한 번 한 번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마지막 순간에서 그녀는 특히 오랫동안 몸을 굽히고 가만히, 엎드린 자세를 유지했다. 그녀의 어깨가 호흡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또는 조금 느린 속도로 들썩이는 것을 인형은 또한 오래, 유심히 관찰했다.

 비가 그치고서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많이 젖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길을 따라 차로 돌아간 동안 차 안에 적막 외에 없었다. 너무 적막해, 심지어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길을 따라 차를 몰면 어느샌가 구름이 개이고 비가 멎었다. 그들은 할머니의 마을까지 내려간 뒤에 차를 세우고 어딘가에서 옷과 몸을 말리기로 했다.

 “넌 항상 대단해.”

 인형은 제딴에 신중히 고른 말을 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라면 너처럼 못했을 것 같아서.”

 그녀는 그의 말에 한동안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당연한 일이잖아. 음, 그러니까…. 뭔가 좋은 답이 떠오르질 않네. 쌩뚱맞아.”

 “그냥 그런 말을 하고 싶었어.”

 “날 걱정한 거야?”

 인형은 답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았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제 머릿속조차 쉬이 가늠할 수 없었다. 먹구름이 덜 가신 모양이었다. 문득 그녀의 손을 잡고 싶다는 충동이 미친 듯이 일었다.


 산어귀의 낡고 갈라진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걸어가면 마을이 보였다. 마을 앞을 두르는 큰 도로를 건너면 주민들이 쓰는 작은 항구가 있었다. 작고 낡은 어선이 몇 척, 한 손으로 셀 만큼 적은 포구였다. 쥐 죽은 듯 조용한 그 마을엔 아기가 장난감을 흩뿌려놓듯 집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지붕도 파란색, 주황색, 노란색, 심지어는 초가에 이르기까지 제각각이었다. 그것들이 굳이 같은 지역에 있을 필요가 없어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다. 산이 그들을 품고, 바다가 그들에게 젖줄이 되어주었다. 약간 각도가 틀어졌지만 어쨌든 그들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 시선을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심지어, 집들이 저마다 의지를 갖고 제 힘으로 바다를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조용한, 또는, 죽은, 마을의 많은 아비와 어미들이 자라나지 않은 새끼들을 돌보고 있던 이 마을이 영혼을 갖고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인형은 그들을 상상했다. 그들이 살던 이 마을을 상상했다. 아비들이 그리고 어미들이 생생한 살과 깨끗한 피를 갖고 무언가를 꿈꿨을 것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들 없이 자랐을 그녀를 상상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박살이 난 마을을 새롭게 가꾸던 시절에 시멘트로 투박하게 쳐발랐을 길바닥을 인형은 최초로, 그녀는 익숙하게 걷고 있었다. 넋 없이 그녀가 앞을 걸어가면 그는 뒤를 나지막한 종종 걸음으로 따랐다. 상념에 잠겼을 그녀와 달리 그는 다만 관찰하고, 상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키가 무릎에 겨우 가닿았을 무렵의 그녀는 무엇을 하며 놀았을까.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학교에는 어떻게 다녔을까. 친구는 몇 명이었을까. 꿈은 무엇이었을까….

 “무슨 생각해?”

 그녀가 갑자기 질문했다.

 “으응?”

 “무슨 생각 하냐니깐?”

 “어…, 네 생각.”

 “내 생각?”

 “이상한 생각 아냐.”

 “그래?”

 그녀는 큭큭,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내 답이 우스운 걸까? 인형은 혼란스러웠다.

 “나중에 이곳에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왜?”
 “아까 인부들이 말한 것 때문에. 흙을 더 덮고, 빗길을 만드는 일. 신경이 쓰여서….”

 말끝을 흐렸다. 말끝이 흐려졌다.

 “하지만 오빠가 그럴 필요는 없어. 월급이 들어오면 삽을 사던가 인부를 더 쓰면 되잖아.”

 인형은 수긍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기 잠깐 앉았다 가자.”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가리킨 곳에는 작고 허름하게 벽이 붉은 건물이 한 채 있었다. 지붕이 높고, 좁은 끝으로 뾰족해지는 봉우리에 지금은 녹슬고 부서진 십자가가 있었다.

 “이런 마을에도 교회가 있었구나.”

 “어렸을 때 세워진 개척 교회야. 목사가 사람들 도움을 받아서 만든. 할머니가 도와주실 때 나도 벽돌 몇 장 날랐지. 나 대학 다니는 동안에 없어졌더라구.”

 “무슨 일이 있었을까?”

 “목사가 몸이 안 좋아져서 그랬다는데, 내 생각엔 그냥 귀찮아져서 그만둔 것 같아.”

 “하하.”

 비를 맞지 않은 처마 밑으로 벽면을 따라 벤치 하나와 의자 몇 개가 놓여있었다. 마을의 노인들이 담소를 나누기 위해 집에서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였다. 약간의 간식거리들이 소쿠리에 담긴 채 보자기로 덮혀 그늘진 곳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멀리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생경했다. 그는 가까이의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에 집중했다.

 “예쁘다, 마을. 저 바다도.”

 “그치?”

 “어렸을 때 저 바다에 자주 갔어?”

 “하루도 안 빠지고 갔지. 여기 온 첫 날부터.”

 “할머님이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했지.”

 “맞아.”

 그녀는 웃었다. 그 웃음은 은은했다. 은은한 미소에는 오래된 단상을 힘 있게 톺는 바닷가 마을의 젊은 정신이 있었다.

 “많이 기억하네.”

 “뭘?”

 “오빠 말야. 나에 대한 걸.”

 “그런가?”

 “무슨 커피를 좋아했는지도,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다 기억하고 있잖아.”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갑자기 거름망을 거치지 않은, 하고 싶었던 말들이 멀리 보이는 파도보다도 더 맹렬하게 마음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오고 있었다. 다 기억하지, 물론.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헤어진 걸 몇 천 번도 더 후회했는데. 머리 맡에서 나는 샴푸 냄새가 얼마나 그리웠는데. 내가 네 연락을 받고 가슴이 터질 뻔한게 몇 번이나 됐는 줄 알아? 네가 보고 싶었어. 네가 보고 싶어서. 항상 보고 싶었어. 항상 보고 싶어서. 내가 여기에 왜 왔는데. 왜 왔는데ÿ.

 “할 말이 많은가보네.”

 그녀가 말했다.

 “많지. 하루종일, 밤새도록 해도 모자를 만큼 많아.”

 인형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우연히, 그녀도 같은 순간에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자세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뚫어지게 서로의 동공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시선들의 사투였다. 암묵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들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을 일종의 싸움으로, 심지어는 사투로 생각해도 무방했다. 무기를 먼저, 시선을 먼저 거두는 사람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생사여탈권조차. 과장된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사전적 정의에 따른 분석으로서 그들은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삶의 한 꼭지에서 사랑을 수확하고 그 낱알로 근근이 숨을 쉬는 그들은(그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궁금해?”

 “모르겠어.”

 “그건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인지 모르는 척 하지 마.”

 그녀의 큰 두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옛날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사슴같은 눈망울이었다. 그 산짐승의 안구가 그를 압도했다. 인형은 터질 것 같은 심장의 박동 때문에 호흡이 흐트러지지는 않을까, 말을 더듬지는 않을까 조심하며 말을 골랐다.


 바라던 것이 있었어. 역에서 너를 만날 때부터…, 어쩌면 할리스에서부터. 잘은 모르지만 너도 그걸 바랐다면 참 좋았을 거야. 왜냐하면, 그걸 생각하면서,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참 좋았거든. 그 기분만으로도 살면서 처음으로,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으로, 완전한 어떤 것이 되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어. 아무것도 필요 없고, 그 자체로 완벽한 어떤 것.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지금은 너와 눈을 마주치면서 그게 무너지고 있어. 맞지 않다라던가, 틀렸다던가,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그것 자체가 허물어지고 있어. 그 생각이, 그 마음이, 그것들을 떠받치고 있던 등잔 밑의 어떤 것들이 그냥 오래돼서 무너지고 있어. 그리고, 아니, 그래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어. 온 몸으로 그것들을 억지로 묶을 수도, 그냥 그걸 지켜볼 수도, 아니면 허물어진 것들로 다시 새로운 건물, 예컨대, 개척 교회를 세울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 지금 드는 생각은, 지금 내 기분은, 그냥 무(無)로 돌아가고 싶다는 거야. 그걸 ‘무’로 표현해도 되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지금 내 생각은 턱없이 짧고 가늘지만, 너무 짧고 가늘어서 찢어 없어져도 눈치도 채지 못할 정도지만. 그리고, 그 이유는, 그러니까, 무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는......


*


The Church at Auvers, 1890, 1888 by Vincent Van Gogh


*


 기억은 끝에 가닿았다. 기억은 그곳에서 멈췄다. 달리던 바퀴도 그를 따라 서서히 멈췄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는 조수석의 글로브 박스에서 휴지를 여러 장 꺼내 우선 코를 닦고, 팔에 떨어진 핏방울을 닦고, 옷을 닦고, 핸들을 닦았다. 해안도로를 따라, 말 그대로 바다 바로 옆에 난 작은 시골길을 따라 차를 몰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뒤로도 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안심하고 갓길에 차를 대었다.

 기억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그녀는, 모두 웃고 있었다. 예의를 차리며 수줍게 웃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을이 떠들썩할 정도로, 배가 찢어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 슬프지 않았다. 그런 말을 했었다. 기억 나는 것은 그 말이, 그 말을 하던 장면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파편이 되어 흩날리는 그 웃음은 앞도 뒤도 알 수 없었고 다만 그 자체로 마음을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그는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열린 창문의 틈새로 바닷 바람이 불었다. 그는 네비게이션을 확인했다. 서해안의 절반이 조금 못 되는 거리를 달렸다. 해가 정점을 찍고 호를 그리며 조금씩 내려오는 즈음이었다. 오늘 안에 마을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는 알 수 없었다. 이름도, 위치도 기억나지 않는 그 마을로 그는 기약 없이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을 발견한다면, 그곳에 그녀가 있을 것은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난다. 말도 짧아지고, 마음도 짧아지고, 생각도 짧아지고 있었으므로 그것에 굳이 이유를 붙일 수 있을거다고도 그는 생각하지 않았다.


 피가 멎고, 그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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