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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도 Godot Sep 17. 2024

리사는 다이키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리사는 다이키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이건 회상에 대한 명제다; 바다는 모든 것을 안다(반면 인간은, 바다의 흉내를 내지만, 실은 아무것도 모른다).


*


 바다. 얇게 저민 에메랄드의 빛을 띠고 있다. 태양광선이 새하얗게 질려 수면을 찌르면 창끝이 보석의 사면을 따라 부르르, 퍼진다. 그러면 바다는 요동한다. 광선으로부터 비롯하는 순백의 진동이 시시각각으로 구석구석으로 태고의 용액을 뒤흔든다. …-출-렁-출-렁-…. 흔들림은 끝없는 선사로부터 이어져 멸망까지, 멸망으로부터 다시 끝없는 미래로 촉수를 뻗을 것이다. 우아하게 뻗은 다리의 끝에는 한 치의 번잡함이 없다. 번잡함 없이 흐느적거린다.

 그렇다면 번잡함이 끼어드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사지로 물이 아닌 것이 잡히면서 모든 고뇌가 시작된다. 아주 작아 보잘 것 없는 알갱이들이 젖지 않고 단단해 뇌로 압각을 보낸다. 모래는 유리알을 품은 티를 내지 못해 안달복달한다. 투명하게도 빛난다. 빛난다. 빛이 가닿은 최대한의 선상에 한 알 두 알 나타나는 알갱이들은 흔들리되 고요하다. 이윽고, 삽시간에, 대지가 나타난다. 어두운 해저가 낳은 흰 딸의 저 피부가 실로 거칠해서 고뇌롭다.

 또, 고뇌로운 말을 강박처럼 떠올리는 이의 마음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찰나의 순간으로 언어가 피어난다. 대부분은 쓸모가 없다. 팔지 못한다. 돈이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감언이설로 돈이 되지 않는 걸 돈을 내고 사게 만든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사내에게는 그런 능력 내지는 자질이 없는 모양이다. 한 줌 아니 한 톨의 쓸모는 잊혀진지 오래다. 태어나자마자 숨이 끊겨버리는 종류의 언어이다. 탯줄이 목에 걸린 채로 지상으로 강림한 그 꼴을 달리 교수형 외의 것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교수형은 진귀한 광경이므로 감상을 위해서는 돈을 내야 한다. 사내는 돈을 낸다. 돈이 아니라면 값어치가 있는 뭐라도 좋다. 사내는 지불한다. 그렇게 사 먹은 꽃봉오리들은 맛이 없다.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강습이 끝난 손님들에게 사내는 그들의 이름을 손수 적어 코팅한 ‘명예 다이버증’을 한 장 씩 나누어준다. 명예 다이버증은 돈이 된다. 작은 명함만큼의 크기로 팔 수도 있고, A5 용지의 크기로도 팔 수 있다. 원한다면 A4나 A3 용지의 크기로 인쇄한 후 액자까지 포함해 제법 깔이 나게 팔 수도 있다. 그러나 사내는 손님들이 명예 다이버증의 효용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예 다이버증이 있다 하여 그들이 다른 곳에 가서 “나는 다이버입니다. 파블로가 나를 보증하지요.”라고 하지 않을 것을 생각한다. 사내는 손님들이 명예 다이버증의 그 무엇도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믿지 않을 것임을 믿는다. 스쿠버 다이빙만큼이나 쓸모 없는 저 종이 한 장에 담긴 효용이 그러면 대체 뭘까. 쉬이 생각하기 어려운 주제이다. 사내는 자신의 고뇌 또는 무지를 손님들 앞에 만개한 웃음으로 무마한다. 검게 그슬린 피부 위로 하얗게 쳐바른 선크림보다도 더 기만적인 일이다.

 사내는 죄책감에 사무쳐 몸을 바르르 떤다.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시계를 보면 오후 네 시로부터 조금 앞이다. 사내는 가게를 마감할 준비를 한다. 더운 여름이다. 평소대로라면 한 타임을 더 일하고 오후 여섯 시 쯤은 되어야 게으르게 문을 닫을 준비를 할 것이다. 손님들이 가게 앞에 널어놓은 다이버복을 주워 뒷마당의 빨랫대에 한 장씩 건다. 태양이 기세를 잃지 않고 계속 내리쬐니 삼십 분이면 겉이 바삭해질 것이다. 젖어 무거운 십 수 장의 옷을 다 널고 나면 밀대로 가게 바닥을 닦고, 소금기와 모래가 한데 뒤섞여 나뒹구는 가게 앞으로는 물을 정교하게 뿌리고, 매상을 은행 어플리케이션으로 대충 확인하고, 냉장고를 제외하고 매장 안에 있는 모든 가전의 전원을 내린다. 자질구레한 모든 일을 놓치지 않았는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꼼꼼히 확인한 사내는 카운터 옆에 내려놓았던 작은 백팩 하나를 챙겨 매장을 나선다.

 콘크리트로 사유지를, 아스팔트로 도로를 구획지은 인간의 좁은 땅 너머로 곧게 굽은 너른 사장과 그보다 더 너르고 너르다 못해 너그러운 바다가 있다. 그 위로 하늘이, 그 위로는 태양이. 초라한 인간은 사망의 기로 외에 나아갈 곳이 없다. 사내를 실은 택시가 한산히 제 길을 떠난다. 부릉.


 터미널은 장례식장과 가깝다. 걸어서 식장에 도착한 사내는 부조를 내고, 망자에 예의를 표한 뒤 유족에게 인사를 건네고 저녁 식사를 한다. 다끈한 국과 흰 밥을 먹는다. 핏빛에 가까운 기름진 국물 사이로 육고기와 시래기 건더기가 죽어있다. 그런 따위의 감상을 하며 사내는 홀로 소주도 마신다. 도수가 높은 소주다. 사내는 그곳의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는다.

 식사 공간은 서늘하다.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에어컨의 온도가 가장 낮은 온도까지 맞추어져있다. 그러니까, 실외기로 열을 미친 듯이 뿜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덥지 않으면 누군가가 추울 수 없다. 다소 염세적이고 건조한 마음으로 사내는 판단한다. 이 판단은 짧고 간결하다. 그리고 둘째, 주변인들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사람들이 사내를 다양한 눈으로 쳐다본다. 사내는 눈짓으로, 몸짓으로 그리고 한데 뒤섞여 잘 들리지 않는 음성들의 톤으로 그 저의를 짐작할 수 있다. 이 포착은 길고 심상하다. 책망과 공포, 위협, 조롱 그리고 약간의 경탄이 혼란스럽게 귓가를 간지럽힌다. 그다지 놀랍지 않다. 사내는 이미 몇 번도 더, 이보다 더 심한 말들을 들어 혼란에 내성이 있다. 중요하지 않다. 다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알 한 알갱이에, 국물 한 숟갈에도 느껴지는 혼란 중의 무력함은 생선의 가시처럼 차고 거슬린다. 사내는, 애써, 자위한다. 생선의 가시는 식사에 제공되지 않은 가공의 불편함일 뿐이다. 불편함은 나를 불리하게 할 수 없다. 식도를 건드리는 위화감을 뒤로하며 사내는 소주를 마신다. 주정의 쓴 맛은 희끄무레한 망자의 상으로부터 사내를 멀어지게 하는 훌륭한 수단이다.

 열화한 가시광선. 태양을 닮으려 노력한 LED 소자의 뿌연 빛은 태양의 그것에 비하면 조잡하기 그지없다. 저 빛은 무엇보다도 태양광선의 힘차게 뻗대는 힘을 결여한다. 그런데 천장에 수십으로 달려있는 혐오스러운 LED 등을 나는 왜 보고 있는 걸까? 사내의 자문은 삼 초로 끝난다. 달리 말해 사내가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다시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삼 초가 걸린 셈이다. 고인의 친지로 보이는 남자다. 씨익씨익.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넥타이가 헝클어져있다. 사내가 마시던 국물이 튀었는지 검은 상복 아래로 부자연스럽게 하얀 드레스 셔츠에 더 부자연스러운 자국이 남아있다. 주홍색이다. 그러나 맛있어 보이지 않는 주홍이다. 남자는 당장이라도 사내를 죽일 듯 그를 노려본다. 사내는 남자가 가소롭다. 가소로운 눈이 가소로운 남자를 올려다본다. 올려다봄은 동시에 내려다봄이다. 이런 말을 내포한다: 어디 한 번 해 보시지. 주먹으로 광대를 부숴버리든가, 구두의 뒷축으로 턱이나 갈비를 으스러뜨리든가, 부숴진 나무 의자의 다리 하나로 내장을 터뜨리든가. 네가 뭣도 아닌 놈이라면 무방비중인 고환을 걷어차 몇 초간 숨을 못 쉬게 할 수도 있겠지. 이런 말은 예의에 어긋나므로 내포하지 않는다: 하지만 너는 내 생각을 짐작할 수 없어. 내가 태연히 여길 걸어왔다는 사실을 너의 태평하고 게으른 짐작에 이용하지 마. 남자의 주변으로 다른 사람들이 분을 삭혀주느라 고군분투하는 동안 사내는 주춤주춤 일어난다. 수컷이란 무릇 저런 식으로, 남들이 제 사지를 부여잡고 어떻게든 달래주면 짐짓 뿌리치려고 하면서도 참아준다는 표정을 짓으며, 자기 자신과 자기 주장의 우월함을 공언하려 한다. 웃기지도 않는군. 사내는 국물을 쏟아낸 놋그릇을 잡고 걸어나가 남자의 머리를 세게 내려친다. 깡! 또렷하고 청아한 소리로 남자는 기절하고 제 사지를 잡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그러자 사람들이 정어리떼처럼 몰려와 사내를 제지하고 물리력을 행사한다. 왁자한 폭력의 와중에 사내는 폭소한다.


 혼란이 조금만 더 고조되면 칼에 찔려 죽었을 거라는 순경의 주의를 뒤로한 채 사내는 몇 시간이나 앉아있던 지구대를 걸어나온다. 훈기가 멤도는 밤은 하얗다. 가로등이 밝은 탓이다. 착각일까, 가로등의 빛은 백열 전구의 그것만큼이나 쟁하다. 밑으로 선 사내는 제 모습을 살펴본다. 엉망이다. 모처럼 다린 셔츠가 한껏 구겨지고 더럽다. 수트는 잡다한 것이 튀어 지저분한 것이 발자국도 손자국도 많다. 깨진 소주병에 손도 베여 따갑다. 그러나 굳어 피가 흐르지는 않는다. 행인들은 그를 범죄에 연루된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발걸음을 재촉한다. 

 사내의 뒤로 누군가가 다가온다.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아보니 얼굴이 익숙한 청년이 서있다. 본 적은 오래지만 서로 예의를 갖추어 존대한 청년이다. 청년은 이거라도 입으라며 반팔티를 건넨다. 희다. 사내가 그것을 받아들어 인도 한가운데에서 셔츠를 벗는 동안 청년은 사내의 자켓을 받아들어 얼룩이 묻는 부분을 털어버린다. 행동이 익숙하다. 혼란한 와중에 잊은 백팩을 청년이 건넨다. 사내는 셔츠를 가방에 대충 처박아버리고는 바지께의 지저분한 자국들을 대충 턴다.

 “형, 다시 들어가실 거예요?” 청년이 묻는다.

 “아뇨. 볼일은 다 봤어요.” 사내는 간결하게 답한다.

 “돌아가시나요?”

 “모르겠어요. 내일까지는 가게를 닫아놔서.”

 “와줘서 고마워요. 비록 난장판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예상은 했어요. 그런데, 안 들어가봐도 돼요? 아버님이랑 어머님이 기다리고 계실텐데.”

 “말씀드리고 온 거예요.”

 “설마.”

 “왜요?”

 “그분들은 당신이 저와 어울리는 걸 싫어하실 줄로 알았어요.”

 “그럴 리가.” 청년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잠시 생각하던 사내는 청년에게 말한다. “오랜만에 한 잔 할까?”


 카샤사와 돈 훌리오를 세 잔씩 각자 여섯 잔을 마신 두 남자의 취기는 은근하다. 브라질과 멕시코, 사탕수수와 아가베. 은근한 와중에 피어오르는 중남미의 맛들은 흥건하고도 무미하다. 일견 모순되지만 설득력있는 이 강한 조합을 뭐라 설명해야할까? 서로 다른 주종의 기묘한 결합을 우아하게 설명할 방도를 둘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다. 그러나 취한 뇌는 쓸모있는 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렇다고 웃긴 답을 내놓지도 못한다. 다만 그 사실이 쓸모있고, 웃길 뿐이다. 새벽의 한 와중 남자들은 임시로 그런 결론을 내린다. 왁자하게 웃으며 그들은, 디저트랄까, 칵테일 한 잔씩을 마시고 잠시 도시를 걷기로 한다.

 사내는 다이키리를 주문한다. 그리고 청년은 에스프레소 마티니를 주문한다. 각자의 술이 대비하다.

 “기억나?”

 “눈물 나네요.”

 “둘이서만 마시는 건 정말 오랜만인걸. 십 몇 년은 더 됐을 거예요.”

 “형은 예전이랑 많이 달라졌어요. 반면 난 변한 게 없는 것 같아요. 나만 빼고 세상이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내 모든 건 그대로예요.”

 “그럼 미술 작업은 잘 되고 있어요?” 사내가 묻는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스튜디오를 구하고 있었는데.”

 “성공적이죠. 요즘엔 가족에게 면이 서요.”

 “오.”

 “이번에 전시회를 했는데, 반응이 꽤 괜찮았거든요.”

 “축하해요.” 사내는 진심을 드러낸 칭찬을 건넨다. “정말로.”

 “요새 만나는 사람 있어요?” 청년이 묻는다.

 “흔치 않을걸요. 시골에 처박혀 일만 하는 사람을 좋아해줄 사람은.”

 “관광지잖아요, 그래도?”

 “덕분에 하룻밤 같이 놀 사람은 간간히 있어요.” 사내는 자조적으로 답한다. “아마도.”

 “하긴 그런 식으로 시작했던 거잖아요, 누나랑도?”

 사내는 이 질문의 저의를 쉬이 파악할 수 없다. 나를 비꼬는 건가? 그러나 그가 나를 비꼴 이유도 필요도 없다. 아마도.

 “뭐, 그런 식이었죠. 시작은.”

 “누나는 제게 영웅이었어요, 식상한 말이지만….”

 담담한 어투로 두드린 회상의 문 너머로 과거는 분명 온화하지 않다. 청년의 뒷말을 사내는 기다린다. 하지만 청년은 거기서 말을 끝맺는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사내는 취기의 와중으로 청년이 저의 기저에 있는 무언가를 드러낼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는 대신 청년은 마티니를 음미도 하지 않은 채 단숨에 ‘삼켜버린다’. 그리고 사내는 그것을 목격한다.

 사내는 그가 커피 칵테일과 함께 삼켜버린 무언가를 상상한다. 그런게 있다면, 이라는 단서가 붙지만 어쨌든 취기에 누이를 잃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무너진 청년을 보면 상상은 합당하다. 사실 상상이 합당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 상상하기란 바다 만큼이나 스스럼 없는 자연의 산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쪼개진 보석과 마찬가지로 상상은 파편들이다. 주워모아 제련했을 때는 물론 그저 부서진 그 자체로조차 진리의 어떤 측면을 빛나게 하는 결정이다. 이유가 선행하는 인공물이 아니라, 이유를 갖다붙여야 하는 자연물의 일종으로서 상상을 사내는 주체할 수 없다. 하여 상상한다. 다시, 언어가 피어난다. 청년이 미술을 시작한 이유를 그의 누나와 결부하여 상상한다. 모종의 결핍을 미술이라는 방식으로 해소하도록 지도한 것이 청년의 누나였으리라 상상한다. 어린 청년의 손을 누나가 잡아 드로잉부터, 크로키부터 가르쳐주었을거라 상상한다. 그들이 그렸을 무언가를 상상한다. 오누이는 꽃을 그리고, 꽃에 앉은 나비를 그리고, 나비가 날아온 하늘을 그리고, 구름을 그리고, 구름 위로 난 태양을 그린다. 그리고 그걸 그리는 오누이 자신들을 그린다. 동시에 오누이를 그리는 오누이를 그리는 사내를 그린다. 시덥잖은 말장난에 가닿아 지난한 상상은 이윽고 약간 에로틱해진다. 사춘기의 초입에서 서성이는 어린 아이들은 금기를 알지 못한 채 또는 실감하지 못한 채 친족의 살갗을 은밀하게 훑는다. 우리는 커서 어른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에라도 어른의 행위를 하지 않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러니까, 우리는 어른이다. 그런 서투른 예단이 있다. 또는, 그것은, 토론으로 상호간에 합의된 바이다. 쌍방향으로 시선의 교환이 촉매가 된다. 심장이 빨라진다. 피가 빠르게 돈다. 땀이 난다. 머릿속의 무언가가 마비된다. 어린 아이의 감각이 팽창한다. 감각의 수림에서 이성이란 겨우 싹트기 시작한 기생 식물과도 같아 나무가 뿜어낸 아주 조금의 피톤치드에도 맥을 추리지 못한다. 시들어버린 박초(暴草)의 위로 줄기가 뻣뻣하게 솟는다. 다의적으로, 캄캄해진다. 억수로 떨어지는 한 방울 한 방울의 물로 숲은 춤을 춘다. 투둑, 투둑. 파스스, 파스스. 끝에는 환희가 기다리고 있다. 환희는 사내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건 이입. 은연하다. 폴리아모리. 숲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청년과 사내와 그녀다. 누구도 손을 맞잡지 않은 이가 없다. 그리고 잡은 손들의 힘이 세다.

 다이키리는 이목을 집중시킨다. 연녹색의 액체는 형광의 빛을 띠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테면 후박나무의 그것과도 같이, 깊이 침잠하여 주체할 수 없는 은은한 활엽의 색이다. 가로수의 색이다. 옛날에 그녀와 살던 아파트의 곳곳에 즐비했던 정원수의 색이다. 이제 그것은 혀 끝에 닿아 식도를 타고 따뜻하게 넘어간다. 연하고 맑다. 럼과 라임은 스텝을 밟을 줄 아는 한 쌍의 훌륭한 춤꾼들이다. 사내는 즐거움을 느낀다. 동시에 역함을 느낀다. 상상력에 대한 그의 사회적으로 오만한 맹신은 쉬이 받아들여질 수 없고 비박을 덮어써야 함을 사내는 안다.

 사내는 조금 젖은 눈을 훔치며 청년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가엾어서가 아니다. 그리워서이다.


 사내는 자기 앞의 칵테일을 찬찬히 훑어본다. 초록이 바다의 그것과 흡사하다. 다이키리는 바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바다에 빠지면 죽는다.


 죽은 딸의 전남편이 거나하게 취해 뻗어버린 그의 매제를 등에 업고 장례식장으로 돌아온 것을 본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이건 상상하기의 귀재인 사내로서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문제다. 그들의 눈이 심상하지 않다. 장인의 눈은 분노와 경멸로, 장모의 눈은 걱정과 미련으로 죽어있다. 할 말을 아직 찾지 못해 다만 점잖게 다문 입은 곧은 직선을 그리고 있다.

 “염치가 없는 줄로 압니다만, 매제가 아직 저를 좋아해서 어쩔 수 없이 한 잔 했습니다.”

 “테오를 챙겨줘서 고맙네.” 장인이 말한다.

 “고맙다고요?”

 “그리고 아까는 미안했네. 동생이 딸을 워낙에 아꼈어서 자네를 보고 성격을 주체하질 못했었네.”

 “미안하다고요. 저를 놀래키시는군요. 이제껏 저를 증오하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사내는 비아냥댄다. “제게 뭐라고 하셨었는지 이젠 기억이 나지 않는 겁니까?”

 “기억하네. 다만 생각이 바뀌었지…. 자네, 아직 속이 괜찮으면 나와도 한 잔 나누지 않겠는가? 손님들은 가셨네.”


 얼떨결에 받은 잔을 사내는 두 손으로 공손히 잡아 장인의 잔과 부딪힌다. 툭. 조심스럽다. 도란도란 얘기를 정답게 나눌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취기로 대화를 길게 이어나간다.

 “소주에, 럼에, 데킬라에, 칵테일에 다시 소주. 가게를 하루 더 닫아놔야겠군요.”

 “예전만큼 많이 마셨나?”

 “예전만큼은 못 되지요. 나이도 나이고, 삼십대가 지나고 마흔부터는 기량이 확실히 줄어드는 게 체감이 됩니다. 장인 어른 앞에서 서른이니 마흔이니 하는 숫자를 내세우는게 실례입니다만, 여튼 그리 많이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근데 매제는 여전하더군요.”

 “아직 젊으니 말이지. 나도 마음을 달래려고 최근에는 안하던 술을 조금 했는데, 속이 썩는 것만 같아. 음.”

 “그러고보니 매제의 전시회가 성황리에 마무리됐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몇십 년을 투자한 보람이 있어. 에이전트가 말하기를 해외의 여러 갤러리에서 연락이 왔다더군. 장례가 급작스럽게 잡히지만 않았어도 곧장 미국으로 갈 예정이었다고 들었네.”

 “시신이 태평양으로 흘러들어가지 않은 것만으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말그대로 영원히 찾지 못했을 테니 말입니다.”

 “외국의 해안가라니. 누가 그런 곳에서 발견될 거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옛 장인이 권하는 한 잔의 술. 사내는 공손함을 유지한다. 병을 잡은 늙은 손의 끝이 떨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말로, 아무도 모르게 됐어. 이제사 내 입으로 고백하건데, 자네도 짐작이야 했겠지만, 나는 자네인 줄로만 알았네, 그러니까, 내 딸을…”

 “말씀 안하셔도 됩니다. 이해합니다.”

 “이해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네.”

 재빨리 건내받은 병으로 사내는 장인의 잔을 반만 채운다. 노인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고 사내는 유치한 방식으로 노인에게 서운함을 표현하고 싶지 않다. 둘 다 똑같이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이제 그는 받아들일 수 있다.

 “좋은 이유로 헤어지지도 않은 전남편이 고인이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상대라니, 저라도 납득이 되지 않을 겁니다. 더군다나 친동생과 그랬으니 사는 게 지옥같았던 건 아무래도 저 때문인 게 맞았습니다.” 부글부글 끓는 속. 이제는 이것 역시 받아들일 수 있다.

 “끝난 일이야. 그저 그뿐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산 사람을 원망하기를 멈추기로 했네.”

 “멈추다니요?”

 그가 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은, 그러나, 이런 지점이다.

 “다 알고도 사랑했다는 말을 이제야 믿기로 하셨습니까? 줄곧 그게 영화 대사인 줄로만 아셨어요? 아, 아까 말하신 게 그거였군요?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 사내는 역설한다. “이제껏 제 말을 듣지 않으셨군요. 매제의 말도 듣지 않으신 거예요.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충격적이군요.”

 장인은 말이 없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곤란한 눈치이다. 뭐가 그리도 힘들까? 해야 할 말이 힘든 걸까? 했어야 할 말이 힘들었던 걸까? 사내는 그런 옛 장인이 답답하고, 싫다. 싫다, 는 건 참 오랜만에 드는 느낌이다.

 “그렇네.”

 “절 더러 갑자기 장례식장에 오게 한 이유는, 그럼, 대체 뭐였습니까?”

 “이유는 없어. 있다 한들 자네 앞에서 그런 걸 이유로 들고 싶지는 않네.”

 “아니, 정작 그걸 말해주시지 않는다면 술을 마시자고 하신 건 어째서고요?”

 “미안해서.” 장인의 말은 간결하고 확실하다. “그것 외에 다른 마음이 없네. 미안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야.”

 “그렇다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할 말은 이미 예전에 다 했으니 말입니다. 덕분에 술도 얻어 먹었고, 경찰서도 다녀왔으니 말입니다.”

 “알겠네.” 장인은 옛 사위에게 느끼는 도의로 더는 말을 잇지 않고 일어난다. “아까 식사를 끝내지 못했을텐데, 국이라도 한 그릇 먹고 가게. 말해놓겠네.”


 국의 맛이 변해 사내는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그저 허기를 채운다는 마음으로 사내는 숟가락을 입에 우겨넣는다. 식지도, 이물질이 섞이지도 않은 국의 맛이 변한 이유는 기만을 목격해서다. 사내는 굳게, 세게 그렇게 믿는다.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굳이 사과를 건넨 것은 그가 실제로 미안함을 느껴서도, 사내에게 말해줄 수 없는 비밀을 알아서도 아니다. 몇 년 동안이나 실패를 거듭하다 겨우내 가능성이 보인 매제의 성공가도에 단 한 치의 실패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옛 장인의 어법을 익히 알고 있는 사내에게 그의 말은, 이를 테면, ‘모두 잊자.’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이 뻔하다. 꼭 장인이 아니더라도 그 나이대의 사내들은 대체로 저런 식이다. 썅.

 사내는 숟가락을 내리고 식장을 나서 담배를 피운다. 오랜만이다. 예전에는 그녀의 권유로, 이별과 그 이후로는 오기와 관성으로 피우지 않던 담배다. 그러고보니 셋이 모여서 종종 담배를 피우고는 했는데, 사내는 생각한다. 시가 모양을 흉내낸 진갈빛의 얇고 긴 담배를 한 갑 사서 피우면 열 여덟 개비를 공평하게 나누어 피우고 두 개가 남아 가위바위보를 했던 기억이 난다. 보통 사내나 매제가 지고는 했다. 그녀는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담배의 끝으로 연기는 홀연히 퍼진다. 연기와 함께 옛 기억이 수면으로 떠오른다. 그 모양새가, 양태가 퍽 장례식장의 향과 같아 사내는 피식 웃는다. 뿐만 아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옛 장모의 얼굴이 옛날과 마찬가지로 선연하고 하얗게 질려있다.

 “차비라도 챙겨 가게.”

 장모는 돈 봉투를 건넨다. 그러나 사내는 정중히 거절한다. 받을 수 있는 돈이 아니라는 이유를 대지만 장모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이 불신은 정확한 판단이다.

 “우리 남편이 챙겨주라고 했어.”

 “바로 그것 때문에 제가 받을 수 없는 겁니다.” 그간 있어왔던 일들을 차분하게 설명할 수도 있지만 사내는 단지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으로 친절을 갈음한다. “그 분이 왜 제게 굳이 사과하셨는지 장모님은 정말 모르시는군요.”

 “자네의 생각이야 예나 지금이나 모르지만, 상관 없네. 이건 내 마음이기도 해.”

 “무슨 마음이시죠?”

 “자식이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에게 궁금한 것조차 물어볼 수 없다고 말하려는겐가?”

 “그런 건 아닙니다만.”

 장모는 돈 봉투를 사위의 자켓 안주머니에 억지로라도 집어넣는다. 사내는 짐짓 그녀를 만류하려는 척하며 봉투의 두께를 가늠한다. ‘사과’라고 하기엔 퍽 많다. 성의는 고맙지만, 내가 이러니까 받지 않으려는 거라고요. 이걸 받으면 내가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잖습니까. 더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봉투를 옛 사위에게 쥐어준 장모는 옷매무새를 새침하게 정리한 후 그에게 손을 건넨다. 사내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손을 멀뚱하게 쳐다본다.

 “나도 한 대 주게.”

 “피시게요?”

 사내는 깜짝 놀라 묻는다. 그러나 옛 장모의 시선이 따갑다. 당연한 걸 왜 물어, 라는 눈치다. 저도 모르게 위압감을 느낀 사내는 품에서 주춤, 담배갑을 꺼내 장모에게 두 손으로 개비를 건낸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그는 장모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라이터를 손으로 가린다. 장모는 콜록거리더니 이내 익숙하고 의연하게 연기를 빨아들인다. 사내는 맞담배를 핀다. 그러나 눈앞에 서 있는 늙은 여인의 한숨같은 초연을, 초연의 깊이를 쉬이 가늠할 수 없다. 마치  그럴 수 있을 줄로만 안 것처럼 그는 당황감을 느낀다.

 “고맙네.” 장모의 목소리에는 장인의 그것과는 달리 옅고 투명한 마음이 느껴진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누가 처음이었나? 내 자식들과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장인 어른이나 매제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내는 되묻는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장모의 눈에 어떤 열기의 불똥이 아른하다. 사내는 짐짓 보지 못한 척하고,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며 순서를 정리한다. 초로의 여성으로부터 느껴지는 권위가 순순하다. “우리 집안 남자들은 어떻게 된 건지 제 안사람을, 제 어미를 바보나 천치로 알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아.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아니면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 여적 그렇게 살아왔으니 이제사 불만인 건 아니지만.”

 “아내가 그런 얘기를 하고는 했었죠.” 사내는 고개를 끄덕인다. “매제였습니다.”

 “언제부터?”

 “글쎄요. 이제는 가물가물합니다만 대학교에서부터였을 겁니다. 동아리에서였죠. ‘아마도’ 봉사 동아리였는데 제가 회장이었고 매제는 신입 부원이었습니다. 우리는 빠르게 친해졌어요. 단둘이 술을 마시기도 하고 여행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즈음이면 매제에게 제 이름을 몇 번 들어보셨을 겁니다.”

 장모의 입은 굳게 닫혀있다. 눈도 깜빡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내는 안다. 저건 허세다. 현실의 날카로운 파도가 테트라포드를 조금씩 깎아내리고 있다. 아니. 방파제가 드러난지 이미 오래다. 그녀는 이미 너무나도 고통받았고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방파제에 출입을 금지하는 것,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도,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 어떤 몸부림 뿐이다.

 “졸업을 하고 저는 바다로 갔습니다. 부모님이 계실 적에 바닷가에서 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우연한 기회에 여행으로 들른 그곳의 파도에 제 마음을 빼앗겼거든요. 매제에게 같이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고 동업을 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매제는 언제고, 언제까지고 미술에 전념하고 싶어했거든요. 그래서 우린 자연스럽게 헤어졌어요. 한 몇 년은 열심히 일만 하고 바다에서의 삶을 즐기느라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아무와도.”

 사내는 그때를 호시절로 추억하며 회상한다. 회상은 천연덕스럽고 그 자체로 행복하다. 사내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조금 솟는다. 미묘한 정도다.

 “그러다가 매제가 나를 찾아왔어요. 어떤 여자와 함께였죠. 아내였어요. 저는 처음엔 매제의 여자친구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날 저녁, 스쿠버 다이빙을 마치고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서야 매제의 누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어요. 왜냐하면 매제는 자주 자기 누나를 신격화하고는 했거든요. 누나가 이걸 했느니, 누나가 저걸 했느니. 얘기를 듣다보면 온갖 과장된 표현이 총동원되고는 했으니 저로서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요. 장모님껜 우스운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도 매제의 누나를 일종의 신화적인 무언가로 생각하고는 했습니다. 아름답고, 머리가 좋고, 손재주가 뛰어나고 수영과 달리기를 잘 하는, 그러니까, 아마조네스 같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사람이 저와 술을 먹다니! 감격스러웠고, 관심을 끌고 싶었어요. 맞습니다, 처음부터 저는 매제에게도, 그녀에게도 호감이 있었습니다.”

 사내는 담배를 밟아 불을 끄고 새 개비를 꺼내 문다. 그는 장모에게도 담배를 권한다.

 “그녀는 매제를 통해서 저에 대해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뭘 하는지, 뭘 했는지. 뭘 공부했고, 뭘 좋아했고, 뭘 싫어했는지를 줄줄이 외우더군요. 무엇보다도 그녀는 저의, 말하자면, ‘본성’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본성?”

 “저는 무시로 사는 사람입니다. 무시로 불쑥 나타났다 불쑥 사라지는 종류의 사람이 바로 저란 말입니다. 누군가는 저를 한량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저를 더러 한심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전 어딘가에 뿌리를 박은 존재가 아니니까요. 뿌리를 박는 게 허락되지 않은 인간이니까요. 이를테면 저를 야만인으로 이해하시면 꼭 맞습니다. 아시죠?”

 장모가 고개를 끄떡인다. 알고나 끄덕이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럼요. 하지만 제가 하려는 말을 온전히 알아듣진 않으셨을 겁니다. 저도 그걸 이해합니다. 야만인은 다른 야만인에게조차 야만인인걸요. 장모님, 운명을 믿습니까? 그렇게 사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도록 태어났어요. 저는, 요즘 들어서야 ‘자유롭다’, ‘개방적이다’, ‘오픈되어있다’ 라고들 친화적으로 표현하고 근사한 영어식 표현도 있습니다만, 장모님 때에는 ‘음탕하다’, ‘더럽다’, ‘역겹고 지저분하다’ 따위의 말로 더 많이 들어본, 그런 종류의 사람이 맞습니다. 실은 요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게 통론이고 정설입니다만.” 사내는 말한다. “어쨌든 저는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저의 호감을 뿌리치지 않았지요.”

 ‘다 알고도 사랑했다’, 그 말의 밑에 그런 의미가 있다는 걸 장모가 알기를 사내는 바란다.

 “매제도, 그녀도 납득하고 저희 모두 합의한 부분이었습니다. 한사코 말씀드렸던 부분이지만, 가슴 아프게도, 그녀가 죽은 건 그녀의 극단적 선택이었고, 아이를 유산하고 그녀에게 생긴  우울증이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었습니다. 메신저에서 두 분이 읽으신 우리 셋의 관계는 아무런 이유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그런 걸로는 충격받지 않는,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 건강한 아마조네스였어요.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녀가 강했기 때문에 우리가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헤어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야만인이기 때문에 그녀는 제 아이를 낳지 않았고, 제 곁에 끝내 머물지 않은 겁니다. 이게 제 숙고의 결론입니다.”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네.” 파르르 떨리던 장모의 손은 힘을 잃고 담배를 떨어뜨린다. “이해할 수 없어. 자네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본성이니, 야만인이니 하는 말들이 대체 다 뭔가? 우리 아이가 그런 자네와 왜 사귀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려 했던 건가? 알고도 그랬다는 건 말이 안 돼. 거꾸로면, 거꾸로면 몰라도ÿ”

 “애석하게도 장모님에게 그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

 “해봤자 이해하지 못하시니까요.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제 설명 부족도, 장인 어른의 아집도 장모님의 무지도 그 이유가 아닙니다.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예요. 그저 우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뿐입니다. 제 남은 평생과 장모님의 남은 평생을 합친 만큼동안이나 설명할 수 있겠지만, 설명해도 모자를 겁니다. 성에 차지 않으실 겁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그 말은 장모님에겐 제가 만든 명예 다이버증 같은 조잡한 변명으로밖에 들릴 수 없습니다. 이 말조차 이해하시기 어렵다면 그저 옛 사위가 조리있게 말을 잘 못한다든가, 또는 미쳐버린 걸로 이해하세요. 그 편이 훨씬 수월할 겁니다.”

 담배는 땅에 떨어져있다. 그리고 떨어진 채로 조금씩 타들어간다. 붉고 밝다.

 “장모님, 전 해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언제고 전화나 편지를 하신다면, 아니면 가게에 아내가 좋아하던 술이나 한 잔 하러 찾아오신다면, 예의를 갖춰 대하겠습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 언젠간 리사의 뒤를 따라갈 운명이니.”

 “하지만 그건 설명이 되지 못해.” 장모가 위태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한다. “그건 설명이 되지 못해ÿ.”

 실은 예전에 설명을 드린 적이 있어요, 라고 사내는 말하려다 만다. 옛 장인과 옛 장모 둘 다 같다.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이건 고약한 농담과도 같으니까. 지저분하고 음탕한 사랑이 바라는 전부였다, 는 걸 받아들일 순 없을 테니까.


 힘든 밤이 가고 동이 튼다. 여명은 의심스럽다. 모든 것이 잠과 낮의 경계를 서성인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 혼절한 상주를 장례식장에 데려다놓고 조용히 빠져나온 사내는 문득 어젯밤 채 다 마시지 못한 술이 생각나 어제의 그곳으로 무심한 걸음을 옮긴다. 터-벅-터-벅. 둔탁하고 성의 없는 한 켤레 한 켤레의 내딛음은 제 갈 길을 알지도 못하는 듯하다. 문득, 사내는 깨닫는다. 다이키리는 없다.


*


 리사는 다이키리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게 처음 한 말이었다. 몇 년 만에 만나고서 ‘반가워’ 라든가, ‘오랜만이야’ 라든가 하는 말을 할 수는 없을까. 무엇보다도 럼이 없었다. 하지만 파블로가 럼이 없다고 말하자 리사는 순순히 다이키리를 포기했다. 아쉽네, 자기가 만든 건 참 맛있었는데.

 “잘 지냈어?” 파블로가 말했다.

 “나야 잘 지내지.” 리사가 답했다. 하지만 파블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모습은 초췌하고 창백했으며, 손목에는 날카로운 무언가로 손수 그어 만든 자국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블로는 믿고 싶었다. 언제고 그는 행복을 빌어주고 싶었다. “그럼 여기 온 건, 그게 먹고 싶어서야?”

 “자기가 만들어주는 다이키리가 제일 맛있었지.” 리사가 파블로의 너스레에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야. 다이키리는 맛있지만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해. 스쿠버 다이빙은 재밌지만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하고, 바다가 아름답지만 그것도 이유가 되지 못하고, 이 가게도 당신도 그립지만 그것 역시 이유가 되지 못해.”

 “그럼?”

 “내 다이버 수트, 아직 있어?”


 리사는 몰고 온 차에 수트와 스노클을 실었다. 체증이 내려가기라도 한 듯 표정이 한결 후련해보였다. 파블로는 섭섭했다. 우울증으로 입원한 리사와 이혼한 후 몇 년 동안 소중하게 보관해온 다이빙 수트였다. 이제 원래 주인에게 그것을 돌려줘야 할 때가 되었고, 그건 곧 생의 어느 챕터가 끝났다는 선고와도 같았다. 물론 그런 게 숨을 쉰다거나, 밥을 먹는다거나 다이빙을 한다거나 할 때에 어떤 영향을 주지는 않을 테지만.

 “어딘가 여행이라도 가는 거야?” 파블로는 리사에게 담배 개비를 건네며 못내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다로.” 리사는 파블로가 가려주는 불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리사의 냄새가 파블로의 코를 간질였다.

 “바다? 왜?”

 “당신은 바다를 좋아했었지.” 리사는 수수께끼를 내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나도 알고 싶어서, 당신이 뭣때문에 바다를 좋아하는 건지. 순전히 그것만을 위해서 난 바다로 가.”

 “그런 거라면 다이키리를 마시면서도 얘기할 수 있을텐데.”

 “하지만 럼이 없다면서?”

 “그거야 같이 사오면 될 문제야. 가까운 주류 마트가 차 타고 삼십 분 거리긴 하지만.”

 “됐어.”

 “이봐, 리사. 정말 괜찮은 것 맞지? 그러니까, 잘 지낸다는 말, 진심으로 한 말 맞는 거지?”

 “물론이지.”

 리사는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파블로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파블로는 그 말을 믿지 못했지만,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서 차를 타고 여기까지 오기란 족히 몇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무엇을 위해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단지 다이빙 수트 하나 때문은 아닐 거라는 게 파블로의 추측이었다.

 피어오르는 불안. 화재의 연기처럼 틈을 비집고 다가오는 유독함. 파블로는 손을 뻗어야만 할 것 같았다. 손을 뻗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잘 있어.”

 “리사.”

 “응?”

 “우린, 아직 친구지? 당신과 나, 그리고 테오.”

 그 말은 무엇을 바란 말이었을까. 지금도 제 의중을 수 없는 말을 파블로는 했었다.

 “그럼.”

 “다음에도 들러.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실 수 있게 럼을 준비해놓고 있을게.”

 “그럴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 당신에 대해서도, 테오에 대해서도. 알잖아, 말로는 관심이 없다고 해도 난 항상 관심이 많은 것.”

 파블로는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위해서였다. 리사는 그 손을 얼마간 멀뚱, 쳐다보더니 그냥 뒤돌아 나갔다. 5~6초 남짓한 시간, 억겁 같은 찰나였다.


 리사의 차가 지평선의 도로를 따라 점점 사라져갔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리사가 어디로 떠났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말로, 아무도 모르게 된 것이다.

 억지로라도 잡을 걸, 하고 파블로는 생각했다. 아쉬움으로 끝나기만 하면 좋을 마음이었으나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파블로는 괜찮았다. 리사가 다 알고 사랑했다면, 파블로도 다 알고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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