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음 Mieum Mar 08. 2022

15. 미러링, 모든 상황에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뒤집는다고 고스란히 뒤집히지 않기도 한다


(*본 글은 청소년혐오, 장애혐오, 여성혐오 등 다양한 실제 혐오 발화 예시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 14화 주제가 <미러링 이후를 상상하기>였는데, 미러링의 한계점에 대해서만 어느 정도 조명했던 것 처럼 쓰긴 했으나 사실 난 여전히 미러링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단지 첨예하고 섬세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미러링 전략은 ‘현실’을 눈치채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현실을 보여주는 렌즈 역할을 한다. 자극적이지만, 맞는 말을 한다. 표현이 센 것 같고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결국 자세히 톺아보면, 맞는 말을 한다.  



 정희진 저자는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사회적 약자는 ‘인식론적 특권’을 가진 존재들”이라는 표현을 쓴다. 내가 좋아하는 표현인데, 여러 층위로 기울어져 있고 나뉘어져 있는 이 사회 구조는 해당 사회 구성원들이 이 기득과 계층을 잘 보지 못하도록 가려진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불평등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쉬운 입장은 ‘약자층’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약자는 인식론적 특권을 가지고 있고, 이 사회를 조금 더 나은 곳으로, 평등한 곳으로 이끌어 가자는 운동의 주체가 되기 더 쉽다. (비장애인 시스 헤테로 남성 중심의 정상성규범적인 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장애인, 동물권자,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있는 이유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면 알 수 있듯 약자성을 가진 모두가 인식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회적 약자성을 가진 본인 자신들이 먼저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미러링’이다. 말하자면 그 동안 여자니까 당연하다 느껴졌던 말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하고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미러링은 “남성 중심적 구조에 깃든 일반적 서사를 낯설게 하고 단숨에 해체하는 패러디 수행”이며, "여성이라는 규범적 정체성이 얼마나 불합리한 기반 위에 있는지 폭로하는 과정"이다. (류진희,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이토록 패러디적 역할을 하며 동시에 저항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미러링 전략, 또한 약자들에게 ‘인식론적’으로 본인 계몽을 하게끔 도와주는 이 미러링 전략. 하지만 늘 말도 많고 탈도 많다. 표현이 너무 거칠다느니, 여자들이 쓴 글이 아닐 것이라느니, 저런걸 쓰는 사람들은 ‘남혐’을 하는 여자들일거라느니, 혹은 미러링은 남성성 전복 뿐 아니라 다른 약자성에 대한 혐오까지 재생산하기 때문에 쓰면 안되는 전략이라느니, 그러면서 한편 미러링의 다음 단계를 고민하기에 비판하는 사람들까지.  



 어쨌든 그렇다면 모든 ‘약자성’에 대해 뒤집기만 하면 미러링은 성공할까?  

 오늘은 이 미러링 전략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닌, ‘미러링을 해도 소용 없는 표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01. 혐오는 한 가지만 하지 않는다. 



 혐오 발화가 2가지 이상 섞여 있는 혐오 표현일 때는 어떨까? 다른 혐오 부분도 미러링할 것이 아니라면, 또 다른 약자성에 대한 혐오를 재생산할 뿐이다.       



구글 검색엔진에 '룸나무'를 검색했을 때 등장하는 이미지들.  



 가장 간단한 예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노출이 많은 옷을 좋아하며 몸매가 좋아 미래의 성노동자가 될 것 같다는 비유를 받는 10대 청소년 여성’을 지칭해 ‘룸나무(룸싸롱+꿈나무)’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지독한 여성혐오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동시에 청소년 정체성에 대한 모욕적 발언이기도 하다.   




장애가 있는 여성을 바라보는 비장애인/이성애자 남성적 시각.



 또한 ‘장애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어떠한가? 온갖 성적 대상화가 되어 거론될 뿐 아니라 ‘수동적이고 나약한 존재’, ‘무해한 존재’, 심지어 섹스를 할 때도 ‘비장애인과는 좀 뭔가 다를 것 같은 존재'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는 비장애인 남성들의 이런 표현들이 넘쳐난다. 이 역시 여성혐오와 장애인혐오가 만나 발화된 표현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성소수자혐오 (편견) 와 여성혐오가 만난 경우도 다반수다. 호모포비아들은 여성 동성애자 (레즈비언)를 ‘가위충’, ‘보빔충’ 등의 비하용어로 지칭하는데, 이 역시 여성혐오만 발화된 표현이 아니며 퀴어포빅 (성소수자 혐오적) 표현이 드러나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이런 다양한 약자성 혐오를 포함하고 있는 혐오발화는 미러링하기에 애매하다. 여성 청소년을 비하하는 말인 ‘룸나무’를 전복하기 위해 ‘한남유충’을 써봐야, 여성혐오 부분만 전복되었을 뿐 청소년혐오 부분은 여전히 재생산되었다. 게다가 사실 인권 감수성 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남성 청소년들은 ‘청소년’이라는 정체성 때문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특정 생각과 행동양식 등의 아비투스를 획득했을 것이다. 같은 청소년인 여성 청소년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인권 감수성이나, 그들이 하는 ‘남자짓’들이 그 이유를 뒷받침해준다. 그렇기에 그들이 ‘유충’임을 욕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그들이 ‘한남’임에 집중하는 것이 더 전략적으로도, 논리상으로도 맞다.  



 또한 ‘장애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성적 대상화하는 것을 미러링하기 위해 ‘남성 장애인’을 성적 대상화하는 글을 쓰는 것 역시도, 장애 혐오 부분은 건드려지지 않고 오히려 단지 비장애인으로서 혐오발언을 한 사실만이 남는다. 성소수자혐오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혐오에 전복적 의미를 갖고 대항하기 위해 미러링 용어를 쓰는 여성들이 아무리 ‘똥꼬충’, ‘기갈게이’ 등의 남성 동성애자 혐오발언을 해봐야 그것은 비퀴어적 시각에서 혐오발언을 한 것 뿐이지, 여성 전복 미러링으로서의 효과는 이미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남자들은 비하용어를 쓸 때 이것 저것 안 따지고 만들어서 했을텐데, 여자들이 미러링을 할 때 마저도 혹 내가 건드리고 있는 것이 ‘남성성’만인지 이런 저런 것들을 따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여자들은 남 눈치를 좀 덜 볼 필요가 있다"는 반박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이 진흙탕 싸움인지, 상황의 개선인지 그 목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남성성 위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현실을 꼬집어 내어 알리는, 페미니즘의 대중적 접근이 아닌 단순히 재미만을 위해 ‘미러링'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컨셉 사회’에서의 역할극 놀이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된다. 상상 속에서 그저 남성이 아닌 여성이 더 ‘가모장적인’ 사회, 가상의 이갈리아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노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뜻이다. 아마 이갈리아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꼭 지금 이 사회처럼 남성혐오 뿐 아니라 남성 청소년 혐오, 장애 남성 혐오, 성소수자 남성 혐오가 득시글한 세상일테니까. 



 또한 “아무리 우리가 성소수자, 장애인 등 챙겨봐야, 여성 인권이 제일 낮으니 챙길 필요 없다.” 고 주장하는 반박도 있는데, 인권은 날실과 씨실처럼 다양하게 얽혀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렇게 줄을 세워 평가하기는 어려운 개념이다. 물론 다양한 상황에서 젠더 권력이 아주 많은 것들을 뛰어 넘는 순간들을 많이 마주했지만 (예컨대 교사와 학생 간의 큰 격차에서도, 여교사와 남학생이라면 젠더 권력은 작동한다.) 그렇다고 다른 약자성을 이것 저것 배제하거나 혐오하며 가는 것은 인권 운동의 본질을 흐리는 행동이며, 지속 가능한 페미니즘을 하는 데 방해가 된다. 당장의 유희와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감정의 방향이 가는 쪽 보다는 더 옳은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맞지 않을까. 





 02. 뒤집어도, 혐오일 때가 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 가끔 어떤 말들은, 거꾸로 뒤집어도 여성혐오적이다. 권김현영 저자가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2020)>에서 “페미니즘은 피해자 비난에 저항하면서 또한 피해자 여성들에게 그 피해가 얼마나 불가역적인 고통을 안겨주는지를 강조하며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방식 (‘성폭력은 영혼을 살해한다’ 식의 수사)도 모두 경계한다. 피해 자체를 또 다시 구경거리로 소비하는 타자화에도 단호하게 반대한다.”라고 말했듯이 페미니즘은 굉장히 섬세하게 다뤄 나가야 할 영역일 때가 있다. 단순히 “여자들은 좀 멍청해서 이런 걸 이해 못한다니까.” 를 뒤집어서 “남자들은 좀 멍청해서 이런 걸 이해 못한다니까.” 라고 바꾼다고 해서 페미니즘적인 미러링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히려 후자의 표현은, 이 사회에서는 다른 방향에서 또 다시 여성혐오적 표현으로 읽힌다.  


A - “아무래도 여자가 남자보다 똑똑하긴 해.” 

B - “아무래도 남자가 여자보다 똑똑하긴 해.” 


 위 발화를 보자. A 발화는 보통 ‘뭔가를 잘 못하거나 하기 싫어하는 남성들을 옹호하고 감싸줄 때’ 많이 쓰이고, B 발화는 보통 회사나 비즈니스와 같은 공적 영역 등에서 여성들을 ‘남성들의 자리에서 배제시킬 때’ 많이 쓰인다. 단어를 바꾼다고, 뜻도 온전히 뒤집어지는 미러링 문장이 아니다. 가끔 미러링 문장들을 만들거나 읊고 있노라면, 종종 가정을 꾸린 중년 여성들의 대화와 얼핏 비슷할 때가 있다. (아주 쉬운 예시로 "딸이 아들보다 나아~" 가 있다.) 분명 표면상으로는 여성이 아닌 남성을 비하하는 표현들 같은데, 이 발화들도 결국 페미니즘적인 발화가 아닌 여성혐오적 맥락으로 읽힌다. 이는 말 자체가 모든 맥락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말’을 함으로써 세상을 가부장제로 만들어 온 게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를 살아 오며 그 속에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니. 


 “에이, 남자들은 아무래도 좀 그런 걸 잘 못한다니까.” 

 “남자들은 멍청해가지고 이렇게 다루면 된다니까~”  

 (남자들은 둔해서 집안일이나 대화 같은 걸 잘 못하니까 여자들이 해줘야 한다. 성역할 강화, 남성들의 게으른 사적 영역 진출에 대한 수용.) 


 “여자들이 더 짱이다! 집안 대들보!” 

 “그래, 아들 낳아봐야 소용 없어! 딸이 최고다!”

  (여성이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 내에서의 '딸같이 구는' 성역할을 수행했을 때만 가능한 표현. 오히려 딸이 일찌감치 자기 살 길 찾아 독립하면 ‘딸 같지도 않다’는 소리 듣는다.) 

 

 이런 경우는 ‘맥락’상으로 미러링을 시키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겠는데, 사실 언어라는 것이 그렇게 고차원적인 맥락에서만 읽히도록 섬세한 콘텐츠이기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오독의 여지가 아주 충분하다는 의미다.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의 경우, 같은 대사가 나오더라도 충분히 ‘가모장제’적으로 읽힌다. 그것은 책 한 권, 소설 전체가 미러링된 사회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미러링 발화 전략을 사용하더라도, 그것을 뒤집었을 때 역시 여성혐오적으로 읽히지는 않는지 충분히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중년 여성들의 대화들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남자를 비하하는 것 같아 보여도, 사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용인이 될 정도의 ‘반란적인’ 발화가 아닐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오히려 반대의 의미로 해석되어 360도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화법이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유의하는 것이 좋겠다. 더 유의미한 미러링 전략을 위해서.






작가의 이전글 14. 미러링 이후를 상상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