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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음 Mieum Apr 18. 2022

22. 특이하다는 것에 대하여

떠오른 것에 대해 혼자서만 생각하는 미덕, 그런 게 필요하다.



“솔직히 말해서 평범한 스타일은 아니시잖아요, 남들의 시선이 신경쓰였던 적은 없어요?” 

“네가 객관적으로 특이하니까, 특이하다고 하는거야 남들도.” 


 둘 다 최근 2주 안에 들었던 말들이다. ‘특이해 보이고 싶어서’, ‘남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어떤 스타일을 선택한 적은 없다. 단지 남들의 시선이 크게 신경쓰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스타일을 하고 다닐 뿐인데도 종종 듣는 말들이다.  


 사실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20대 초반까지도 내게 큰 고민은 아주 낮은 자존감이었던 적도 있다. 중고등학생 시절엔 유독 숫기가 없었고, 같은 학교의 친하지도 않은 남학생들의 잦은 외모 지적 괴롭힘에 시달렸던 터라 외모 컴플렉스까지 심하게 있었어서 단지 지하철 내에서 칸을 이동할 때조차 무심결에 느껴지는 타인의 시선까지도 고민이었다. 혼자 밥도 못 먹고, 은행이나 병원에도 가기 힘들었다. 그런 경험들에 고생을 많이 했던 기억도 있는터라 나는 지금의 내가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 된 것에 정말 크게 감사하며 살고 있는데, 왜 이제 와서는 자꾸 남들이 내게 ‘특이하다’, ‘남들 시선은 신경 안쓰이냐’고 묻는걸까. 


 자존감도 낮고 외모 컴플렉스도 심해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스타일을 하고 살다가, 20대 중반이 되면서 다양한 마음챙김 등을 하며 조금씩 자존감과 자신감을 찾았었다. 스물 여섯살, 머리 끝부분에 탈색을 하고 핫핑크색 물을 들여보기 시작한게 처음이었다. 처음에 머리 하고 나왔던 날, 남들 시선이 눈에 띄게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 핑크 투톤머리가 썩 마음에 들었던 나는 스물여덟살 초반까지 1년 반정도를, 머리가 길고 길어 허리까지 닿을때까지 계속해서 핑크색 충전염색(!)을 해주며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더 이상 나의 외적인 요소들에 의해 사람들이 쳐다보고 언급하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그 경험은 생각보다 괜찮았던지 최근엔 더 파격적인 시도까지 나아갔다. 작년에는 늘상 오가며 유지해 오던 단발머리와 긴 머리를 넘어 처음으로 투블럭 숏컷으로 머리를 잘랐고, 올 한 해 동안에는 그 짧은 머리를 탈/염색 하여 진한 빨간색, 적보라색, 파란색, 초록색, 갈색, 핑크색, 노랑/파랑 반반 머리까지 다양한 색상으로 하고 다녔다. 게다가 눈썹 피어싱과 입술 피어싱, 귀에도 다닥다닥 조밀하게 여덟개의 피어싱을 했다. 원래부터 점이나 다크서클, 보조개 등 포인트가 있는 얼굴을 좋아했기에 이런 스타일이 썩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이 되자마자 나는 끊임없이 ‘특이하시네요’, ‘화려하시네요’ 등의 소리를 들어와야 했다. 



특이하다. 


 ‘특이하다’는 말 자체는 언뜻 보면 가치판단이 없는 발화같다. 사전적 의미 자체가 ‘이상하다’, ‘나댄다’, ‘망측하다’와 같이 부정적 어감을 띄는 말도 아니고, ‘특별하다’, ‘매력있다’ 처럼 긍정적인 어감을 띄는 말도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 것이나 보통 상태에 비하여 두드러지게 다르다, 이것이 ‘특이하다'의 사전적 의미다. 그냥 평범한 보통의 것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실 특이하다는 발화가 나타나는 상황들을 살펴보면, 이는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어 규정하고 상대방을 재단하는 아주 폭력적인 가치판단의 상황인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쉽게 어떤 것을 ‘특이한 것’이라고 규정내리고, 내가 경험하며 살아왔듯 당사자에게도 “특이하시다" 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에 나는 늘 하는 대답이 있다. 특이성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 공간적, 그리고 구성원들의 맥락 등에 따라 정말 가변적인 개념이라고. 절대적으로 ‘특이한 사람’이라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예컨대 얼굴에 피어싱을 많이 하고 염색을 화려하게 한 나같은 사람이 교회에 가면 눈에 띄게 특이하고 화려해 보일 수 있겠지만, 이 상태로 이태원이나 홍대에 가면, 아니 특정 SNS 공간에서만 봐도 아무도 우와 하면서 다시 쳐다볼만큼 특이한 사람이 아니게 된다. 또한 우리 엄마도 예시가 될 수 있는데, 한 쪽 귓볼에 두 세개씩, 양 쪽 모두 귀걸이를 한다. (내가 7살 때 귀 뚫는게 무섭다고 도망가 버려서 엄마가 대신 뚫었다고 한다) 이는 20여 년 전 199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굉장히 ‘특이하고’ 진보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아니, 객관적으로 봐도! 특이하니까 특이하다고 하는 거지. 이건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남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걸요?” 

 그렇기에 이 말은 잘못된 말이다. 우선 상대방에게 하는 ‘특이하다’는 평가를 하는 것은 절대적인 개념일 수가 없는 상대적인 개념이며, 객관적인 개념이 아닌 본인의 배경이나 경험, 가치관 등에 의거해 만들어진 주관에 의한 판단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공간, 이 상황, 이 시간에서만큼은 당신은 특이한게 맞겠군’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치더라도 당사자에게 “당신 특이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단 하나의 저의밖에 없다. 너는 지금 정상성에서 벗어나 있다고 알려주는 알림의 역할.  


 친구나 가족 등 가까운 사람이 말했을 경우 여기에는 ‘그러니까 너 특이하게 굴지 말고 고쳐라, 비정상적이어 보인다’라는 함의를 추가로 담고 있기도 하고, 지인이나 행인, 직장 동료 등 비교적 지적을 할 만한 관계가 아닌 경우에도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너는 지금 정상성에서 벗어나 있는데, 알고 있니?”라는 알림의 의미를 최소한 담고 있다는 뜻이다. 즉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규범과 이를 당사자에게 알리는 행위 자체기에 상대방에게 특이하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폭력적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 나의 경우 ‘특이하다'는 평가에 아무렇지 않아지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존감이 매우 낮고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며 정상성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던 시절과 경험이 있기에, 오히려 지금 나를 향한 그런 시선들과 평가에 명명과 정의를 내릴 줄 알게 되었고 더더욱 저항할 수 있는 자아의 힘이 생겼다. 하지만 그런 나 자신에게 감사한 것과 별개로, 여전히 세간의 그런 말들이 떠돌아 다닌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작지만 새로운 스타일의 변화에 도전한 누군가의 자아감으로부터 용기를 빼앗아버리는 일이다. 아 나는 특이한 거구나, 남들이 그래서 자꾸 쳐다보겠구나, 우리 엄마(혹은 누군가)가 나와 다니기 부끄러워 하지 않게 내일은 하지 말아야겠다 등등. 하고 싶어서 한 도전이었을텐데도 그런 특이하다는 평가에 자꾸만 개인들은 평범해지는 것이다.  


 참 우습게도, 그래놓고 사람들은 <한국인들은 타인의 시선을 너무 신경쓴다>며 마치 민족의 특성인 양 쉽게 이야기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전자로부터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게끔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자라나고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래서 우리에게는 누군가 하고 다니는 것이 특이하다고 생각이 들어도 그냥 혼자 속으로만 생각하는 미덕, 그런 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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