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다녀왔다. 스페인 여행 이후로 남편과 단 둘이 떠난 여행은 오랜만이었다. 파리를 네 번이나 다녀오는 동안 런던은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다는 조금은 이상한 이유와 납득하기 어려운 아쉬움이 ‘비싼 물가’라는 여행지로서 치명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했다. 오랜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 자체가 금지되었던 암울한 시절에서 벗어난. 해방감은 여행에 생기를 더했다.
뭐든 이력이 쌓이다 보면 요령이 생기기 마련이다. 스페인 여행 당시, 이민이라도 가는 줄, 착각할 정도로 엄청나게 큰 캐리어 덕분에 여행 내내 짐꾼으로 전락한 남편의 잔소리는 여행이 끝나고 나서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되새김질하는 통에 나를 무안하게 했다. 실제로 여행 중에는 가지고 간 짐의 반도 필요치 않음을 깨닫게 되어 이후로는 짐의 양이 눈에 띄게 줄었다. 직장인으로서는 꽤 긴, 보름간의 여행이었지만 짐은 단출했다. 각자 하나씩 적당한 크기의 캐리어 하나면 충분했다. 그동안 여기저기 다닌 여행의 이력은 무시 못할 학습효과를 낳았던 것이다. 시간 단 위로 세밀하게 계획을 세웠던 것과 달리 숙소와 기차표만 예약하고 꼭 가 봐야 할 곳 몇 군데만 정한 뒤 나머지는 모두 공란으로 남겨두었다. 그때 그때 사정에 따라, 혹은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양 떼처럼 생각 없이 남들 가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대신 나만 아는 장소, 내가 발견한 맛집 같은 숨은 보석을 찾아다니는 여행이 훨씬 더 값지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아침 산책 길에 만난 이름 모를 야생화, 도로를 횡단하는 다람쥐의 부지런한 눈빛, 길을 잃고 잘못 들어선 골목길에서 인생 가게를 만났을 때의 흥분은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벤트다.
아이들의 추천으로 이번 여행에서는 ‘트래블 카드’라는 걸 처음 사용해 보았다. 결재는 물론이고 전철, 버스 등 대중교통에 모두 사용가능해서 따로 교통카드를 만드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었고 환전도 필요 없을 정도로 유용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만나는 사람마다 트래블 카드를 추천하기에 바빴다. 누가 보면 카드사 영업사원이라도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구글 앱과 스마트 폰, 트래블 카드라는 여행 3종 세트만 있으면 지구상 어디라도 못 갈 데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점점 편리해지고 있다.
챙이 넓은 모자, 화려한 프린트 원피스로 대놓고 여행 가는 티를 냈던 예전과 달리 헐렁한 청바지와 셔츠 하나로 기내에서의 밤을 준비한 것도 이전과 달라진 변화라면 변화였다.
여행의 시작은 공항이다. 공항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환승역이자 일상에서 벗어나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기 위한 정류장이다. 저마다의 사연과 설렘을 캐리어에 싣고 목적지를 향해 승객들이 맨 처음 당도하는 공항에서 여행이 시작된다.
떠나기 위해 공항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무슨 사연을 품고 있을까? 공항을 오갈 때 마다 드는 생각이었다.
오래 떨어져 지낸 자식을 만나러 가는 부모의 마음은 만나는 기쁨 못지않게 걱정과 불안 또한 가슴 한 구석에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빼놓지 않고 하는 밥걱정에,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외롭지는 않은지, 살피고 챙겨야 할 것을 생각하느라 잠시 아득해지지만 이내 아들, 딸의 싱그러운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독인다.
연인을 만날 기대에 부푼 청춘들의 속내는 감출 수가 없다. 빛나는 피부와 살짝 홍조가 깃든 표정은 쉽게 들키고 만다. 환한 얼굴 속에는 기대와 흥분이 교차하고 부푼 가슴은 터질 듯 두근거린다. ‘나 없이 잘 지냈을까?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증은 구름처럼 몽글몽글 피어나고 빨리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에 조급증이 일지만 연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사랑을 확인하는 일이다. 외로움에 지쳐 다른 연인이 생긴 건 아닌지 갖은 촉을 동원해 부지런히 안테나를 움직인다. 유치하지만 절박한 물음 앞에서 잠시 긴장하지만 이내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사각형의 검은 서류가방을 비스듬히 세워둔 채 눈으로는 노트북을 좇고 손으로는 부지런히 패드를 롤링하는 남자도 보인다. 비즈니스 출장을 앞둔 직장인이거나 계약을 따내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있는 사업가라고 멋대로 추측해본다. 그에게 공항은 설렘과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업무공간의 연장일 뿐이다. 이메일을 체크하고 일정을 확인한 뒤 미팅 시간을 세팅하는 것은 사무실에서 하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게다가 낯선 나라에서 만날 업무 파트너는 어떤 사람인지, 회사의 제안은 과연 받아들여질지 확신이 없어 고민과 갈등으로 머릿속은 복잡하다. 떠난다는 흥분과 설렘이 들어설 자리에는 긴장과 불안이 슬며시 똬리를 튼다.
가족 모두가 여행을 떠나는 듯한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그날의 여행을 책임지고 있는 듯한 가장의 어깨도 보인다. 자부심에 들뜬 흥분과 그리 가벼워 보이지 않는 어깨가 양쪽 저울에 대롱대롱 매달려 키재기를 하고 있다.
갓난아이를 데리고 대기 중인 젊은 부부도 있다. 기껏해야 7.8개월 정도로 보이는 아기가 비행기 안에서 얌전히 잠만 잘 리는 없다. 수시로 울고 보채며 엄마 아빠를 긴장시킬 것이다. 울음이 멈추지 않으면 아이를 안고 잠시 자리를 벗어나야 할지도 모른다. 무슨 사정으로 떠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여행길이 녹록지 않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 외에도 각자의 사연을 간직한 채 공항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무수히 많지만 대부분은 나와 같은 평범한 여행객들일 것이다. 적당한 흥분과 설렘을 안고 각자의 목적지에 대한 상상과 기대를 품은 채 잠시나마 낯선 곳에서 생의 동력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 말이다.
여행 자금으로 이미 거금을 지출한 터라 면세점 쇼핑은 집에 두고온 목베개와 얼굴 팩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수속을 마치고 여권과 비행기 표를 다시 한 번 확인 한 후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댄다. 생각보다 수속이 빨리 끝나 여유가 생기자 커피 생각이 간절해졌다. 커피를 거르면 왠지 하루가 제대로 시작되지 않을 것만 같은 불편한 마음은 공항에서도 다르지 않아 연신 카페를 두리번거렸다. 남편이 시원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내밀었다. 우리는 사이좋은 오누이 처럼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셨다. 치열하게 달려온 시간을 돌아보며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이제는 낡아버린 광고 문구에 의지해 여행을 합리화하면서…
탑승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긴 줄에 합류한다. 기체와 연결되는 통로, 즉 탑승교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마법의 공간이다. 좁고 환한 통로를 건너가면 일상은 멀어지고 낯섦과 설렘의 공간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여행을 가장 실감하는 순간은 여행을 준비할 때나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가 아니라 탑승교를 걸어가는 이 순간이다.
탑승교를 거쳐 기내에 들어가면 이륙준비를 하는 승무원들의 밝은 미소를 만나게 된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좌석을 확인하고 긴 비행시간을 견디게 해 주는 영화까지 세팅을 마치고 나면 이륙준비는 모두 끝난다. 이제 비행기는 거대한 몸체를 천천히 활주로 방향으로 튼다. 잠시 숨을 고른 비행기는 비상을 위한 질주를 시작한다.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