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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Sep 28. 2018

삼천포로 빠질때 진짜인생이 시작된다

박민규<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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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라니!    


1982년 프로야구 원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프로야구의 열기에 휩싸여 말 그대로 열정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대구가 고향이었기 때문에 우리 또래의 응원팀은 자연스럽게 지역 팀이었던 ‘삼성 라이온즈’였다. 지역팀을 응원하지 않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배신행위로 취급받을 정도로 당시 프로야구의 열기는 후끈했다. 하지만 반에서 유일하게 타 지역 팀을 응원하는 애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나였다. 당시의 정서로는 ‘변절자’라는 꼬리표가 붙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튀는 행동이었다. 겉으로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편이었지만 때로 엉뚱한 신념을 내세워 고집을 부릴 때가 있었다. 또래 친구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고집이었겠지만 내 나름대로는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처음부터 다른 팀을 응원한 건 아니었다. OB 베어스를 응원하게 된 건 순전히 투수 때문이었다. 지역 팀이라는 이유만으로 삼성을 응원했지만 아무리 봐도 2프로가 부족했다. 눈에 띄게 잘 생긴 선수도 없었고 유니폼도 촌스러웠다. 반면 몇 번의 경기를 보고 나니 프로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돌아온 박철순이라는 투수가 눈에 들어왔다. 미국물(?)을 먹어서 그런지 신사적인 매너와 날렵한 체구, 잘 생긴 외모에다 그에 걸맞은 출중한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흰색과 감색이 적절히 어우러진 깔끔한 디자인의 폼나는 유니폼은 큰 키의 그를 한결 돋보이게 했다. OB의 상징인 깜찍한 곰돌이는 요즘 유행하는 SNS의 이모티콘을 능가할 정도로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완벽한 조합이었다. 한눈에 반해 버린 나는 친구들의 따가운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OB 베어스로 갈아타고 말았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우리는 서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상대 팀의 험담을 하고 자기 팀을 두둔하느라 언성을 높였다. 교실 안은 금세 혼란스러운 장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여중생 특유의 날카로운 고음으로 가득 찼다. 프로야구 원년의 기억은 그렇게, 다소 소란스러웠지만, 저마다의 판타지를 쫓던 사춘기 여중생들의 욕망을 제법 충실하게 채워주었다. 


<응답하라 1988> 이란 드라마가 80년대를 재현해서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자극했다면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프로야구'라는 조금은 생뚱맞은 소재로 80년대를 소환한다. 소설은 인천에 살던 주인공 ‘나’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던 그 해로부터 시작된다. 1980년대는, 기억력이 별로 신통치 않은 나도 자동반사처럼 튀어나오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으로  시작된다. 엄청난 사명감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국민답게 우리는 매일 저녁 가던 길을 멈추고 엄숙한 태도로 국기에 대한 경의를 표해야 했다. '대한 뉴스~'로 시작하는 영화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곱게 포개고 애국가에 맞춰 국기에 대한 정중한 예를 표한 뒤에야 비로소 영화 관람이 허락되었다. 이 외에도 건국 이후 최고 경제사범이라는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거액 어음 사기 사건과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있었고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 등 국제사회에서도 굵직굵직한 이슈들이 쏟아져 나온 시대였다. 국가 권력에 의한 규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에서 두발과 교복 자율화, 37년 만의 야간 통행금지 해제 정책이 시행되었다. 겉보기에는 자유가 확장되는 듯 보였지만 이 시기의 자유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가져와서 또 다른 형태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암울한 시대의 서막일 따름이었다. 작가는 '프로야구'라는 소재를 가지고 와서 자본주의의 모순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담론의 확장을 시도한다.


프로야구 원년의 뜨거운 열기에 취한 ‘나’는 친구 조성훈과 함께 인천이 연고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열혈 팬이 되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팀을 응원했지만 삼미 슈퍼스타즈는 번번이 형편없는 성적으로 팬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렸다. 만년 꼴찌를 면치 못한 삼미는 팀 최다 실점, 시즌 최소 득점, 한 게임 최다 피안타, 팀 최다 홈런 허용, 최다 사사구 허용, 시즌 최다 병살타 기록이라는 전후 후무한 기록을 남긴 채 창단 3년 만에 팀이 해체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팀 명만큼이나 ‘슈퍼’ 한 기록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이런 처참한 결과로 프로의 세계에서 사라진 것은 그들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저조한 성적으로 언론의 웃음거리가 되고, 해설위원들의 조롱과 다른 지역팀들의 야유를 받았지만 삼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자본의 논리를 거스르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글의 법칙을 무시한 채 그들만의 야구를 고집한 것이 원인이었다. 더 큰 문제는 삼미가 맞서 싸워야 할 상대가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라는 데 있었다.


“평범한 야구팀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 고교 야구나 아마 야구에 있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팀이 프로야구라는-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 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노력만 가지고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세계에 입문하기 어렵다. 천신만고 끝에 프로의 세계에 입문한 뒤에도 끝난 게 아니다. 입문하는 그 순간 다시 꼴찌가 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고 멈추는 순간 도태되기 십상이다. 정말이지 끝이 없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삶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큰일이었다. 세상은 이미 프로였고 프로의 꼴찌는 확실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고별 경기가 있던 날  ‘나’는 다소 비장한 결심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무슨 일이 있어도 좋은 대학에 가겠습니다’는 선언과 함께 프로 세계로의 입문을 다짐한다. 삼미의 처참한 패배는 프로가 아닌 마이너의 세계에 속한 탓임을 뼈아프게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냉혹한 프로의 세계를 일찌감치 경험한 그는 결심한 대로 악착같이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무난히 대학생활까지 마친다. 이후 유수의 대기업에 안착해서 프로의 세계에 안정적으로 입문한 듯했다. 계획대로라면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여야 했다. 하지만 때마침 불어 닥친 IMF의 여파와 이로 인한 구조조정의 덫에 걸린 그는 결국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냉혹한 프로의 세계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내와도 이혼을 하게 되어 순식간에 인생의 나락을 경험하게 된다.


그가 마이너의 세계로 밀려난 것은 게을렀거나 열심히 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효율성’과 ‘결과물’로만 판단하는 비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은 것이 원인이었다. 모두가 ‘프로’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한 줄 서기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반드시 낙오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 1등부터 꼴찌까지 순위가 매겨지는 사회에서 누군가가 1등을 했다는 얘기는 또 다른 누군가의 자리는 꼴찌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꽤 괜찮은 대학에 진학을 해도 결국은 그 안에서 또 서열이 매겨지고 대기업에 입사를 하거나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한다고 해도 치열한 경쟁 구도는 바뀌지 않는다. 대다수는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 속에서 비용 대비 효율을 따지고 ‘회사에 쓸모가 있냐 없냐’에 따라 그 사람의 효용가치가 매겨진다. 한 사람의 온전한 인격체라기보다는 부적합 판명이 내려지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부품과 마찬가지의 서글픈 신세인 것이다.


세상은 프로만을 원하고 그 세계에서 배제된 대다수는 ‘루저’란 처참한 타이틀이 주홍글씨처럼 새겨진다. 마치 먹이사슬과도 같은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는 점점 높아지고 비좁아진다. 누군가를 밀어내지 않으면 내가 밀리는 상황에서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어도 언제라도,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개인의 노력 탓으로 돌리고 낙오자로 손쉽게 낙인찍어 버린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우리가 결코 게을러서도, 열심히 살지 않아서도 아니란 것’을....   


 "1등은 똥줄이 타도록 존나 열심히 한 놈

2등 이하 상위권은 그럭저럭 열심히 한 놈

중위권은 그냥저냥 한 놈

하위권은 평균 이하로 노력한 놈

꼴등은 남들 할 때 존나 처 논 새끼"    


자본주의의 근본 원리인 무한경쟁과 효율을 위해서는 개개인의 노력이 따라야 한다. ‘프로야구’는 스포츠를 통해 자본주의의 논리를 심어주고 순위에서 밀려난 팀은 루저로 퇴출시켜야 한다는 왜곡된 시각을 은연중에 심어준다. 프로야구의 이런 논리는 비단 스포츠 세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 깊이 뿌리내려서 소진될 때까지 스스로를 착취하는 주범이 되었다.     


“전부가 속았던 거야.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겐 낭만을!’이란 구호는 사실 ‘어린이에겐 경쟁을! 젊은이에겐 더 많은 일을!’ 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보면 돼. 우리도 마찬가지였지. 참으로 운 좋게 삼미 슈퍼스타즈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우리의 삶은 구원받지 못했을 거야. 삼미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도 같은 존재지. 그리고 그 프로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모든 아마추어들을 대표해 그 모진 핍박과 박해를 받았던 거야. 이제 세상을 박해하는 것은 총과 칼이 아니야. 바로 프로지!”   


직장에서 쫓겨난 ‘나’는 10 년 전에 잠적했다 다시 나타난 친구와 함께 삼미의 야구를 부활시키기로 한다. 미사리의 한 야구장에서 만두집 사장, 일본인 할아버지, PC방 사람들과 출정식을 가진 후 야구를 한다. 투수의 공은 제멋대로 들어오고 플라이볼 하나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외야수로 이루어진 엉망진창 팀이지만 이들은 이 순간, 진심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늘 패배만 하고 마이너리티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삼미 슈퍼스타즈는 아등바등 열심히 노력해도 프로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한 우리의 외로운 자화상이었다. 


‘잡히지 않는 공은 잡지 않아도,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아도 된다’ 고 작가는 우리를 위로한다. 비록 1할 2푼 5리의 승률로 살아왔더라도 의미 없는 인생이 아니다. 버티고 있는 그래서,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 있는 인생이지만 그 자체로 기적이다. 프로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모든 아마추어를 대신해 박해와 핍박을 받은 삼미 슈퍼스타스는 그래서 진정한 영웅이다. 


"남아 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 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것은 새삼스런 깨달음이 아니다. 멀쩡하게 걷다가 잠시 발이 삐끗하는 순간 예측 불가능한 삶의 질곡 속으로 처박히는 게 인생이다. 질곡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 시간으로부터 한참 멀어진 후에야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 어쩌면 인생일는지 모른다. 수없이 헛방망이질을 하며 사는 것 같지만 이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었음을 부인할 수 없기에  모든 순간순간이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꿈꿔 본 곳에 닿기 위해 갖은 힘을 써 본 삶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삶이라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 힐난받아 마땅한 사람이나 인생은 어디에도 없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 같은 인생을 살았을 지라도 그게 뭐 어때서?


삼천포로 빠질 때 비로소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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