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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 Aug 07. 2019

행복한 개를 사랑하는 게 나의 행복이야

14살 흰둥이




어쩌면 마지막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과연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뒤따라왔다.

괜한 욕심에 무리를 하는 건 아닐까?

과연 흰둥이도 좋아할까?

그냥 집에서 쉬는 게 나을까?

추억의 가치가 장소와 비례하는 것도 아닐 텐데 왜 함께 떠나고 싶어 하는 걸까?


장소를 찾고, 숙소를 예약하고, 여행지 주변을 파악하는 동안에도 마음 한편에는 떠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전제를 남겨두어야 했다. 흰둥이의 상태가 언제 어떻게 나빠질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걱정하던 증상들은 치료를 받고 호전되었지만 이젠 정말로 선뜻 여행을 떠나기 쉽지 않은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행은 설렘이 반이라는데 이번엔 설렘 대신 걱정이 그 반을 차지하고 말았다.



흰둥아 어야~갈 거니까 준비하고 와.


일부러 가르친 적도 없는데 이 말을 들은 흰둥이는 화장실에 들어가 자신의 배변판에 오줌을 눈다. '어야 갈 거니 준비해'라는 말은 차를 타고 조금 멀리 간다는 뜻이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나 산책 전에는 하지 않는 행동이다. 어디서 이렇게 똘똘한 녀석이 나의 품으로 왔을까. 이렇게 기특한 흰둥이가 지난봄 아픈 이후로는 준비하라는 말이 나오면 식탁 아래로 몸을 숨겨 버린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달 동안 어야를 간다는 말은 병원을 간다는 뜻이었으니 가기 싫다는 자기만의 표현이었던 거다.


여행 당일, 흰둥이도 아침 일찍 일어나 거실에 나와 앉았다. 분위기상 어디로 갈 것 같은데 하는 눈빛이었다. 흰둥이가 오늘도 식탁 아래로 몸을 감추면 어쩌지. 억지로 끌고 나와 차에 태우면 가는 내내 달달 떨 텐데. 스트레스만 잔뜩 안겨주는 건 아닌지. 이런저런 생각에 아침부터 걱정만 한 가득 집어 먹어 마음이 있는 대로 무거워졌다.


흰둥아, 어야~ 갈 거니까 준비하고 와.


걱정과는 달리 발걸음도 가볍게 화장실에 다녀온 흰둥이가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다가왔다. 하네스를 채우고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언제나 고마운 나의 흰둥이다.



차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흰둥이가 참고 가는 이유는 함께 있는 것이 좋기 때문일 거다. 무섭고 두렵고 싫지만 가족과 나와 떨어져 혼자 남겨지는 것이 더 싫어서. 이건 모든 반려견들의 공통점이 아닐까.

개들이 바라는 건 여행을 떠난다는 설렘도, 낯선 곳에서 만나는 즐거움도 아니라 언제 어디든 함께 있다는 것일지도.


흰둥이가 어렸을 땐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르면 개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호강하는 강아지구나"라는 말을 늘 들었다. 최근엔 반려견 놀이터가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도 생겼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이젠 휴게소에 가면 흰둥이 친구들을 곧잘 만날 수 있다. 그 사이 호강하는 개들이 늘었다는 의미일까.


개와 함께 여행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반려동물 입장이 가능한 곳에 일반 숙소보다 비싼 금액을 치르고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공급이 많지 않아서 경쟁도 치열하다. 휴게소나 여행지 주변의 식당은 거의 들어갈 수도 없다. 그래도 함께 한다는 건 가족이기 때문이다. 유독 너만 호강에 겨운 개라서가 아니라 가족이니까 여행을, 명절을 함께 보내려는 것이다. 그래서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함께하는 우리는 불평이 없다. 가족과 함께인 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개이고, 그런 행복한 개를 사랑하는 것이 나의 행복이다.



한낮의 태양이 너무 뜨거워 나와 흰둥이는 가족들보다 먼저 숙소로 향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전망이 좋은 곳에 숙소를 잡았던 게 신의 한 수였다. 흰둥이는 전망 좋은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고, 나는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세상을 바라보는 흰둥이를 바라보았다.


낯선 곳에서 바라보는 낯선 풍경이 이 작은 개에겐 어떤 의미로 비칠까?

이제는 나이 들어 궁금한 것도 호기심도 많이 줄었는데 한참 동안 반짝이는 눈으로 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어쩐지 반가웠다.



저녁을 먹고 노을이 서서히 질 무렵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이글거리는 태양이 한낮 동안 달궈놓은 열기가 느껴졌지만 파도에 실려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터벅터벅 걷는 흰둥이를 보며 사람들이 말한다. 자신을 보고 아는 척하는 낯선 이들에게 흰둥이는 눈을 맞춘다. 모르는 사람이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니 궁금한가 보다. 다행이다. 힘들어하지 않고 주변을 즐기고 있는 모습에 그제야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파제를 따라 걷고 있는데 한동안 뒤에서 우리를 따라오던 아이가 다가와 질문을 쏟아낸다.


이 강아지는 뭐랑 뭐랑 썩인 거예요? 이름이 뭐예요?


엄마랑 아빠를 만나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어요.
인사해볼래요?
흰둥아, 하고 부르면서 손 내밀고 있으면 냄새를 맡아요.
그게 강아지들 인산데. 재미있죠?


몇 살이에요?


14살이 넘었고, 이제 곧 15살이 될 거예요 아마도.


우와! 하며 아이는 엄마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재미난 일이 있었다는 듯 재잘재잘 이야기꽃을 피운다.


바닷가 작은 항구에 어둠이 내리자 어디서 들 왔는지 가족과 함께 여행 온 개들이 한두 마리씩 보인다. 개들은 함께 여행을 다닐 만큼 사회성이 좋은지 누구도 짖거나 달려들지 않는다. 아마도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런 것 같다. 서로서로 고슬고슬한 털 냄새를 맡고 반짝이는 눈으로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이 마을 터줏대감인 검은 얼룩무늬 고양이가 부둣가 그물 더미 위에 나와 앉았다. 삶의 풍경처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봐서 일까, 숨거나 놀라지도 않고 하악거리거나 야옹~ 소리도 내지 않는다. 사람이 해치지 않는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다른 고양이들도 사람들 사이로 총총총 어두워지는 마을을 거닐고 다녔다. 그런 고양이들을 보면서 이곳이 좋은 동네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너 배고파? 오늘은 간식이 없는데. 안녕~ 반가웠어.' 아쉽지만 인사만 하고 돌아온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 카메라다. 가이드북이나, 어디서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볼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음식을 고르고 볼거리를 찾는 편이 여행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꼭 지켜야 하는 건 기록을 남기는 일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고르고 준비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흰둥이와 마지막일지도 모를 여행에 사진을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모두 나의 개에게만 집중하고 싶었다. 나중에 그때 사진이 충분하지 않아 후회스러울 때가 온다고 해도 지금은 렌즈가 아닌 내 두 눈에 흰둥이를 온전히 담고 싶었다. 행복은 내가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억하는 거라고 했다. 사진이 그 기억을 좀 더 선명하게 오래 보관해주겠지만 나도 나의 흰둥이처럼 두 눈으로 바라보고 마음에 담아보려 한다. 기억이 희미해지고 가물가물 멀어진다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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