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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를 시작하고, 한 달 이상 글을 못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레 너무 바쁜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2020년 4월과 5월을 뜨겁게(물론 저희 업계 기준입니다.) 달구고 있는 그것, 정부 긴급재난지원사업에 참여하게 (라고 쓰고 잡혀 들어갔다.. 라고 읽습니다) 되었거든요.
예전에 몇몇 정부 프로젝트를 해 본 바 있습니다. 금융 쪽에서의 공공사업은 규모도 작지 않지만 충분한 시간을 두고 진행되는 게 일반적입니다. 금융은 사고가 나선 안되기도 하고 업권이 워낙 보수적이니까요. 그런데 이번 정부 긴급재난지원사업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긴, 이름부터 ‘긴급’ 이 들어가 있는데 여유로울리가요. 코로나 때문에 참 다양한 경험을 해 보네요. 아무튼 4월 중순 이후로 오늘까지 정말 바빴습니다.
카드사에서는 정부 긴급재난 사업 준비를 어떻게 해 나가야 할까요? 아마도 생각해 보신 적 없으실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한창 쓰고 계실 재난지원금을 위해서 카드사와 정부는 다음 내용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디테일하게 적고 싶지만 회사일이니, 최대한 일반적인 내용으로 설명해 보자면요..
정부, 유관협회, 타 금융사 간 상세 프로세스를 협의해 나간다.
카드사의 신청절차를 설계한다 (Web / Mobile Web / ARS / 콜센터 / 영업점 창구 / App….)
개개인의 신청, 기부가 잘 될 수 있도록 전체 프로세스를 구현한다
법적 이슈는 없는지 살피고 민원에 대응한다
‘신청’ 이후 카드 ‘사용’에 문제가 없도록 프로세스를 구축하고 운영한다.
사업내용을 홍보하고 실적을 보고한다.
오늘 즈음이면 꽤 많은 분들이 재난지원금을 신청하셨을 겁니다. 13일 00시부터 사용 가능했으니, 사용해 보신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여러분들이 써 보신 경험을 생각해 보신다면 대략 어떤 걸 어떻게 만들어야겠구나.. 감이 오실 겁니다.
평이한 문장으로 두서없이 적었지만 하나씩 들어가 보면 업무량이 어마어마합니다. 그래도 차근차근히 생각해 보면 어찌어찌 다 챙겨가며 할 수 있습니다. 네, 차근차근히 만 한다면요. 시간 여유가 있어서 차근차근할 수만 있다면요.
이번 재난지원금 프로젝트는 그야말로 번개 같은 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공무원분들이 저런 스피드를 보여주실 줄이야! 카드사 또한 숨 가쁜 일정으로 구축해 나가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꽤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15년 동안 고민하고 있던 질문의 답이 보였거든요. 생각지도 못한 아주 긴급한 상황이 되니까 보였습니다.
바로 ‘일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입니다.
오늘은 이번에 제가 느낀 점 몇 가지를 공유해 보고자 합니다.
이게 무슨 당연한 소리인가.. 싶으실 겁니다. 그런데 한번 자문해 보세요. 이거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제조업이라면 내가 만드는 물건은 무엇인지, 이 물건의 원재료는 어디서 오는지, 이 물건을 사는 사람은 왜 사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물건에 대해서라면 누가 뭘 물어도 다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늘, 내가 하는 일이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일을 할 때 이걸 왜 하는지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정부 긴급재난지원을 예로 들어 볼까요? 정부는 이 사업을 왜 하는지, 카드사는 이 사업에 왜 참여하는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실제 업무에서 큰 차이가 나게 됩니다. 정부에서 왜 하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으면, 세부 이슈에 정부 가이드가 없더라도 올바른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일로 설명하면 재미가 없죠, 노는 것으로 설명해 볼까요? 어릴 때 동네에서 하던 축구도 룰을 알아야 같이 할 수 있습니다. 그냥 달리기 잘하고 공 뻥뻥 찬다고 잘하는 게 아니죠. 골키퍼가 왜 공을 손으로 만져도 되는지, 골킥은 언제 하는 건지 알아야 같이 놉니다.
고백하자면 저도 꼬꼬마 시절, 싫은 일이 정말 많았습니다. 연차가 좀 찬 지금 그때를 회상해 보면, 일이 왜 그렇게 싫었던지 알 것 같습니다.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일하는 방법을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관심도 없고 왜 하는지도 모르니 혼나는 것만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자꾸 피하게 되고 피하다 보면 더 모르게 됩니다.
사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면 누구보다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차마 회사 일을 사랑하고 좋아하라는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하기 싫은 일이더라도 일단 잘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앞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 아닌가? 하신다면 날카로운 분입니다. 일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To-Do를 자연스럽게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이 항목에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일에 대한 이해’가 아닌 ‘조직에 대한 이해’입니다.
회사에 속한 사람 중 일을 잘하는 사람은, 일 만큼이나 조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사례를 예로 들자면 정부 긴급재난 사업을 준비할 때 어느 부서의 누구에게 무슨 요청부터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눈을 감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속한 조직에서 어떤 일을 할 때 어디부터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하는지 알고 있나요? 웬만큼 알고 있으시다면 여러분은 일을 잘하는 (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매년 새로 나오는 조직도나 업무분장표는 중요합니다. 조직에서 더 나아가 담당자까지 잘 알고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일을 ‘하는’ 사람과 ‘잘하는’ 사람의 차이가 나는 또 다른 포인트입니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일단 매몰되지 않습니다. 오늘은 여기를 보고 내일은 저기를 보더라도 늘 전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이걸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될 거야..라고 예상하며 일을 합니다.
이번 정부 긴급재난 사업에서 초반에 가장 중요했던 건, 어떻게 구축해야 고객들이 편리하게 신청을 할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웹 채널의 로딩 속도, 입력을 받아야 하는 항목, 모바일 화면의 터치 횟수, 안내문구의 크기와 배치 등등 챙길 것은 참 많죠. 일을 하다 보면 자기 분야에만 집중하게 되고 그것만 보게 됩니다.
여기서 한발 물러서서 이 뒷단의 일들을 예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이 값을 받아버리면 전문 송수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구나
신청하고 나서 사용하기까지 일관성 있게 하려면 문자는 어떻게 나가야겠구나
한 달 뒤 명세서 나갈 부분을 고려하면 여기서는 이렇게 보여줘야겠구나
무슨 다중인격처럼, 머릿속에선 계속 챙길 것들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일하면 정말로 일 잘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고 싶은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맨 뒤에 하게 되네요. 일을 잘하는 사람은 2가지를 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여유와 유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이제 저는 일만 잘하면 됩니다..)
왜 이 두 가지가 중요하냐 하면
시간을 컨트롤하고 있어야 여유가 나오고,
사람을 컨트롤하고 있어야 유머가 생기거든요.
(제가 쓰고도 꽤 그럴듯한 있어 보이는 말이라 살짝 놀람)
시험공부할 때 그런 경험 다들 있지 않나요? 남은 시험 과목, 남은 시간을 비교해 보니 과목별로 어떻게 배분하면 되겠다.. 이런 거 고민한 경험 말이죠. 저는 늘 실패했습니다. 워낙 중고등학교 때 공부를 안 하기도 했었지만, 제가 왜 매번 실패하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나이 먹고 나서 돌이켜보니 제가 제일 중요한 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1시간 공부하면 얼마나 할 수 있느냐 라는 ‘투입시간 대비 효과’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던 거죠. 솔직히 저만 몰랐을 거라고 보지 않습니다. 다들 잘하셨나요?
이걸 알고 있으면 시험 범위에 맞춰 공부할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른바 ‘각’이 나오는 거죠. 이러면 사람이 여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친구들과 놀거나 TV를 보는 여유 말입니다. 이게 ‘시간을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유머러스 한 사람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대방을 즐겁게 할 줄 아는 사람은 상대방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을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사람은 정말 똑똑한 사람입니다. 공부머리와는 다릅니다.
사람을 무섭게 만드는 건 의외로 쉽습니다. 공포영화에 흔히 나오는 장면들을 생각해 보세요. 어두워서 뭐가 나올지 모르는 화면, 갑자기 들려오는 큰 소리, 이 세상에서 보기 힘들 것 같이 끔찍한 장면 등등. 매번 쓰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슬프게 만드는 건 어떨까요? TV에서 낮시간에 자주 하는 자선단체들의 CF를 생각해보세요.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한 장면들로 동정심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빈곤 포르노라고들 하죠)
다른 감정들과 달리 유머는 철저하게 상대방을 이해하고 각각에 맞춰 던져야 합니다. 위계에 의한 유머 (사장님이 ‘아이고 오늘은 날씨가 좋네?’ 했다고 아하하하 화기애애해지는 그런 거) 말고 이해관계없는 관계에서 상대방을 웃게 하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상황과 사람에 대해 많이 이해해야 가능하죠.
그래서 일할 때 즐겁고 유머러스 한 사람은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봐도 됩니다. 상황과 동료와 이해관계자들을 다 파악하고 있을 때 가능하거든요.
여유 있고 유머까지 가진 사람은 이 자체가 실력으로 비춰지기에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됩니다.
사실 위의 4가지를 종합하면 ‘제가 생각하는 좋은 리더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저도 되었으면 하는 이상형이기도 하고요.
이 내용들은 늘 머릿속에 조금씩 생각하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동안 극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점점 더 구체화가 되더군요. 저 조건들을 맞추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이 생각해 봤습니다. 부족함이 많은 터라 한 가지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한숨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긴 글 줄입니다.
길진세님이 브런치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