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가게, 한복가게, 구제상가.. 광장시장에 자리 잡고 있는 여러 가게들 중 쌩뚱맞게 들어선 세련된 가게가 하나 있습니다. 어울리는 듯 안 어울리는 듯 있는 이 곳은 일상잡화 브랜드 로우로우의 직영점인데요, 브랜드 쇼룸이 많은 이태원, 홍대, 성수가 아닌 광장 시장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광장시장을 지키고 있는지 벌써 8년째가 된 이 요상한 브랜드는 2011년 브랜드 시작 첫 해에 8억 매출을, 이후 꾸준히 성장하여 현재 100억대 매출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물건의 본질에 집중한 제품을 만드는 로우로우는 2015년 페이스북 미국 실리콘밸리 본사에 초청되어 팝업 스토어를 열고, 2017년 무인양품 마사아키 회장의 초청을 받아 무인양품이 매해 개최하는 ‘양품 콘퍼런스’의 연사로 나서 ‘브랜드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무엇이 로우로우만의 특별한 행보를 만든 것일까요? 본질(raw)을 끊임없이 반복(row)하겠다는 로우로우(rawrow)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목차
브랜딩 이전 디자인씽킹의 시대
문화에 대한 존경이 낳은 본질
장수의 마음을 담은 커뮤니케이션
본질이 이끌어온 정체성 : 잡화에서 트립웨어로
브랜딩이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활발하기 전, ‘디자인 씽킹‘이라는 용어가 붐을 일으켰던 때가 있습니다. 디자인을 단순히 예쁘게 꾸며주는 용도가 아닌 문제 해결 도구로 바라보고, 비즈니스 전 과정에 창의적인 시각을 넣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론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로우로우’라는 브랜드를 본격적으로 알게된 것은 이 때쯤이었습니다. 로우로우는 원형 그대로의 것(raw)을 뜻하는 로우와 열(row)을 뜻하는 로우를 합친 이름으로 ‘본질을 반복하겠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생활에 꼭 도움이 되는 제품을 만드는 로우로우의 첫 시작은 가방이었습니다.
‘드는 것, 담는 것, 보호하는 것’을 본질로 둔 이 가방은 손잡이를 크게 만들어 들기 쉽도록, 비에 젖어도 쉽게 털어낼 수 있는 발수력 좋은 소재를 사용했습니다. 안쪽에는 텀블러나 우산을 고정할 수 있는 고무밴드를 넣고, 검은색이 아닌 흰색의 안감을 사용해 물건을 찾기 쉽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관행적으로 쓰이던 소재보다 훨씬 비싼 소재였습니다. ‘모양새’가 아닌 ‘쓰임새’에 집중한 방식의 접근은 당시 소비자들에게 신선했고, 소비자의 사용성을 고려해 나온 디자인인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본질에 집중해 제작한 로우로우의 R백은 편집샵 입점 동시에 완판, 1년만에 매출 8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왜 이 소재와 이 색을 썼을까? 왜 이 모양일까? 가방에 대해 물어본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로우로우 다운지, 쓰임새가 있는지 오랫동안 고민하고 만든다.”
– 로우로우 이의현 대표, 디자인 프레스 인터뷰 중
이와 같이 문제 해결을 위한 디자인을 적용한 제품은 해외에서도 큰 반응을 얻었습니다. 2015년에는 페이스북 미국 실리콘밸리 본사에 초청되어 팝업 스토어를 열게 됩니다. 팝업스토어에서 선보인 노트북 가방은 바로 매진되었습니다.
2017년 무인양품 마사아키 회장의 초청을 받아 무인양품이 매해 개최하는 ‘양품 콘퍼런스’의 연사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글로벌 브랜드인 무인양품 앞에서는 구멍가게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한국의 브랜드가 ‘브랜드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2018년에는 네이버 디자인프레스에 ‘디자인 리딩 기업’으로 소개되고, 비슷한 시기 하라 켄야의 <디자인의 디자인> 10주년 기념 특별판의 축하글에 로우로우의 이의현 대표의 글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국내외 할 것 없이 로우로우의 디자인 방식과 스토리텔링은 당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정작 이의현 대표는 ‘디자인’이 필수적인 요소는 맞지만, 브랜드의 가장 중요한 점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오히려 제품을 만드는 데는 공장 운영 노하우, 기술력, 제조력이 결정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라이카, 발뮤다같은 디자인으로 유명한 제조 브랜드 구루들의 이야기와도 맥락을 같이합니다. 로우로우는 디자인보다는 기술력을 가능하게 만든 국내 제조업체에 더 큰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조업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이 각별합니다. 영원무역, 세아상역, 한세실업 등. OEM, ODM은 어려웠던 국가 경제에 큰 보탬이 됐죠. 가발에 머리카락을 심고 신발에 본드를 바르며 경제를 이끈 1세대 덕분에 우리 세대는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안목과 취향 모두 높아진 지금에 와서 크리에이티브와 브랜드를 논할 수 있게 된 것이죠.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죠. 하지만 외국을 보세요. 따져보면 결국 고어텍스는 원단집이었고, 비브람은 고물을 배합하는 아웃솔집이었어요. YKK는 지퍼 하나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우리나라 제조사들의 실력도 이에 못지않은데 처우는 너무 다릅니다. ”
– 로우로우 이의현 대표, <월간 디자인> 인터뷰 중
로우로우는 제조업 문화 전반에 대한 존중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점이 로우로우의 모든 서비스와 행보를 다르게 만들어주는 ‘철학’이 됩니다. 로우로우를 다른 브랜드들과 차별성있게, 보다 진실해보이게 만들어주는 수 많은 본질들은 바로 제조 문화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로우로우 이의현 대표의 여러 인터뷰를 찾아보면 스스로를 ‘가방 장수’라고 소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화려한 수식어가 난무하는 업계 관행들 속에서 그는 담백하게 본질만을 남기는 방법을 고수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물건을 원하는 가격에, 수요를 잘 예상하고 계산해서 시장에 내놓는 것이 상인 혹은 장수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생산을 알아야 하고, 마케팅을 알아야 하고, 디자인을 알아야 하죠.”
– <월간 디자인> 인터뷰 중
제조업에 대한 로우로우의 각별한 애정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대목은 협력 제조업체와의 파트너십입니다. 기획과 디자인을 브랜드사가 직접 하고 생산은 외주사에 맡기는 일반적인 형태 속에서 제조업체의 이름을 가리는 관행과 다르게, 제조업체와의 협력 관계임을 제품에 당당히 알립니다. 제조업체의 기술력 자체가 제품의 주요한 가치가 되는 것이죠.
일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로우로우의 대표 제품 중 하나인 안경 R EYE입니다. R EYE는 탄성과 내구성을 가진 베타티탸늄을 100% 사용해 금속 알러지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아주 가벼운 아이웨어입니다. 무려 32년간 티타늄 안경 공정만을 연구한 장인과의 협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본 장인들 사이에서 더 유명한 대구의 제조 공장 대한하이텍과의 협업이었는데요, 단 5g 정도의 무게를 가진 R EYE는 ‘100원짜리보다 가벼운 안경’을 타이틀로 입소문이 퍼지며 브랜드 대표 제품으로 자리잡았습니다.
R EYE의 안경다리 안쪽에는 ‘RAWROW/DAEHAN(대한)’을 새겨 제조업체를 전면으로 내세웁니다. 제조업체의 이름을 숨기는 업계 관행과 달리 제조업체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담은 모습은 로우로우 브랜드에 대한 더 큰 신뢰와 관심을 갖게 만드는 일이 되었습니다.
브랜드 쇼룸과 팝업의 성지가 된 성수, 압구정이 아닌 광장시장에서 직영점을 오픈한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제조업의 성지인 광장시장이야말로 로우로우스러운 장소로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한국에서 봉제, 섬유가 시작된 곳이 광장시장이고 이곳이 상업의 원형이에요. 본질에 충실한 로우로우 정신에 가장 가까운 장소라고 생각했어요. 시장에서 총각, 이모, 새댁이라고 하면서 서로를 부르는 호칭도 얼마나 자연스러워요. 다른 곳에서 느끼기 어려운 남다른 정서가 시장에는 있어요.”
– 로우로우 이의현 대표, <한겨레> 기사 중
당시 광장시장의 모습을 생각하면 생경한 시도였지만, 시간이 흘러 최근 카페 어니언 광장시장점이 오픈했고, 제주맥주의 팝업스토어가 열리는 등의 많은 시도들이 광장시장에 생겨나고 있습니다.
먹거리뿐만이 아닌 다양한 콘텐츠의 집결지로 진화해가고 있는 광장시장을 보며 로우로우의 안목이 뛰어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덜 비싼 입지를 선택하여 잘 운영해온 재무적인 이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로우로우는 고객과의 관계 역시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단순히 고객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것 뿐만 아니라, 고객의 이름을 딴 가방을 출시하기도 하고, 다 쓴 물건을 새로 바꿔주는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로우로우가 별도의 홍보 없이 초기 고객들의 입소문으로 점차 확장된 스토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장 장수의 마음으로 한 고객 한 고객과의 진실한 관계를 맺고자하는 태도가 배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브랜드가 알려지기도 전 플리마켓에서 선뜻 십만 원이 넘는 가방을 산 첫 고객을 위해, 제대하는 날에 맞추어 건축학도의 사용성과 착장에 맞는 가방을 선물했습니다. 그 첫 고객의 이름을 딴 ‘민우백’은 전세계에 팔리고 있는 로우로우의 스테디셀러입니다.
이외에도 온라인,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고객과의 친밀한 소통을 이어갑니다. 비 내리는 날 매장에 찾아오면 신발과 가방에 방수 스프레이를 뿌려주기도 하고, 낡아서 해진 로우로우 가방을 인증하면 새것으로 바꿔주는 등의 이벤트 등을 서슴없이 열기도 합니다. 무인양품 콘퍼런스에서 로우로우가 자신있게 이야기했던 내용도 이런 고객과의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이케부쿠로 강연에서 이 대표는 로우로우 고객들이 찍어 보내온 사진들을 보여줬다. 페이스북에 ‘당신이 가지고 있는 로우로우 제품을 보여주세요’라는 포스팅을 올리자 팔로워들이 자발적으로 올린 사진들이다. 무려 26개의 제품을 찍어 보낸 사람도 있었다. 이 대표는 청중에게 말했다.
“이런 사진이 100여 장 왔어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이럴수록 저희는 제품을 더 진실되게 만들려 노력하게 됩니다. 고객과도 우정을 쌓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희는 공급하는 사람으로서의 도리, 고객은 사용하는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있습니다.”
– DBR Case Study : 무인양품이 주목한 패션 브랜드 ‘로우로우’ 중
성공적이었던 첫 가방을 넘어 운동화, 안경까지 연이어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제품들을 만들어 낸 로우로우는 2019년 여행용 트렁크를 선보입니다. 트렁크라는 제품 선정이 의외라고 느껴졌었는데요, 트렁크 역시 이동과 보관을 위한 가방의 연장선으로 본 것입니다. 이렇듯 본질을 중요시한 로우로우만의 접근법이 있었기에 가능한 시도였습니다.
‘R 트렁크’의 경우 저울이 내장돼 있고 보조짐을 걸 수 있는 손잡이인 ‘TT HANDLE’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IF Award’등 다수의 디자인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일상 잡화에서 트립웨어로 브랜드의 영역을 확장하고 정립하는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R 트렁크는 로우로우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규모와 품목이 확장되어가며 로우로우의 제품들을 포괄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생겨났습니다. 바로 ‘여행’입니다. 로우로우가 정의하는 여행은 ‘집 현관을 나오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일상의 여정’입니다. 로우로우는 우리의 일상이 여행과 같이 ‘생생’해지도록 돕는 트립웨어 브랜드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들의 여정을 이어갑니다.
개별적인 제품들이 귀납적으로 통일된 브랜드 이미지를 줄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제품에 고수했던 ‘본질’만 남기는 로우로우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브랜드를 브랜드답게 만들었던 일관된 행보, 고객의 쓰임새에 집중한 그들의 장인 정신은 현재에 와서 좋은 브랜딩의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브랜딩에 대해 이야기할 때 디자인 감도를 높이는 작업이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브랜딩은 브랜드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만의 방법을 정의하고, 고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브랜딩에 있어 로우로우는 진정한 고수라고 볼 수 있겠지요.
로우로우는 얼마전(2023.02) 성수동에 플래그십 스토어 ‘월드와이드서울’을 오픈하며 다음 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캐주얼 브랜드 ‘노티카’의 국내 디렉팅을 맡게되어 브랜드간 신선한 시너지를 내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로우로우가 만들어가는 여정은 브랜드가 12년이 된 지금도 여러 곳에서 주목을 받습니다. 브랜딩, 디자인, 비즈니스 전 영역에서 그들의 행보 하나 하나에 많은 인터뷰가 이뤄지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조업 전반에 신선한 흐름과 우리의 일상에 생생함을 불어넣고 있는 로우로우가 보여줄 다음 여정은 어디일까요? 그들의 틀을 벗어난 한 걸음 한 걸음이,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생생함의 비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성국 / WMBB 님이 프리미엄콘텐츠에 게재한 글을 편집한 뒤 모비인사이드에서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