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아빠는 밤 근무라 집에 없었다. 집에는 엄마와 어린 딸, 태어난 지 두 돌이 되지 않은 동생뿐이었다. 동생이 저녁 식사 뒤에 갑자기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맥시부펜 한 수저를 먹은 직후 경련하기 시작했다. 센터와 멀지 않은 아파트였다. 구급차가 도착할 즈음 아이 엄마는 한 손으로 아기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론 어린 딸의 손을 잡고 공동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산소포화도가 떨어져서 곧장 소아용 비재호흡마스크로 산소를 주었다. 낮은 산소포화도는 자칫하면 심장마비로 이어진다. 아이들은 성인들에 비해 그 위험성이 더 높다. 다행히 눈을 맞추지 못하던 아기는 곧 안정을 되찾았다. 수치도 정상 범위로 돌아왔다. 방지턱 위로 덜컹, 구급차가 튀어 오르자 아기가 깔깔 웃었다.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언니는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 왜 울어?” 엄마가 물었다.
“나 때문이에요.”
“...... 응?”
“내가 아까 꼬집어서 그래요.”
“그런 거 아냐. “ 엄마가 딸을 품에 안았다. 딸은 엉엉 울었다.
사람은 본래 작고 연약한 것이 상처받을 때 눈물을 흘린다. 그건 이성이라기 보단 본능에 가깝다. 상처의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상처에 공감하고 함께 슬퍼하려는 본능. 아쉽게도 이 본능은 크고 강하고 빛나는 것을 추구하려는 욕구에 의해 점차 빛을 잃고 있다. 바위틈 민들레, 실개천 앞 오리 가족, 아기의 웃음보다 우리에겐 경제적 자유와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세상의 99퍼센트는 작고 연약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 1을 위해 99의 슬픔을 외면하는 게 과연 인간다운가,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