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구가 난 팬티를 입을 망정, 마음에 안 드는 팬티는 입지 않는다.
1997년 졸업한 IMF 세대. 잡지 쉬즈를 외우듯 읽던 대학생은 열심히 애독자 엽서를 보냈고, 덕분에 자유기고가로 불리던 프리랜서의 기회도 얻었고, 그 인연으로 잡지사 기자로 사회 첫 발을 내 딛었던 그 때. 월급이 80만원 정도 되었던가. IMF를 맞은 신문사에서는 출판국을 독립시켰고, 그 잡지사는 일 년 쯤 지나 곧 문을 닫았다.
자유계약 시장에 나온 나는 모처럼의 자유를 실컷 누렸다. 일단 그동안 모아두었던 적금 통장을 깬 대부분을 투자해 세진컴퓨터에서 나온 최고급 '세종대왕' 시리즈를 구입했고, 빠르게 변화하는 컴퓨터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컴퓨터 공부를 시작했다. 삐~~~ 하는 소리와 함께 인터넷의 바다로 뛰어 들던 그 시절, 천리안을 만났고, 밤새 채팅하며 발군의 타자실력도 갖게 되었다.
두 어달 놀다가, 운 좋게 다음 직장을 구했는데, 태평로에 있는 그룹의 수 많은 계열사 중 하나의 홍보실. 7시 출근 4시 퇴근하자는 7-4제 하던 그 시기. 5시 20분에 통근버스 타는 선배는 보았어도, 4시에 퇴근하는 사람은 하나도 못 봤다. 요즘 같으면 모두 노동법 위반. 그 시절에 우린 모두 당연히 그런 거라 여기며 살았다. 사정없는 감원 바람이 우리 회사에도 내려왔고, 갑자기 환송회 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20대 중반에 세상에 믿을 건 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늦잠 잔 큰 딸을 깨워 데려다 주셨던 어느 겨울 새벽, 밤같은 새까만 하늘 아래 바글바글 하던 직장인들을 보며 엄마는 무섭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고 나중에 말씀하셨다. 그 땐 다들 그렇게 살았다. 전후 쭉 우상향 그래프인 성장하는 경제만 보아 오던 우리 아버지들께도, 내게도 직장에서 기죽어 있는 수 많은 가장을 보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물 다섯 살의 나는 창의력이 중요한 거 같다 느끼고, 예술하는 남자를 만나야겠다 생각했었다.
기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던 복학한 미대생! 아무리 무시하는 발언을 던져도 전혀 기죽지 않던 서*지 닮은 그 남자와 2년 반 연애하고 결혼했다. 디자이너 남자라. 지금까지 주변에서 보지 못한 인종. 결혼을 준비하면서 포크 하나 내 마음대로 살 수 없었지만, 콩깍지 씌운 그 시절엔 작은 것까지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기특한 남자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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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마음에 드는 선풍기가 없다며 땀이 뻘뻘 나는 집에 나를 방치할 때에는 욕이 나왔다. 선풍기를 사러 백화점 세 곳, 마트 네 곳 도합 일곱 군데를 돌고 나는 포기했고, 남편은 용산 전자상가를 뒤져 끝끝내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선풍기를 사왔다. 여기서 디자인이란 무늬 뿐 아니라, 소재, 비례, 두께, 포장, 보관방법, 사용법 등 모든 걸 말한다.
나중에 나처럼 디자이너와 결혼을 한 아는 동생에게 이야기했더니, 언니 말도 마세요. 저는 팬티 사러 여덟 군데. 내가 졌다. 디자이너들이란, 이런 사람들이다. 차라리 쪄 죽을 망정 눈이 불편한 선풍기는 참을 수 없고, 구멍난 팬티를 입을 망정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팬티를 입을 수는 없는 거다.
그 후로 16년. 지금 남편은 회사에서 기획자로 일하며 틈틈이 더리빙팩토리의 작업을 도와 주며 아이도 돌보고, 멀티플레이가 가능한 뇌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나는 결혼 후 만든 생활 브랜드 '더리빙팩토리'의 오너 디자이너로, 공간 디자이너로, 2013년 설립된 몽당디자인협동조합의 이사장으로 일하며 사실 내 근원이 디자이너였음을 깨닫고 있다.
어머니께 남편 흉을 보면 항상 내 편이신데, 딱 한 번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 제영이가, 까다롭고, 영 괴팍하지? 내 다 안다. 근데 재경아, 그래서 디자인을 하는 거다. 오늘 문득 그 생각이 났다. 어머니 말씀이 백 번 맞다. 챙하고 까다롭고 괴팍한 서로의 취향이 부딪히는 그 순간. 아닌 걸 걸러내는 아픈 작업을 거쳐야, 에센스만이 남는다. 우리 디자인도, 공간도, 삶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