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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하다. 밥을 짓다.

다시 꺼낸 무쇠냄비

3년 동안 동거하며 2인 3각 경기처럼 아이를 나눠 키우던 어머니로부터 분가할 때 어머니께서는 봉투를 내어 주셨다. 꼭 밥솥을 사라는 말씀을 덧붙이시며. 이삿날 제일 먼저 옮겨 두라 당부하셨던 것도 밥솥이다. 무조건 큰 것을 사라며 여러 번 강조하셔서 세 식구 살면서도 10인용 전기압력밥솥을 구입했다. 크고, 까맣고, 번쩍거리고, 수다스러운. 아끼시던 휘슬러 압력밥솥도 함께 내주셨다. 어머니에게 밥솥은 아궁이처럼 온 식구의 건강과 안녕을 책임지는 신성한 오브제다.


그렇지만, 내 주방으로 온 10인용 밥솥은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점점 외면당했다. 급기야 몽당 마켓에 헐값으로 내다 팔았다. 큰 밥솥이 사라진 것을 눈치 채신 어머니는 다시 도깨비 시장에서 1~2인용 일제 밥솥을 사다 주셨다. 다 좋은데 110 볼트라 밥솥만 한 변압기를 주방에 같이 두고 써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치웠다 쓰다 치웠다 쓰다 하며 변압기의 무겁고 둔탁함을 견디다, 결국은 구조 조정했다. 죄송하지만, 그렇다고 변압기와 마주칠 때마다 스트레스받으며 일상을 위한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할 순 다.


모두 치우고 휘슬러 압력밥솥을 꺼내 썼다. 솥이 무겁고, 설거지가 힘드니 이번엔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전기밥솥을 사야겠다는 남편에게 꼭 사야 한다면 흰색의 작은 압력 밥솥을 골라 달라 당부했고, 6인용이 도착했다. 나름대로 괜찮았다. 그런데 어느 날, 늘 써 오던 밥솥인데도 말소리가 귀에 걸린다. 치-하고 김 빠지는 소리에도 깜짝 놀랐다. 매일매일 밥솥 내솥도 닦고, 뚜껑도 닦고, 물받이 통도 닦다가 이상했다. 과연 이게 더 편리한 걸까? 밥맛도 더 좋고? 에너지를 이렇게 많이 쓰는데?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7년 전쯤 구입한 스타우브. 그동안은 인도식 치킨 커리를 만들때만 꺼내 썼다.

아들이 어디서 보곤, 무쇠솥의 밥맛이 제일 좋다고 한다. 그래, 우리 무쇠솥 있어. 다 치우고, 오랫동안 쓰지 않아 벼룩시장에 내다 팔까 했던 스타우브의 20cm 버건디 컬러를 꺼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아주 예쁘다. 쌀을 씻어 냄비에 담으니, 까만 안쪽면과 깨끗한 쌀의 대비도 말끔하니 좋다. 쌀 위에 손을 올리고 손등에 찰랑찰랑할 정도로 물을 붓고, 전기레인지 위에 올린다. 가장 강한 불로 올리고, 밥물이 보글보글 끊어 오르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린다. 냄비 안쪽이 궁금해도 뚜껑을 닫고 기다리는 편이 좋다.

손등이 찰랑하게 물을 붓고. 현미를 섞어 물을 조금 더 많이.

거품이 끓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면 중간 불로 줄이고 타이머를 20분 맞춘다. 전기압력밥솥에서는 쾌속 모드로 밥이 15분에 완성되지만, 어차피 손이 느린 나는 상차림에 30분이 필요하니 괜찮다. 무쇠 냄비는 밥 냄새를 풍기며 보글보글 끓을 뿐. 치-하며 놀라게 하지도, 맛있는 밥을 완성했다며 생색을 내지도 않는다. 나는 뜸이 드는 동안 밥 냄새를 만끽하며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고 상을 차린다. 냄비 뚜껑을 열 때 코로 밀려 들어오는 밥 냄새의 향긋함. 아기배처럼 봉긋하게 올라온 냄비밥은 그저 밥만으로도 식욕이 돋는다.


중간 불에 20분 뜸을 들이면 살짝 눌은 노릇한 누룽지가 생긴다. 이건 내 취향을 오롯이 담은 나만을 위한 매일 저녁의 사치다. 밥과 누룽지의 톤온톤은 컬러감도 좋고, 향도 구수하고, 씹는 재미가 있다. 오감만족. 살짝 물을 부어 레인지 위에 그냥 올려 두면 따뜻한 숭늉이 되고, 불은 그릇은 세제도 필요 없이 수세미로 닦으면 된다. 설거지를 더 편하게 하려면 누룽지를 포기하고 중간보다 살짝 약한 불에서 20분 끓인다. 이 경우엔 냄비에 물을 조금 부어 두면 식사하는 동안 불어 수세미로 훔쳐 주기만 하면 된다.

배가 볼록하게 나온 밥.

그동안 왜 나는 더 많은 설거지와 더 무거운 그릇의 무게를 참으며 더 빨리, 더 맛 좋은 결과물만을 바랬을까. 이미 갖고 있는 것 중에서도 본래의 모습을 찾아내면 꽃이 되는 사물이 더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예쁜 냄비를 마주 했을 때 마음에 차오르는 에너지, 밥이 끓어오르는 소리의 낮은 데시벨, 엄마 생각이 나는 밥 냄새, 봉긋하게 올라온 갓 지은 밥의 시각적 만족도, 탱글탱글한 식감, 노릇한 누룽지와 숭늉, 간편한 설거지로 밥 짓기는 일상 속 의식이 되었다. 내게 좋은 에너지를 주는 사물은 좋은 친구와 같다. 나는 또 전기밥솥을 치워버렸다.


냄비를 사용하면서 나는 '이그, 또 밥을 해야지'라는 표현보다 '이제 밥을 지어야지'라는 우아한 말을 꺼내 쓰기 시작했다. 밥을 지어 가족과 함께 먹는 편안한 저녁식사. 이 밥을 먹고 아들은 몸과 마음과 생각이 자라고, 남편은 밖에 나가 일을 한다. 매일 저녁 냄비에 밥을 지어먹는 건 럭셔리하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는 것. 나만의 방법을 찾는 것. 누가 뭐래도 나의 속도로 내 인생을 사는 것. 내가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겨우 깨우친 이 명제. 아들은 부디 자기의 속도로 인생을 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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