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이 자오의 <햄넷>리뷰

[모하지의 영화 리터러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by 모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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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매기 오패럴은 대학에서 영문학 수업을 듣다가 셰익스피어에게 요절한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열한 살에 죽은 아들의 이름은 ‘햄넷(Hamnet)’. 당시에는 ‘햄릿(Hamlet)’과 혼용되던 이름이었다. 매기 오패럴은 여기에 착안하여 <햄릿>의 창작 동기가 아들의 죽음에 있다는 가정을 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에게는 큰 딸인 수재나와 햄넷의 쌍동이 여동생인 주디스가 있었다. 쌍둥이가 태어날 때쯤에 집을 나가 방랑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영화에서 아녜스로 등장하는 셰익스피어의 아내 앤 헤서웨이는 8살 연상이었고 아들의 죽음 이후 이 둘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던 걸로 짐작된다. 자신이 소유했던 부동산은 딸들에게 남겨주었지만, 아내에게는 자신이 두 번째 아끼던 침대만을 남겨둔 것에 대해 논란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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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매기 오패럴의 원작에 기반하여 클로이 자오가 연출한 작품이다. 매기 오패럴은 영화의 각색에도 참여했다. 아녜스를 연기한 제시 버클리의 연기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쥘 만하다. 영화 <애프터 썬>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준 폴 메스칼의 셰익스피어 연기도 칭찬할 만하다. 무엇보다 영화 곳곳에 상징성을 부여하고 섬세한 연기 연출을 보여준 클로이 자오의 연출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었던 <노매드랜드>와 더불어 앞으로의 영화를 더욱더 기대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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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더라도 제목과 영화 시작 부분의 자막으로 이 영화가 연극<햄릿>에 대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하고 중반부에 이를 때까지 숲에서 매를 키우는 아녜스와 라틴어 선생인 윌의 사랑 이야기가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어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다. 원작자인 매기와 감독인 클로이는 이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영화로 보이는 것을 처음부터 배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래서 영화의 중심은 아내인 아녜스에게 맞춰 있다. 아녜스가 햄넷을 어떻게 낳았고 어떻게 길렀는지가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반면 셰익스피어는 창작 과정과 연극 제작으로 집을 떠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어떻게 창작하게 되었는지 과정은 알 수 없으며 영화의 후반부에 상연되는 <햄릿>을 창작자가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보게 된다. 아녜스 역시 관객의 한 명으로 연극을 감상하게 된다. 아녜스의 시점에서 본 <햄릿>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다룬 왕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존재론적 고민의 결과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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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둥글게 생긴 뿌리에 아녜스가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치 태아의 모습과도 같은 이 부감샷은 영화 전체의 주제를 함유한다. 첫딸인 수재나가 숲에서 태어난 뒤 윌이 보게 되는 구멍은 아녜스가 낳은 자식들의 존재가 거기에서 왔다는 걸 의미한다. 숲이 자신의 근원이기 때문에 마녀의 자식으로 오해받는 아녜스는 어머니가 숲의 구멍에서 걸어 나와 자신의 아버지와 만났으며 숲에서 자라는 풀이 의약품이고 언젠가는 숲으로 돌아갈 것을 알고 있다. 연극 햄릿이 최초로 상연된 글로브 시어터에 관객들이 들어가는 입구, 그리고 햄릿의 연극 무대 배경이 숲이며 중앙에 뚫린 구멍으로 배우들이 무대와 대기실을 오가게 된다. 그 구멍으로 햄릿의 죽은 아버지가 유령이 되어 걸어 나온다. 비록 실제 숲은 아니지만 숲의 구멍에서 죽음이 걸어 나왔다는 사실은 아녜스에게 의미심장하다. 햄넷이 동생 주니스 대신 사신에게 끌려간 것처럼 윌은 아들의 죽음 대신 자신의 죽음을 대치하고 싶었던 것이다.

연극 무대가 실제 삶의 재현이라면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햄릿 왕자는 죽은 아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대에서 연기하고 있는 햄릿은 죽은 햄넷과 꽤 닮았다.-실제로 햄넷을 연기한 배우의 친형이라고 한다.-햄릿은 독이 묻은 칼에 찔러 죽게 된다. 쌍동이 동생 주디스 대신 죽은 햄넷은 이승인지 저승인지 모를 장소에서 방황하고 있다. 무대 위의 햄릿은 이제 아버지가 나왔던 숲의 구멍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통한 죽음을 연기하던 햄릿에게 햄넷의 어머니 아녜스가 손을 내민다. 아녜스가 손을 잡으면 상대의 인생이 보인다. 어머니 아녜스의 손은 구원의 손길이기도 하다. 이때 연극을 보던 모든 관객이 죽어가는 햄릿에게 손을 내민다. 이 장면은 반원형의 관객석이 손을 뻗을 때 한곳으로 모이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 때 막스 리히터의 선율이 깔리면서 층층이 쌓아 올린 이야기가 해소되며 감동이 밀려온다. 아녜스는 무대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윌리엄과 눈을 마주친다. 우리가 키운 아들 '햄넷'을 이제 보내줄 차례가 되었다고. 연옥을 떠돌던 햄넷은 이제야 숲의 구멍으로, 매가 올라갔던 하늘로, 그가 떠나온 어딘가의 어둠으로 떠난다. 이때 우리는 깨닫는다. 햄릿은 복수극이 아니라, 남겨진 자들이 죽음을 이해하려는 몸부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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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부모의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은 없다. 그래서 아이의 죽음을 목격한 아녜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지만 아들의 탄생도, 아들의 죽음도 곁에서 지키지 못한 세익스피어의 슬픔이야말로 더 할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 슬픔과 아픔이 희대의 걸작을 낳았다는 설정은 아마도 진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려는 점은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회귀에 가깝다는 것이다. 아녜스가 기르던 매가 죽었을 때 가족들은 모여 조촐한 매의 장례식을 치러준다. 무엇보다 슬퍼해야 할 아녜스는 해맑은 미소로 아이들에게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빌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매를 부르는 휘파람을 불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 소원은 죽은 매와의 비밀 약속이다. 이때 햄넷은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칼을 휘두르는 연극배우가 되어 아버지와 같이 작업하고 싶었던 햄넷의 꿈은 다른 배우에 의해 재현되지만, 아버지의 연출에 의해 이루게 된다. 죽어가는 아들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먼저 간 아들을 이제야 보낼 수 있게 된 아녜스는 관객 모두가 슬퍼하는 순간 희미한 미소를 띠게 된다.

슬픔과 희망을 담아, 안녕.








- 모하지 칼럼니스트 (mossis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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