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성돌담집 한옥

제주시 애월읍 봉성동2길 4-6

by 모조

제주도에 내 집이 있다. 비록 내가 소유한 집은 아니지만, 한 달을 살았기에 내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집'이 있다.


2020년 3월, 코로나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할 때쯤, 제주로 한 달 살이를 떠났다.

그 당시 재직 중이었던 회사에는 장기 근속자에게 2주 간의 유급휴가를 주는 프로그램이 있었고, 개인 연차를 사용하면 최대 한 달의 휴가가 가능했다. 제도가 도입될 때부터 대상년차가 되면 무조건 한 달 살이를 떠나겠다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의 포르투로 떠나고 싶었지만, 여행이 아닌 '살이'를 해보기에는 익숙하지만 기존의 삶과 물리적 단절이 어느 정도 가능한 지역이 놓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제주도였다.


그렇게 한 달 살이를 떠나기로 결정한 후, 온전히 나만 지내면서 내 집처럼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친구들이 원할 때 언제든 와서 편하게 놀거나 쉬었다 갈 수 있는, 진짜 내 집 같은 공간을 찾고 싶었다. 이번 한 달 내가 하고 싶은 건 제주의 명소를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게 아니었다. 삼시세끼 직접 밥을 해 먹고(주방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어야 했다.), 하루하루를 기억하는 글을 쓰고(적당한 사이즈의 데스크가 있어야 했다.), 산책을 떠나고(주변에 도보로 갈 수 있는 오름이 있어야 했다.), 친구들이 편안하게 머물다 가는(내 침실 외에 게스트 룸이 있어야 했다.) 그런 일상을 보내야 했기에 한 달간 머물 숙소가, 아니 집이 매우 중요했다.


원하는 집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전전대를 줄 위험이 있기 때문에 게스트를 초대하는 게 불가한 곳들이 대부분이었고, 원하는 인테리어나 외관을 갖춘 집들은 2박 이상의 연박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았다. 취식과 빨래를 해결하기 어려운 곳들도 많았다. 차를 렌트하면 어느 정도 해결될 문제들이었지만 렌트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 때마침 지인 중에 한 분이 제주에 있는 빈집을 재생시키는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게 생각났고 그 집들 중 하나가 내가 찾고 있는 조건에 딱 맞아떨어졌다.


단층짜리 제주도 전통가옥을 리뉴얼 한 붉은색 지붕이 달린 한옥이었다. 외관과 인테리어도 아름답고, 주방과 게스트룸도 잘 갖춰져 있고, 거실에 있는 테이블은 데스크로 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앞마당도 있고, 노천욕을 즐길 수 있는 야외 욕조도 있었다. 도보 거리에 조그마한 하나로 마트가 있고, 아담한 오름도 있었다. 해안과 한라산 사이의 내륙지역이라 관광객들이 많은 지역이 아니라 좋았다. 동네 카페와 밥집같이 원할 때면 가볍게 아우팅을 다녀올 공간들도 있었다. 내가 찾고 있던, 아니 그 이상의 최적의 조건을 갖춘 집이었다. 본래 생각했던 예산보다 돈이 조금 더 필요했지만, 감당 불가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곧장 한 달치 예약을 잡아버렸다.


시간이 흘러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 안내받은 대로 집을 찾아가 숨겨져 있는 열쇠를 찾아 대문을 열고 앞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한 달간 머물기로 한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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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동안 봉성리 집에서 나만의 <삼시세끼>와 <효리네 민박>를 온전히 즐겼다. 한 달이 지나 문을 닫고 나서는 순간 "더할 나위 없었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한다며 혼잣말을 할 만큼 행복했다. 그래서일까, 5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문득 이 집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제일 먼저 제주 유명 카페에서 나온 커피 원두를 그라인더에 갈아 커피를 내린다. 커피 향이 집안을 가득 채우면, 발뮤다 토스터기에 식빵을 굽는다. 소스팬에 버터를 두르고 계란을 휘휘 저어가며 계란 요리를 만든다. (대부분 스크램블드 에그였고, 프라이나 계란장도 만들어 먹었다. 난생처음 노른자만 골라내 염지를 해서 토스트를 만들어 먹어 보기도 했다.) 스페셜 K를 한 주먹 담아 우유를 붓고, 냉장고에 있는 과일과 야채를 적당히 씻어 플레이트에 보기 좋게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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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루틴, 직접 내린 제주 유명 로스터리 카페들의 커피, 제주 유명 빵집들의 식빵으로 만든 토스트와 애월아빠들 계란을 사용한 계란 요리, 시리얼, 제주산 우유와 과일

아침 식사 후에 설거지를 마치면 앞마당 쪽 폴딩 도어와 집안의 모든 문을 열고 환기를 한다. 제주로 출발하기 직전에 산 Beoplay A1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온 집안에서 들을 수 있게 켠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한 후 창문을 열어둔 채로 앞마당을 바라보며 빈백에 앉는다. 애플뮤직의 Chill jazz 플레이리스트로 배경음악을 바꾸고 앞마당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책을 읽는다. 혹시 밀린 글이나 일기가 있으면 글을 썼다. <모여라, 동물의 숲>이 출시한 날 이후에는 정기적으로 게임을 하며 따듯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즐겼다.


오전의 여유를 잠깐 즐기다 보면 금세 점심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찾아온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미리 해둔 밑반찬들을 꺼내 가볍게 먹는다. 밑반찬이 없으면 스팸과 김, 라면 같은 걸로 때웠던 것 같다. 점심 식사와 설거지를 끝내고는 장을 보러 가거나 밑반찬을 만들었다.


집안일을 끝낸 후에는, 친구들에게 미리 받아둔 질문을 확인한 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며 1시간 정도 근처 오름으로 산책을 다녀왔다. 산책을 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옮기다 보면 금세 또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 온다. 그래도 저녁 식사에는 '메인 디쉬'라고 할 만한 반찬이 하나씩은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요리를 하나씩 했던 것 같다. 요리라고 하긴 부끄럽지만 고기를 굽는다거나, 친구들이 사다 준 제주의 맛집 요리들을 같이 먹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는, 제주도까지 놀러 와 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보드게임을 하기도 하고, 술 한 잔 기울이며 일상 속에서는 나누지 못했던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매일 하루의 마무리로 로그에 가까운 일기를 작성했고, 잠들기 전 명상을 한 후에 잠자리에 들었다. 이렇게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정리하는 루틴을 만들었던 게 매우 좋았다.


그래서일까, 제주에서 머무는 동안 잠깐 놀러 온 지인들이 모두 "표정이 좋아졌다." "얼굴이 좋아졌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 그때는 정말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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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끓인 고추장찌개와 계란장, 친구들이 사 온 돔베고기와 함께 한 저녁 식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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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 이런저런 이벤트들도 있었다. 난생처음 한라산을 등반했고(친구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마 못 올라갔을 거다), 선상 낚시도 해봤다. 매주 한 번은 동네 고깃집인 봉성식당에 가서 제주 돼지고기를 먹었고, (고기도 고기지만, 같이 나오는 고사리가 진짜 맛있다) 매번 혼자 갔던 애정하는 스시 호시카이를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같이 즐겼다. 제주에서 제일 좋아하는 호텔인 포도호텔에서 호캉스도 했다. 잠이 오지 않은 새벽에는 별자리를 구경하고, 어둠 속에서 노천욕을 즐길 때면 아예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은 황홀경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3000만큼 애정하는 조카님의 첫 여행지가 내 제주도 집이 되는 영광도 누렸다(조카님이 온다는 얘끼에 인디언 텐트를 급하게 주문하고 집 근처 뜨개질 인형을 파는 곳에서 '인디언 인형'까지 구매해서 꾸며놨는데, 조카님께서는 큰 관심이 없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꼬박 한 달을, 제주의 봉성리의 돌담집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래서일까 3월의 마지막 날, 집을 떠나는 날에도 아쉬움이 아닌 다른 감정이 일었는데, 뿌듯함 비슷한 감정이었다. 유종의 미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싶은 그런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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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돌아온 뒤, 제주에 놀러 왔던 지인들 중에 시간이 맞는 몇몇 분들과 함께 서울의 한옥 집을 하나 빌려 제주도 한 달 살이 뒤풀이를 가졌다. 제주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던 그날 밤, 나뿐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마음속에 제주집이 하나씩 생겼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 제주도에 있는 내 집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아마 이 글을 본다면 나랑 같은 생각을 할 거다. "맞네, 제주도에 모조네 집이 있었네." 하고.


이 모든 것들이 한 공간에서, 한 공간을 통해, 한 공간 덕분에 만끽할 수 있었던 삶이었다. 애정하는 나의 제주집, 봉성돌담집 한옥 덕분에.


끝.


제주도 봉성돌담집 한옥에서의 한 달의 기록, <모조의 제주 한 달 일기>.

https://brunch.co.kr/magazine/amonthin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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