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공부할 수 있지만, 이해되지는 않는다

곰브리치가 한국 미술을 말하지 않은 이유

by 민진성 mola mola

곰브리치는 왜 한국 미술을 다루지 않았을까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 한국어 서판(1993)에서 “나는 한국 미술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다루지 않겠다”고 썼다. 이 말은 단순한 겸손이나, 자료 부족의 고백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많은 문헌을 읽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술을 ‘자료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미술은 지식이 아니라 지각 훈련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미술은 작품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문제다

우리는 흔히 미술을 ‘작품’과 ‘작가’와 ‘사조’의 역사로 배운다. 그러나 곰브리치가 보았던 미술은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 미술은 무엇을 그렸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보도록 훈련되었느냐의 기록이다. 사람은 사물을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 자기가 “보는 법을 배운 것”을 그린다. 그래서 미술사는 작품의 목록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구조가 어떻게 업데이트되어 왔는지의 연대기다.



문헌 연구로는 넘어갈 수 없는 지점

논문을 통해 우리는 다 배울 수 있다.

조선 백자의 미학

수묵화의 철학

여백의 의미

산수화의 시점 구조

문인화의 세계관

그러나 왜 그게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왜 거기서 멈추는 것이 과하지 않다고 느껴지는지는 논리로 배우지 못한다. 그것은 신경계가 훈련된 결과로 반응하는 감각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미술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통과의 대상이다.



곰브리치가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것

곰브리치는 한국 미술에 대해 침묵했다. 자료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감각이 그 문법을 통과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빛과 계절, 마당의 거리감, 종이의 숨쉬는 질감, 선을 긋기 전의 호흡, 그 선이 ‘괜찮다’고 느껴지는 몸의 기준. 이 모든 것은 책으로 알 수는 있어도 몸에 깔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는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모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술은 ‘공부’가 아니라 ‘재설계’다

미술을 공부한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우리는 미술을 통과한다. 미술은 감각을 바꾸고, 보는 법을 바꾸고, 세계의 거리감을 다시 설계한다. 그래서 미술을 배운 사람은 세계를 다르게 본다.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멈춘다. 미술은 작품을 배우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 운영체제를 재설계하는 훈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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