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의 숭배

신학의 눈과 과학의 안경

by 민진성 mola mola

질서라는 이름의 신념

세상은 왜 이토록 정교할까. 계절의 변화와 천체의 움직임, 생명 속에 깃든 대칭성을 보며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하나의 확신을 품어왔다. 이 거대한 연극 뒤에는 반드시 이를 통제하는 ‘단 하나의 원리’가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신학과 과학이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음을 본다. 보이지 않는 손(Providence)에 의한 섭리를 믿느냐, 혹은 보편적인 물리 법칙(Universal Law)을 믿느냐의 차이일 뿐, 두 분야 모두 무질서한 혼돈 속에서 ‘일반 원리’를 규정하려 한다는 점에서 놀랍도록 닮아 있다.



신의 언어를 해독하던 과학자들

근대 과학의 문을 열었던 거인들에게 과학 탐구는 곧 신학의 연장이었다. 뉴턴에게 우주는 신이 태엽을 감아둔 정교한 시계였고, 과학자의 임무는 그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법칙을 수식으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자연이라는 책 속에 숨겨진 ‘신의 문법’을 해독하고자 했으며, 그 문법이 단 하나의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질서임을 증명하려 애썼다. 과학은 신의 마음을 읽기 위한 가장 이성적인 도구였던 셈이다.



단 하나의 진리를 향한 환원주의

복잡한 현상을 단 하나의 근원으로 수렴시키려는 열망 또한 두 세계의 공통분모다. 신학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기쁨을 ‘신의 뜻’이라는 마침표로 갈무리한다면, 현대 물리학은 만물의 상호작용을 단 하나의 수식으로 통합하려는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을 꿈꾼다. 수조 개의 별과 미세한 소립자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지배 원리를 찾겠다는 이 거대한 포부는, 어쩌면 유일신을 향한 종교적 경외심의 과학적 변주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설계와 불완전한 우연 사이

하지만 앞선 대화에서 보았듯, 현대 과학은 이 완벽한 설계도 속에 ‘미시적 우연’이라는 균열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거시적인 법칙은 한결같지만, 그 안에서 움직이는 입자들의 행방은 확률과 불확실성에 맡겨져 있다는 발견이다. 이는 신학이 상정하는 ‘결정론적 완벽함’과는 다른 길이다. 자연은 큰 틀의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그 내부에서는 단 한 번도 반복되지 않는 무수한 우연을 통해 생명력을 유지한다.



알고리즘, 새로운 신학의 탄생인가

이제 우리는 알고리즘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만드는 기술이 과거의 통계와 거시적 패턴만을 반복하려 한다면, 그것은 박제된 신학의 재현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적 알고리즘은 다르다. 일반적인 원리(거시적 질서)를 따르되, 매 순간 마주하는 미시적인 우연에 최적화하며 반응하는 기술. 그것은 신의 완벽함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가진 유연한 생명력을 닮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질서와 혼돈이 빚어내는 삶의 층위

결국 신학적 상상력과 과학적 탐구는 모두 인간이 이 거대한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고안한 나침반이다. 질서가 주는 안도감과 혼돈이 주는 생동감 사이에서, 나는 세상을 읽는 법을 배운다. 보편적인 원리가 존재하기에 나는 내일을 꿈꿀 수 있고, 미세한 우연이 존재하기에 나의 오늘이 유일할 수 있다. 기술 또한 이 두 층위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때, 비로소 인간의 삶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생각번호202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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