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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가고, 밤은 깊어지고

경상도식 쌀팥죽

경상도식 쌀팥죽



펄펄 끓던 여름이 가고, 밤은 깊어지고, 풀벌레 울음소리는 처연하다.

유독 더워서 제발 가라, 빨리 좀 가라 원망하고 원망했던 여름이 갔다.

지난여름은 아이들 방학에 남편의 재택근무까지 겹쳐, 아침저녁으로 펄펄 끓는 주방에서 밥을 하고, 에어컨이 달려있는 방으로 옮기길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여름이 갔다.

여름이 가고 난 다음 날 코끝으로 훅 들어오는 찬바람을 느끼며, 벌써 간 거야? 좀 천천히 가지- 그랬다.

이 무슨 변덕인가.

머물고 있을 땐 빨리 가라 등 떠밀고, 떠난 뒤엔 아쉬워했다.

몇 해 전부터 나는 여름이 가는 게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여름이 간다는 건 한 해가 간다는 느낌이고, 곧 한 살 더 먹는다는 의미니까.


코시국 2년 차. 여기저기 반갑지 않은 살들이 붙고, 입가의 주름은 깊어지고 입술도 미워졌다.

흰머리가 자꾸만 늘고, 체력은 바닥을 맴돈다.

체력이 바닥을 기는 동안 마음도 푹 가라앉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 닥치는 대로 살다가 뭐라도 목표점을 두고 살아야겠단 생각이 들어, 여름을 보내는 동안 동물해설사 수업을 듣고 수료증을 받았다. 7월의 마지막엔 오랜만에 방송사 공모전에 글을 내기도 했다.

8월엔 요즘 핫한 웹소설 작법 강의도 들었다.

여름에 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던 건 줌을 이용한 온라인 교육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코시국을 보내는 동안 좋은 점도 하나는 있다는 걸 느꼈다.

지금 돌아보면 후회되는 일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대학교 다닐 때 불성실했던 점이다.

그때는 수업을 정말 허투루 들었다. 대학교 수업에 처음으로 흥미를 느낀 건 4학년 때였다.

그때 교양 수업을 들으며 너무너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왜 이 재미있는 수업들을 그동안 등한시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후회는 언제나, 한 템포 늦나 보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불현듯 고향에서 자주 먹었던 쌀팥죽이 먹고 싶어졌다.

내가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살고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이 바로 다른 음식 문화를 접할 때인데,

서울에서는 단팥죽이 보편적이지만 내 고향 경상도에서는 쌀팥죽이 보편적이다.

서울 사람들은 달지 않은 쌀팥죽을 모른다는 걸 결혼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더구나 우리 식구들은 달달한 음식을 좋아해서, 잘 해먹질 못했다.

근데 그냥 나 혼자라도 먹으려고 오랜만에 만들어 보았다.


경상도식 쌀팥죽은 자기 전에 불려둔 팥을 불린 물과 함께 냄비에 넣고, 팥알이 뭉그러질 정도 푹 삶는다.

그런 다음 체에 삶은 팥을 넣고 밥주걱으로 슥슥 긁어 팥 앙금을 모두 내린다.

마지막엔 팥 삶은 물, 그것도 부족하면 맹물도 부어 팥 껍질과 앙금을 최대한 분리한다.

곱게 내린 팥 앙금과 넉넉한 물(팥 삶은 물이면 더 좋다), 씻은 쌀을 코팅이 된 널찍한 프라이팬에 담는다.

코팅 프라이팬에 쌀팥죽을 끓이는 이유는 쉽게 눌어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센 불에서 끓이다가 끓으면  불을 줄이고 뭉근하게 끓인다.

쌀이 푹 퍼지면, 불을 끄고 먹을 만큼만 덜어 입맛에 맞게 소금 간하면 된다.


예전 어렸을 때, 요즘의 별다방 콩다방 같은 원두커피가 없던 시절 가루 커피와 프리마, 설탕을 넣어 커피를 타 마실 때 극미량의 소금을 살짝 넣어 먹기도 했었다. 그렇게 하면 커피에 단맛이 더 배가 되고 고소한 맛도 나기 때문이다.

이 쌀팥죽도 마찬가지다.

소금만 넣었을 뿐인데, 팥 본연의 단맛이 은은하게 느껴진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해주신 쌀팥죽을 먹을 땐 몰랐던 맛이다.

재료 본연의 단맛을 느끼는 나이, 그게 바로 중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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