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밀도 Apr 11. 2021

05. 속마음

노인 재정/청년 지민

재정/지민


재정은 다시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3번의 월급을 받았다. 월급의 액수를 떠나서 재정은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성취를 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더구나 이번 과제에서 재정이 수정한 카피는 클라이언트의 극찬을 받았다. 현대적이고 세련되지는 않지만, 최근에 젊은 친구들이 좋아하는 ‘레트로풍’의 카피라고 했다. ‘아니.. 레트로면 내 카피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건가..’ 레트로라는 말이 거슬렸지만, 어쨌든 클라이언트가 만족했다는 것으로 첫 단추는 잘 끼운 것이다. 부서내에서 재정은 일을 조금씩 더 할당받기 시작했다. 일의 경중도 무거워지고 있었다. 라디오에 이어서 지면 광고로, 이제는 TV 광고의 서브 카피라이터로 일이 떨어졌다. 야근은 불가피했다. 재정은 이 야근의 맛을 즐기고 있었다. 마음 졸이지 않고 야근하던 때가 까마득했다. 야근을 한다는 것도 자유가 허락할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재정과 진수에게 일이 몰리는 시기가 겹치면 지민이를 양가 부모님께 번갈아 맡기면서 야근을 했다. 그러면 뒤에서 누가 바싹 쫓아오는 것 같아서 늘 마음이 급했다. 그렇다고 일을 내팽개치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재정은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시간에 쫓기지 않고 야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니 65세의 야근은 달콤하기까지 했다.     


"한이야~ 할미가 치킨 사 왔다!"     


"와, 할미 최고!"     


거실에 앉아있던 진수도 인사를 했다. 최근에 야근이 많아지고 돌봄 이모님이 심한 독감에 걸려 잠시 진수가 서울로 올라와 한이의 등•하원을 도왔다. 밭을 돌본다고 잔뜩 그을린 진수는 무척이나 건강해 보였다. 진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다시 젊음을 얻는다고 해도 더 행복해질 자신이 없다며 증강 노인 프로젝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재정의 눈에도 진수는 행복해 보였다. 아무리 바삐 움직여도 배 둘레가 두툼한 것 보니 진수도 많이 늙었다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진수가 와줘서 다행이라고 재정은 동시에 고마움을 느꼈다.     


“할비!”     


“한이야. 이거 봐봐. 할아비가 키우는 밭이야. 이걸로 할머니가 한이 맘마 줬지요? 요거는 호박, 요거는 시금치!”     


진수는 직접 밭에서 키운 채소들을 찍은 사진으로 한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이는 진수가 직접 키우는 밭의 사진을 본 뒤로 먹기 싫다는 투정을 하지 않고 잘 먹고 있었다.     


"어때~ 일은 할 만해?"   

  

"뭐, 그냥저냥. 노인 티 안 내려고 노력 중이야. 꼰대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 근데 재미있다? 그때 마무리를 못 하고 그만둔 것 같아서 찝찝했는데 이제는 끝까지 마무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     


"잘됐네. 그렇게 재미있어하는 사람을… 내가 미안해. 그래도 나보다는 당신이 낫지 싶었어. 지민이가 통 내 말은 안 들었잖아."     


"그렇긴 하지!"     


그때 ‘삐삐 삑삑 삐’ 현관문 비밀번호 소리가 났다. 지민이었다. 들어오면서 재정을 본 지민이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재정은 그런 지민의 표정을 읽지 못하고 반갑게 말을 건넸다.     


"지민아, 저녁 먹었어? 여기 와서 치킨 먹어. 엄마가 오늘 월급 타서 치킨 사 왔다"     


"됐어요. 살쪄서 치킨 안 먹어. 한이 목욕은?"    

 

"아빠가 다 시켰지! 고놈 많이 컸던데?"     


"왜? 엄마는 오늘도 늦었어?"     


"응, 요즘 일이 많아. 그래도 내가 일을 안 까먹고 있었나 봐. 일을 많이 맡긴다는 게 그래도 봐줄 만하니까 그러는 거겠지? 아마 다음번에는 TVCF 경쟁 피티 준비하는 것도 투입될 것 같아."     


"좋으시겠네? 엄마가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해서."    

 

지민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가워 재정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너 말투가 왜 그래?"     


"내 말투가 뭐?"     


“엄마한테 쏘아대고 있잖아."     


"아닌데, 엄마야말로 감각이 아주 젊어지셔서 예민해진 거 아냐? 야근해도 지치지도 않고? 나 어릴 때처럼 그렇게 나도 한이도 안중에 없고?"     


그때 진수가 지민을 제지한다.     


"지민아. 그만했으면 좋겠다."     


"뭘 그만해? 맞잖아. 이모님이 아파서 못 오신다는데도 엄마는 야근을 꼭 해야겠어? 월급도 다 받는 거 아니고 70%밖에 안 주잖아. 받은 만큼만 일하면 되는 거지. 무슨 야근이야? 왜 오바해? 메인 카피라이터도 아닌데 누가 보면 메인인 줄 알겠어!"     


그때 재정의 손이 지민의 뺨을 내리쳤다.     


"네가 뭘 알아… 나한테 한없이 기대서 한이 맡겨놓고 자유롭게 일한 네가 뭘 아냐고!"     


재정은 목구멍이 조여 와서 겨우 말을 내뱉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런 재정을 진수가 부축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지민은 갑자기 설움이 몰려왔다. 그런 지민 옆에 한이가 다가와서 머리를 만져준다. 꼭 지민이 한이가 울 때 해주던 것처럼.     


“엄마 괘짜나? 할미랑 따우지마.”    

 

그런 한이를 껴안고 지민은 소리 없이 울었다.

 

이전 04화 04. 25년 전 직장으로의 복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