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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밀도 Apr 11. 2021

07. 내가 그렇지 뭐

노인 현애

현애


현애는 가장 원하던 곳은 아니었지만 중년 여성을 타깃으로 하는 의류 브랜드에 가까스로 취업했다. 현애가 면접 때 입고 간 착장이 합격을 거머쥐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미사 어패럴’ CEO 나미숙은 새로운 라인업을 추가하고 싶었다. 기존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과감하고 트렌디한 여성복이었으면 했다. 빨간 립스틱에 에나멜 블랙 하이힐을 신은 현애를 보자 자신의 도전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사내에 있는 패션 MD들은 고집이 워낙 강해서 기존의 라인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현애가 담당하게 된 업무는 신규 브랜드 런칭이었다. CEO 나미숙은 독대로 현애를 만나면서 비즈니스의 가닥을 잡았다. 해외시장에서 셀렉한 물건들로 리브랜드딩하여 한국에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현애는 국내에서 1차로 시장조사를 통해 자신이 입고 싶은 스타일을 기반으로 기획서를 만들어 보고했다. CEO는 대범한 현애만의 라인업에 상당히 흡족해했다. 과하지만 그런 과함이 여성의 자신감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현애는 컨펌된 기획서를 가지고 뉴욕을 갈 생각이었다. 과거 화려했던 자신의 인맥을 최대한 활용하여 이 브랜드를 성공시키겠다는 의지가 넘쳤다.     


현애가 대표이사실에서 컨펌을 받고 자리에 돌아오자, 커피 한잔을 들고 미사 어패럴의 수석 디자이너 윤슬아 팀장이 때마침 자리로 돌아왔다. 윤슬아는 파리 유학 시절 스스로가 지은 가명이었다. 본명은 윤미자. 윤슬아 팀장은 촌스러운 자신의 이름을 극도로 싫어했다. 입사하고 인사팀에 몇 번이고 찾아가서 시스템의 이름을 바꿔 달라고 항의했지만, 가명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인사팀의 입장이었다. 업체에서 전화가 걸려와 윤미자를 찾으면 그런 사람이 없다고 화를 내며 끊어 버렸고, 별도의 명함을 만들어서 윤슬아 팀장으로 일을 해서 업무에 많은 혼선을 가지고 왔다. 슬아는 항상 계절과 상관없이 저승사자처럼 올 블랙의 착장과 웜톤의 메이크업으로 회사에 출근한다.    

  

"현애 씨는 어디서 일하다 온 거예요? 감각이 남달라.“ 

    

“아 저요? 뉴욕이랑 파리 왔다갔다 했죠.”     


“그 뭐지, 지향하는 콘셉트가 다 보여주겠다 뭐 이런 건가?"     


"네? 다 보여주겠다 콘셉트라뇨?"     


"미사 어패럴은 우아하고 클래식함이 생명인데 현애 씨가 제안한 거는 정반대 같아서. 어디 가서 미사 어패럴 라인업이라고 말하기가 뭐할 것 같거든.”     


친절하게 대답을 하던 현애는 슬아의 예상치 못한 발언에 폭발하고 말았다.      


"야! 너 뭐라고 했어? 이년이. 돌려 까는 것도 고상한 척하면서 까네. 그런 거 말하고 싶으면 직접 대표이사님께 말하지? 그 앞에서는 한 마디도 못 하면서."     


"너? 너라고 했어?"     


"그래, 너 몇 살인데? 내가 너보다 20년은 더 살았다. 이년아."     


난생처음 들어보는 모욕감에 슬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현애는 싸울 때 자리를 뜨면 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슬아가 자리를 먼저 피해 버렸기에 자연스럽게 이번 싸움의 승자는 현애 자신이었다. 현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자리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면 영업팀에 전화를 걸었다.    

  

“네, 신규브랜드팀 정현애입니다. 방금 대표이사님 컨펌났습니다. 후속 미팅 잡고 공지 드리겠습니다.”  

   

그날 윤슬아 팀장은 다시 사무실로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반차를 냈단다. 묘한 승리감에 현애는 더욱 기분이 좋아지었다.     


‘미자, 고년 고소하다.’     


현애의 추진력은 놀라웠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을 뒤져서 도매상들과 컨택하여 미팅 날짜를 잡았다. 이제 뉴욕으로 날아가서 미사 어패럴의 새로운 라인업을 소개하고 계약을 성사시키면 되는 것이었다. 요즘 현애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하는 윤 팀장을 보자니 현애는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다음 날 뉴욕을 간다는 생각에 흥분 상태였다. 릴랙스하고 잠을 청하려고 와인을 한 병 사서 집으로 갔다. 와인을 사지 않아도 집에는 온갖 주류들이 가득 차 있지만. 와인을 몇 잔 들이키고 현애는 재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애 씨, 오랜만이야? 잘 지내?"  

   

"자기, 나 뉴욕 가는데 뭐 필요한 거 없니?"     


현애는 조금 취기가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어머나, 현애 씨. 드디어 뉴욕 가는 거야?"     


"응, 바로 내일 출국이야!!!!"     


"축하해. 역시 원하는 대로 멋지게 사는구나. 현애 씨는"     


"멋지게는 무슨…. 아무튼 자축하려고 와인 한잔하고 있다가 자기 생각이 났어. 그래도 동기 중에 자기랑 얘기가 제일 잘 통했던 것 같거든… 같이 외로운 처지고…. "     


"현애 씨, 오늘 술 많이 마시면 안 돼. 내일 출장이잖아."    

 

"알아~ 안다고. 근데 씨발 왜 이렇게 외로워. 젊어지니까 더 외로운 것 같아. 기억들이 더 생생해져서 썅. 옛날 그 개새끼가 생생하게 떠올라. 10년이나 기다렸는데. 염병할……그 새끼가 내가 다 늙어버리니까 결혼 못 하겠다고 해서…… 그 새끼는 존나게 잘 살아.. 아들 딸도 그 뭐야. 지처럼 검사 만들고 변호사 만들고…… 그 새끼는 증강 주사 안 맞아도 행복하다니까! 나처럼 맞을 필요가 없는 거야……"     


"현애 씨! 취했지? 내일 어떻게 하려고 그래. 현애 씨, 안 되겠다. 주소 좀 불러봐. 내가 가서 좀 도와줄게."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재정은 수 십번 전화를 다시 걸어봤지만, 도무지 받지를 않았다. 재정은 현애의 주소를 몰라서 안절부절못했다. 동기들 몇한테 물어봤지만 아무도 현애의 집을 몰랐다.     


다음날 현애는 뉴욕행 비행기를 놓쳤다. 기존 거래처 외에는 잘 만나주지 않는 거래처와 약속을 어렵게 잡아놓은 상태였다. 현애는 그 거래처와 미팅을 잡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활용했고, 사업 기획안에도 꽤 공을 들였다. 그런데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다. 현애가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비행기는 떠난 시각이었고, 회사에서 전화 100통 이상의 부재 전화가 찍혀 있었다.     


현애는 아침에 널브러진 와인 병들과 너무도 밝은 햇살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씨부럴, 내가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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