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고밀도 Apr 11. 2021

09. 선택

노인 범수

범수


"사장님, 제가 또 어떻게 이 짓을 또 합니까? 아시잖아요. 태성 그룹에서 제가 자른 사람들만 한 트럭인 거. 이러려고 제가 증강 주사 맞고 일을 시작한 게 아니에요."     


"한 팀장님, 저도 알아요. 그런데 구조조정 없이는 지금 우리 회사가 문을 닫게 생겼잖아요. 몇 명만 희생하면 또 기사회생할 기회가 열리는데……. 회사 임원진들도 해고를 피하고 싶어 해요. 그렇지만 일단 회사가 살고 봐야지요. 팀장님께서 주도해 주셔야 사람들이 신뢰를 하고 따를 거예요. 그러니 딱 한 번만 부탁합시다."   

  

이미 명단은 정해져 있었고 범수에게 사람들을 만나 통보를 하라는 거였다. 명단을 보니 찬이 이름이 보였다.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찬은 성실했지만, 마음이 약해서 실적이 잘 나오는 편이 아니었다. 유독 찬의 최근 실적이 저조해서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범수는 8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그 어느 때보다 머리가 맑았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 또한 선명하다는 것이 범수에게는 부작용이었다. 증강 주사를 맞고서는 두뇌 회전도 빨랐지만 잊고 있었던 작은 기억들까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10년이 넘은 일이지만 그날의 일이 매일 범수를 괴롭혔다. 그날은 회사생활에서 마지막으로 정리해고를 진행하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더 이상의 해고 통보는 하지 못하겠다고 전무에게 대들었다. 회사 문을 나서자마자 누군가 범수에게 오물을 던졌다. 범수는 누가 던졌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았다. 동료들과 선후배들에게 일자리를 빼앗은 후, 누군가는 자신에게 칼을 꽂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지냈다. 잠시 멈추고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분노로 울부짖는 목소리가 범수의 뒤통수를 때렸다.     


"어떻게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멀쩡히 다녀. 짐승만도 못한 놈아."     


노인의 목소리였다. 수척한 노인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물류 팀에서 근무했던 소 과장의 어머니였다. 범수는 소 과장만은 해고를 막아보려고 했다. 그의 딱한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일찍 출근해서 부지런히 담당업무를 끝내고는 정시에 퇴근해서 아픈 노모를 돌봤다. 노모는 종양이 발견됐지만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유지해왔던 노모의 암 보험을 소 과장의 동생이 큰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합의금이 필요하여 해지했다. 어려운 형편이라서 보험을 다시 들기 어려웠고, 더구나 나이가 많은 노인의 보험료는 생활비에서 떼어 지불하기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해지하고 2개월 만에 노모의 몸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다. 인생이 너무 야속했다. 치료비가 부담스러워 집에서 부모를 돌보는 소 과장이 항상 마음에 쓰였다. 그래서 범수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소 과장을 제외하고 명단을 위로 올렸는데 다음 날 공지를 보니 다시 포함되어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소 과장이 감당할 수 있을까……’     


소 과장은 어떠한 항의도 면담도 하지 않고 회사를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 뒤 아픈 노모가 회사를 찾아와 한바탕 회사 로비를 뒤집어 놓았다. 아들을 살려 내라고 로비에서 목 놓아 울었다. 소 과장은 지방의 한 모텔에서 죽은 지 며칠 만에 발견되었다. 같이 해고를 당한 김대리와 함께. 소과장은 유서 한 장도 남기지 않았다. 범수는 소과장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이름을 적지 않는 두툼한 조의금만 동료 편에 전달했다.      

범수는 그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그런데 다시 해고를 감행해야 하다니. 범수는 애초에 증강 노인 프로젝트에 지원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고개를 저었다. 다시 일을 하게 된다면 다를 줄 알았다. 지난 세월 자신의 잘못을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다. 두 번째로 인생의 기회가 주어졌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갈 줄 알았는데 왠지 제자리를 걷는 듯했다.     


"나는 애초에 조직에서 그런 류의 쓸모만 있던 사람이야. 제길."     


한참을 옥상에서 한숨을 푹푹 쉬다가 자리로 돌아오니 찬이 커피를 올려두었다.     


"아까 회의 때 샀는데 몇 잔 남아서 챙겨놨어요."     


해맑게 웃는 찬을 보니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범수는 그 날 한 잠도 들지 못했다. 충혈된 눈으로 출근해서 오래 망설인 끝에 회사 게시판에 공지를 띄웠다. 공지에는 단 한 사람의 해고자 명단만 있었다.     


[게시판 공지]‘한범수 팀장’     


그리고 바로 짐을 챙겨 회사를 나왔다. 찬이 출근하기 전이라서 쪽지 하나를 남겼다.     


[메모]'찬 대리님,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박스에 짐을 챙겨 회사 문을 나섰다. 회사 앞 벤치에 앉아 편의점에 산 따뜻한 캔 커피를 땄다. 몇 모금 마셨는데 편의점에서 낯익은 얼굴이 문을 나왔다. 10년 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어제 본 얼굴처럼 생생했다. 기준은 편의점 문을 열면서 바로 앞 벤치에 앉아있는 한 사내를 발견했다. 벤치를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입구라서 피할 길이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두 사람이었다. 둘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멈춰 있었다. 범수가 먼저 일어서서 다가가려고 하자 사무실에서 챙겨 나온 박스가 넘어지면서 안에 있던 물건들이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재빨리 기준이 다가와서 물건을 같이 담아 주었다.     


“아침 드셨어요?”     


기준은 아빠라고 차마 부를 자신이 없었지만 어렵게 말을 건넸다. 범수는 목이 메어 대답할 수 없었다. 그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국밥을 맛보았다.


 

 

 

 

이전 08화 08. 오해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증강 노인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