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고밀도 Apr 11. 2021

10. 경쟁 PT

노인 재정/청년 지민

재정/지민


"확실히 스케일이 다르긴 하네요. 대한민국 메이저급 광고회사들이 모두 달려든 것 같아요."     


"그러네요. 앗, 저기 L사 CD네! 옷 방송에서만 봤는데 실물이 훨씬 좋으시네요."     


"아, 저분 너무 인사이트 있지 않아? 그냥 본투비 광고쟁이!"     


같이 PT를 준비한 직원들은 주변을 살피며 이 긴장되는 분위기를 즐겼다. 오늘 준비한 발표 내용을 훑어보고 옷매무새를 보려고 화장실로 향했다. 컬러풀한 립스틱을 바른 입의 긴장을 풀기 위해 거울을 보고 ‘아에이오우’ 얼굴을 풀었다. 그때 누군가 화장실 칸에서 물을 내리고 재정이 서 있는 세면대로 손을 씻으러 걸어왔다. 지민이었다.     


"지민아. 너도 왔구나."     


"당연한 거 아냐? 이렇게 큰 광고 건인데.. 엄마 회사에서 엄마가 대표로 올 줄은 몰랐네."   

  

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지민은 화장을 고치면서 무심하게 말을 내뱉었다.     


"한이가 할미 보고 싶다고 하대."     


순간 재정의 마음은 녹아 내렸다.


"한이 고놈이? 할미가 주말에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해. "     


"오늘 엄마가 프레젠터야?"     


"응, 엄마 목소리가 딕션이 좋잖아."    

 

"귀에 잘 꽂히기는 하지. 나 이번 거 꼭 따낼 거니까 긴장해. 나 간다."     


재정은 이렇게 마주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 달은 더 냉전이 이어졌을 테니까. 지민과 싸울 때면 우리는 늘 이런 식으로 화해를 했다. 먼저 미안하다고 하기에는 둘 다 자존심이 강해서 버티고 버티었다. 그러다 때로는 스팸을 구워 냄새 하나로, 어떨 때는 축구경기 하나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냈다. 오늘은 화장실이 화해의 매개체가 되어 주었다. 재정은 갑자기 체증이 가시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그런데 지민이가 한쪽 의자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점점 지민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엄마…. 한이가 지금 응급실이래. 이모님이 커피 마시려고 끓여놓은 물을 한이가 엎었나 봐…. 나 가봐야겠어."     


지민이는 서둘러 가려다 발을 헛디디고 넘어졌다. 한이가 다쳐서 응급실에 경우는 처음이라 지민은 더욱 당황한 듯싶었다. 재정은 지민이를 붙잡아 세웠다. 넋이 나간 지민이의 어깨를 꼭 붙잡고 눈을 마주쳤다.  

   

"지민아, 엄마 봐봐. 너 이거 끝내고 와. 엄마가 지금 한이한테 가볼게. 괜찮을 거야. 알았지?"     


"엄마, 아냐 내가 가야지."     


"지민아, 너 이 정신으로 운전도 위험해. 엄마가 가서 한이 살펴볼 테니까 정신 차리고 일 마무리해."   

    

"엄마 PT는……"     


"엄마는 팀원들한테 대신 부탁하고 가면 되니까. 걱정 말고 알았지? 다른 젊은 팀원들이 더 발표 잘해. 그니까 엄마는 걱정 말고 대신 너는 정신 차리고 하는 거야!"     


"응.. 엄마 미안해……"     


"미안하기는 엄마가 선택한 거야."     


그렇게 서둘러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향했다. 팀원들에게 전화를 하고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김준영 대리가 스크립트를 같이 짜 주었기 때문에 발표를 대신 맡겼다. 워낙 긴장을 하지 않고 돋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터라 다행히 기회라고 생각해주었다. 택시 안에서 재정은 지민이가 실수하지 않고 잘 해내길 간절히 빌었다.    

 

응급실에 가자 한이는 목이 쉬어라 울었는지 할미를 부르는 목소리가 걸걸했다. 한이의 몸은 붙같이 뜨거웠다. 몇 시간을 우느라 온 몸에서 열이 발산된 모양이다. 왼쪽 팔에 붕대를 감고 축 처져있는 한이를 뒤로 하고 간호사에게 상태를 들었다. 


화상 부위는 넓었지만 이모님의 빠른 대처덕분에 약간의 흉터는 남겠지만 살이 늘러붙지는 않았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께 그 말을 듣고 나니 재정은 힘이 쭉 풀렸다. 지민에게는 상황을 알려서 침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모님도 많이 놀란듯하여 일찍 퇴근하시라고 하고 한이와 집으로 돌아와 시간을 보냈다. 고요한 집에 들어와 한이와 소파에 앉았다. 순간 25년 전, 퇴사하던 날 집으로 돌아와 고요한 소파에 앉았던 예전의 재정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      


“제길, 하늘이 도와주질 않네.”      


무릎을 베개 삼아 잠든 한이를 내려다보니 헛웃음이 났다. 웃다가 갑자기 눈물도 흘렀다. 감정이 복잡했다. 재정의 몸에 기대어 곤히 잠든 한이를 보고 있자니, 25년 전의 선택이 달리 보였다. 긴 세월을 타의에 의해 나의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도 지금도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려고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그간 저 심연에 억눌렸던 마음이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재정은 소파에 기대어 속이 시원해지는 눈물을 한 동안 흘렸다.      


지민이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이부터 확인하고 지민은 눈물을 터뜨렸다. 지민이 눈물은 언제고 재정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다. 지민이 재정을 와락 껴안았다.    

 

"엄마, 덕분에 잘 마쳤어. 고맙고 미안해."   

  

"미안하긴, 밥도 못 먹었지?"  

   

"응, 한 끼도 못먹었어. 우리 치맥 할까?"     


"그래, 오랜만에 나도 맥주 좀 마셔야 겠다. 오늘 얘기도 들어보자."     


지민은 현장에서 자신 순서 직전에 재정으로부터 한이가 무사하다는 문자를 받았다. 덕분에 프레젠이션을 무사히 마무리했다. 하지만 워낙 클라이언트가 포커페이스여서 결과를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어쨌든 실수 없이 준비한 내용은 모두 말했으니 후회는 없다. 지민은 재정의 팀에서 발표한   아이디어가 신선했다고 재정을 치켜세웠다.     


"엄마, 나 알고 있었어. 그때 엄마가 약으로 버텼던 거. 근데 도저히 나도 감당이 되지 않아서 모른 척하고 살았어. 한이를 키워보니 엄마가 무슨 정신으로 회사를 다니고 고집불통인 나를 키웠나 싶어."  

   

재정은 지민이가 자신의 우울증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알고 있었니? 엄마가 미안하다. 그런 걸 알게 해서는 안됐는데. 엄마 딴에는 모르게 하려고 그렇게 감췄는데 실패했네."     


"어느 날 학원 땡땡이 치고 놀고 있는데 엄마가 병원 들어가는 거 봤어. 건물에 딸랑 병원은 정신과 하나였거든. 건물에서 나와서는 약국으로 가더라고, 내과나 피부과도 아니고 정신과라 생소해서 뭔가 싶었지. 그래서 몰래 장롱의 엄마 비밀 공간 있지? 거기를 좀 몰래 살펴봤지. 거기에서 약봉지를 발견했어."     


"세상에…… 그 비밀 공간을 알고 있었다고? 맙소사."     


"엄마, 그래도 잘 버텨 줘서 고마워. 내가 심술부린 것도 미안하고. 엄마를 일에 다시 뺏긴 기분이 들었던 것 같아. 엄마 짠하자. 두 광고쟁이를 위하여!"     


재정은 그토록 원하던 광고 PT를 다시 포기하고서야 오래도록 방황하며 찾아 헤맸던 진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전 09화 09. 선택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증강 노인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