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가 태어난 날 나는 죽으려 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는데 이상할 만큼 일이 안 풀렸다.
‘정의’는 과연 승리하는 것일까?
정직하고 겸손하게, 착하게 살려고 할수록 피해만 보는 것 같았다.
한국사회에서는 착하게 살면 안 된다고는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착함이 나오고는 한다.
“착하게 살아도 돼, 대신 나를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과
내 메모장에는 ‘이제는 진짜 행복해지고 싶다’라는 문장이 있다.
그 문장을 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나를 괴롭혔던 애들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뿐더러 날 기억조차 못 하는 것 같다. 그들을 벌주려면 안 좋았던 기억을 모두 끌어와야 하는데, 그럴수록 힘들어지고 아팠기에 흘린 눈물만큼 더 행복해지자고 마음먹었다.
소설 속 주인공 ‘지안’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해 고른 이름이다.
자퇴한 후 백지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에 개명을 고려했다.
내가 개명했으면 ‘김지안’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탄생을 축하하며 선물 받은 이름이자 굴곡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내온 ‘수림’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나의 10대이자 차갑고도 아팠던 시절 실제 이야기들을 모두 담았다.
내 옆자리에 앉으면 더럽다고 말하고, 수학여행은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다. 급식도 못 먹은 날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왕따였다. 선동하고 괴롭혀 온 이들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과거를 언급하는 것이 큰 용기지만, 피해자가 가해자로 되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의 잘못을 기억하고, 크게 반성하기를 바란다.
나의 상처가 하나의 예술이 되어, 같은 상처를 겪어 본 이들에게 위로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일침을 가했기를 바란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그래서 기록을 중시하듯이 글은 오래 볼 수 있고 기억하기 참 쉽다는 장점이 있다.
내 소설이, 이 작은 글자들이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게 새로운 학교생활 규칙의 전환점이 되었으면 한다.
엄마와의 에피소드만 제외하면 이 소설의 내용은 전부 실화다.
학교폭력은 단순히 ‘멈춰!’ 라거나 실태조사로 해결되지 않는다.
애들은 아주 영악하다.
다니던 무리와 싸우거나 교실 내 따돌림을 당한다 해도 새로운 친구에게 다가가기는 매우 어렵다. 누군가 죽거나 떠나야만 해결되는 작은 세상이다. 이건 내가 18살 때 깨달은 현실이다.
내 글을 읽은 후에도 폭력은 더 교묘해질 수 있다.
반에서 혼자 있는 애를 알면서도 묵살하고 투명 인간 취급한 채 또 다른 타인의 비도덕적인 행동을 비판한다.
그러나 학교폭력은 상대할 수 있다. 바로 ‘다수가 주는 위압감’이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한 영향력이 되어 홀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보호할 수 있다.
우리가 불협화음인 세상을 멋진 하모니로 변화시켜야 한다. 조율하고 맞춰가면서,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누구도 제외해선 안 된다.
<살아있어 줘서, 살아와 줘서 고마워>
나였을 수많은 주인공에게 위로를
한 줄의 거짓도 쓰지 않았으며, 성실하게 살아온 시간들이 훗날 나를 지켜줄 거라 믿는다.
동시에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에게 경고한다.
어떤 인연으로도 다시 만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