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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장애로 보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사이보그가 되다>, ‘느티 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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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x김원영, 사계절
사이보그의 매력적인 이미지는 활발하게 소비되지만 실제로 기술과 결합하여 살아가는 장애인 사이보그의 삶은 미래 담론의 중심에 놓이지 못한다. (...) 장애인 사이보그의 삶은 현재에 관한 이야기이자 미래에 관한 이야기다. (p.39)

매체가 호도하는 세련된 사이보그 이미지의 허상을 비판한다. 유기체와 이음매 없이 매끄럽게 연결되는 기계는 없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는 말이다. (p.137)

장애(disability)는 단지 몸의 특정한 기능 결여(dis-ability)된 상태가 아니라 ‘정상이 아닌 몸’이라는 사회적 평가를 획득한 일종의 신분(지위)에 가깝다. 따라서 고도로 발전한 테크노로지가 기능의 결여를 보완한다 해도 여전히 장애는 존재할 수 있다. (p.155)

- 김초엽x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중 발췌


<사이보그가 되다>는 ‘장애를 장애로 보는 것이 과연 옳은가’를 질문하는 책입니다. 장애는 사회 보편적으로 ‘결함’으로 인식됩니다. 있어야 할 기능이 존재하지 않거나, 있어서는 안 되는 기능이 신체에 첨가된 ‘극복해야 할 대상’ 중 하나로 여겨지죠. 그래서 광고를 비롯한 영화, 드라마, 소설 등 수많은 콘텐츠들에서는 장애를 결핍의 상징처럼 사용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 승리의 서사를 다루고 싶을 때 장애가 종종 등장하는 건 이 때문이죠. 이런 류의 스토리는 대체적으로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장애가 있는 인물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문제를 맞닥뜨리고, 고전하지만, 주변인들의 도움이나 말도 안 되는 의지를 동원해 결국 그 문제를 이겨냅니다. 그리고 관객은 마지막에 눈물을 흘리며 벅찬 감동을 느끼죠.


이런 방식의 이야기는 브랜드 가치를 각인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책에서도 언급된 KT의 2020년에 방영했던 공익광고 ‘제 이름은 김소희입니다’로, 이는 기가지니 AI의 음성 합성 기술을 활용해 농인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 광고의 서사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김소희’라는 농인이 등장하고, 기가지니 AI 연구진은 김소희 씨의 구강구조와 가족들의 목소리를 활용해 가상의 목소리 구현에 힘씁니다. 연구진이 피땀 흘려 만들어낸 가상의 김소희 씨 목소리는 가족들에게 전달되고, 평생 처음으로 딸/형제의 목소리를 들은 부모님과 가족들은 눈물을 쏟아냅니다. 광고를 보던 시청자도 역시 눈물을 이겨내지 못하고, 댓글 창은 감동의 도가니로 물결치게 되죠. ‘따뜻한 기술’은 이렇게 또 한 번 사람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평생 소리를 잃었던 한 사람을 위해 목소리를 선물한 KT, 그들의 바람직한 시도는 오늘도 세상을 한 단계 나은 모습으로 만들었습니다.


장애를 다루는 전형적인 감동 코드의 광고죠. 이런 유형의 광고는 팍팍한 일상 속 한 줄기 빛이 되어 줍니다. 이런 것이 기술의 발전이라면, AI 시대로의 진입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은 희망이 샘기도 하죠. 하지만 과연 모든 이들이 같은 마음일까요?


놀랍게도 KT의 공익광고는 전형적인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풀어낸 장애 서사로 평가됩니다. 장애인을 철저히 대상화한 ‘감동 포르노’라면서요. KT 광고가 예시로 사용되었을 뿐, 이와 유사한 코드의 광고들 또한 비판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비장애인들 중에는 이러한 주장을 읽으며 ‘왜?’라고 묻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을 위해 지금부터 두 가지 내용을 추가로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두 가지 항목은 KT 광고가 비판받는 결정적인 이유들입니다.


첫째, 광고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위 광고의 주인공은 ‘김소희’ 씨지만, 그녀는 ‘연구진이 해낸 위대한 업적’을 증명하는 트로피의 이름에 불과합니다. 광고에서 돋보이는 영웅은 인공지능을 다루는 연구진이고, 김소희 씨는 광고 내내 시혜의 대상인 ‘농인’에 머무릅니다. 그녀의 장애는 극복해야 할 결함에 불과하고요. 이러한 수동적인 묘사는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편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 역시 장애인은 부족한 존재야. 그러니 비장애인이 노력하고 개발해야 해. 더 나은 세상에서 더 나은 모습으로 살 수 있도록.’라면서요. 이러한 사고 속에서 비장애인은 세상을 바꾸는 강한 존재가 되고, 동시에 장애인은 더 약한 존재로 전락해 버립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죠.


둘째, 농인은 반드시 말을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이 황당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농인들에게 목소리는 필수재가 아닙니다. 많은 수의 농인들에게 음성 언어는 모국어가 아니죠. 태생부터 말하지 못하기에 그들은 수화를 가장 먼저 배우고, 음성 언어는 그 후에 학습하게 됩니다. 어떤 농인들은 음성 언어를 외국어와 같다고도 말합니다. 그만큼 낯설고 어색하다는 얘기죠. 비장애인 대다수가 수화에 능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농인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음성 언어의 필요가 있긴 하지만, 수화를 버리고 음성 언어로 대체해야 할 만큼 목소리는 농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어쩌면 ‘김소희’ 씨의 목소리가 절실했던 건 그녀의 가족이지, 그녀 당사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목소리’는 어떤 이상적인 신체 상을 무의식적으로 강요하는 세상이 만들어낸 ‘억지 감동의 선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이보그가 되다>는 이렇게 뒤집힌 시선에서 장애를 서술합니다. 청각장애가 있는 김초엽과 기동성 장애가 있는 김원영, 두 저자가 펜대를 잡은 만큼 그들이 기술하는 장애의 입장들은 충격적일 정도로 세밀하고도 진솔합니다. 장애가 있는 당사자만이 고백할 수 있는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관점들로 가득하죠.


수많은 장애 관련 논제들 중, 그들이 책 전반에 걸쳐 가장 주목하는 건 ‘장애가 있는 몸’입니다. 장애의 유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시적인 신체 단계의 장애와 그를 극복하기 위해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 그리고 과학과 기술이 미처 포괄하지 못하는 사회적인 인식을 종합적으로 논하죠. 두 저자는 현대의 장애인을 ‘사이보그’의 한 모습으로 정의합니다. 귀가 어둡다면 보청기를 착용하고, 걸을 수 없다면 휠체어의 도움을 받는 등, 현대의 장애는 필연적으로 과학 기술과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기술과 과학의 발전에 따라 장애인들의 삶도 이전보다는 평탄해졌습니다. 현재 인류는 장애의 극복을 넘어 장애의 종말을 꿈꾸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죠.


하지만 장애와 비장애인의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 활발해질수록,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장애를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보완하는 것이 가능해질수록, ‘장애’는 점차 확고한 결함이 되고, ‘비장애’는 더 공고한 정당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죠. 장애를 극복하는 기술이 예외 없이 ‘비장애의 형상’을 목표로 하기에, 장애를 극복하려는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장애에는 ‘반드시 삭제되어야 하는 문제’라는 프레임이 점점 더 무겁게 얹어지게 됩니다. 장애를 돕는 기술이 되려 장애에 대한 편견을 키우는 장치로 작용하는 것이죠.


책의 두 저자는 사회에 만연한 이러한 통념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기술의 발달이 장애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동의하면서도, 비장애 신체로의 지향이 반드시 장애의 해법이 될 수 없음을, 기술과 과학의 발전이 무조건적인 장애의 구원이 될 수 없음을, 그 이전에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어떠한 단계가 있음을, 수많은 예시와 논문, 연구와 이론을 통해 논리적으로 설명해 냅니다.


가장 직관적인 맹점으로는 보조 기기가 유발하는 불편함과 통증이 있습니다. 모든 장애를 보조하는 기기들과 인간의 신체 사이에는 짓무른 피부가 존재합니다. 플라스틱, 실리콘과 철이 만들어내는 이물감,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느껴지는 근육통과 신경통은 비장애인이 볼 수 없는 장애인만의 경험이죠. 하지만 비장애인에게 기계와 신체 사이의 ‘이음새’에 존재하는 짓무른 상흔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비장애인이 여러 부작용들은 숨겨지고 가려지니까요. 결국 비장애인에게는 보조 기기를 착용한 장애인의 ‘매끈한 외형’만 보여지게 됩니다. 발달한 기술에 구원받은 듯한 장애인의 모습은 비장애인의 신체적 위상을 높이며, 장애인의 장애를 더욱 위축되게 만들죠. ‘이상적인 신체 형상’이라는 편견은 더욱 튼튼해지고 말이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점은 이런 기본적인 단계에서부터 어긋납니다.


비장애인이 보지 못하는 건 비단 장애인의 신체적인 통증만은 아닙니다. 둘의 관점은 존재론적인 인식의 영역에서도 벌어지게 되죠. 비장애인들은 흔히 장애인을 ‘결함 있는 존재’로 치부하며, 그들의 장애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보곤 합니다. 장애인 스스로도 장애를 ‘장애’라고 여길 거라고 굳게 믿으면서요. 하지만 비장애인의 보편적인 인식과는 달리, 장애인의 자아상은 장애인의 수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장애를 넘어야 할 산으로 보지만, 또 다른 이들은 ‘장애가 있는 그 상태’ 자신의 본모습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수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기거나 팔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본연의 나’로 정의하는 것이죠. 그래서 장애인 중에는 인공 와우를 제거하거나 의안, 의수, 의족을 착용하지 않기도 합니다. 신체적인 불편함이나 통증 때문에 기술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조 기기에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 진정한 자신이 아니라 여겨져 기술의 도움을 거절하기도 합니다. 일상에서 겪는 자잘한 불편이 극복해야 하는 결함이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입니다. 그들에게 장애란 인류의 신체가 지닌 다양성에 불과하며, 피부색이 각기 다르듯, 누군가에게 있는 것이 그들에게는 없고, 누군가에게 없는 것이 그들에게는 있을 뿐이니까요. 그들은 따라서 온정적인 시선 또한 거부합니다. 다름은 동정의 이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이죠. 잠깐의 도움은 필요로 할지 몰라도요.


책의 두 저자는 이처럼 기술과 결합된 신체와 그 신체를 소유한 사람들의 방대한 관점을 서술합니다. 위에 서술한 두 가지 항목은 장애인의 신체와 그 몸에 결합하는 기술에서 파생된 무수한 관점 중 지극히 일부를 나열한 것뿐입니다. 비장애인의 수만큼 인간이 다양하듯, 장애인의 수만큼도 인간은 다양합니다. 장애의 유형만큼이나 장애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스펙트럼 또한 다채롭죠. 하지만 우리 사회는 ‘장애’라는 거시적인 카테고리에 모든 장애인을 가둔 채, 그들을 같은 모습으로 규정짓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한 시선에는 대체로 수동성과 의존성이 담겨 있습니다. 장애를 유약하고 자립적이지 못한 존재로 정의하는, 일관된 편견이 내재해 있죠. 하지만 장애는 하나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의 모습이 될 수도 없죠. 신체 부위와 기능만큼 장애는 다양하고 방대하니까요. 그들을 하나의 시선으로 묶어버리는 것은 비장애인 전체를 ‘인간’이라는 하나의 단어에 속박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책을 읽으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소설 원작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영화에서 걷지 못한다는 특징은 주인공 조제를 이루는 장단점 중 하나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다루어집니다. 키가 평균보다 크다거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거나 집이 가난하거나 하는 등, 한 인간을 구성하는 여러 특성 중 하나로 거론될 뿐이죠. 영화에서 장애는 여전히 부족한 부분으로 여겨지지만, 소극적인 성격이나 작은 키 정도의 콤플렉스 정도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관객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한 사람으로서 그녀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걷지 못하는 그녀의 다리가 아닌, 사랑 앞에 망설이고, 용기 내며, 이별에 처절해 하고, 결국에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한 여자로 그녀를 받아들이게 되죠.


장애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어쩌면 이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피부색과 눈 색깔이 다르듯, 시력이 상이하고 머리숱이 천차만별이듯, 그저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을 구분 짓는 신체적인 특징. 장애는 단지 그런 정도의 요소가 아닐까요? 이상적인 인간상에 부합하지 않는, 반드시 고쳐내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일시적인 도움이 필요한 특성 정도인 것이죠. 안경을 썼다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지 않듯이. 키오스크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잠깐의 도움과 더 잘 기획된 기기일 뿐이듯이. 장애 또한 감정적인 연민을 수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방적인 구원 의식은 차별을 내포한 오만함일 뿐이죠. 대등한 관계성 속에서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온전히 구제하는 구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장애와 비장애가 대등하다면, 동정과 연민에 앞서 필요한 건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을 그 자체로 봐주는 것. 대단하다고 칭찬하거나 추켜세우지 않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안절부절하지도 않으며, 나와 다른 이질적인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 혹여 기능적으로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간단하게 도우며, 스스로 할 수 있는 부분은 각자가 혼자서 하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필요 이상의 사견을 담지 않는 담백한 태도’만큼, 성공적인 인간관계의 공식은 없을 테니까요.



이 책을 우연히 만날 수 있었던 이유


느티 책방




< 우연히 만난 책들 >


책방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방을 방문할 때마다 공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을 한 권씩 구매합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책들을 그냥 묵혀 두기 아까워 책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 우연히 만난 책들 >은 그렇게 탄생하게 된 글 모음집입니다.

글에서는 책방에서 책을 고른 이유와 책에 대한 소소한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달 모나 Monah the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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