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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arlie Jul 26. 2019

한여름의 기이한 축제

<미드소마>와 <위커맨>

영화가 어울리지 않는 계절은 없다. 영화는 모든 계절을 다 담아왔다. 가장 잘 어울리는 특정 계절을 손꼽기는 어렵지만, 장르의 영역은 다르다. 여름은 누가 뭐라고 해도 호러의 계절이다. 작년 <유전>을 통해 대중에게 강렬히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아리 에스터 감독은 <미드소마>를 들고 다시 찾아왔다. 호러와 떼놓을 수 없는 어둠을 철저히 배제하고 강렬한 햇빛 아래 공포를 키워 나간다.

꽃이 깔렸다고 저승길에 현혹되면 안된다.

 유럽의 하지제는 꽤 오래전부터 행해졌던 고유한 전통이다. 영미 문화권이나 우리에겐 그리 익숙하지 않다.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호기심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때론 막연한 두려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영화는 그 지점을 잘 포착한다. 유럽 문화와 비교해 미국 문화의 짧은 역사와 얕은 뿌리는 유럽 문화에 대한 동경과 질투로 작용하기도 한다. 미국으로 온 유럽의 교환학생이 들려주는 유럽 문화는 미국인의 호기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이들이 인류학을 전공한다는 점에서 현 인문학의 기초가 된 유럽 문화를 직접 체험할 기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과 같다.

 일찍이, 하지제를 다룬 호러 영화가 이미 있었다. 컬트영화 팬들에게 추앙받는 <위커맨>이다. 스코틀랜드 지방의 서머아일 섬에서 열리는 하지제 기간에 한 소녀의 실종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방문하는 경찰관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는 경찰관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심과 섬 주민들이 절대적으로 따르는 이교와의 갈등을 바탕으로 한다. 사건 수사 미스터리, 민속음악을 통해 표현된 관능과 민족지학을 덮어쓴 사악함을 상당히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많다. 무섭거나 놀라게 하는 장면이 없다는 점, 겉으론 평화롭게 보이는 마을, 하지제, 대립되는 두 양상(미국 문화와 유럽 문화, 기독교와 이교, 집단과 개인), 유인되어 와서 제물이 된다는 점 등이다. <미드소마>는 <위커맨>이 제공한 레퍼런스를 감독의 입맛에 맞게 혹은 현시대에 맞춰 영리하게 변주한다. 종교적인 갈등을 캐릭터의 자기 연민을 이용하는 집단의 영향력으로 대체한다. 매년 있는 하지제가 아닌 인적이 드문 공동체 마을의 90년 만에 벌어지는 하지제라는 설정을 통해서 호기심을 자극한다. 90년이라는 주기와 매년 행하는 하지제의 차이는 목적에 있다. 매년 행해지는 하지제는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90년 주기는 공동체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한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옳다고 믿고 있다.      

 <미드소마>의 대니와 <위커맨>의 하위를 파멸로 몰고 가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대니는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의 아픔으로 정서적으로 나약한 상태이다. 아리 에스터의 전작 <유전>에 이어 가족의 죽음을 통해 캐릭터에 정서적 틈을 만들어 낸다. 이 틈을 통해 결국 캐릭터는 무너진다. 대니의 틈을 파고드는 공동체의 말 한마디와 배려의 행동은 기괴하고 석연치 않은 집단과의 유대를 허용하고 만다. 온전히 의지할 대상이 없는 절대적 혼자인 자신에게 다가온 집단의 회유는 설령 스스로 파멸로 몰아넣을지라도 거부할 수 없는 오랫동안 그리웠던 가족을 대체하는 소속감을 제공한다. 하위의 경우는 오히려 철저히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지킴으로 파멸한다. 교리를 지키기 위해 관능의 유혹을 견디고 직업의식의 신념을 위해 끝까지 수사를 포기하지 않지만, 그의 그런 성격은 오히려 마을로 유인할 대상이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으로 작용한다. 그가 지켜낸 순결서약의 맹세가 제물로서의 가치를 증명한 셈인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이 절대적인 법

 <미드소마> 속 공동체를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는 선택되고 계획된 번식과 생애주기 그리고 천연 환각제이다. 공동체와 우리 사회는 생활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많은 부분이 유사하다. 수면제가 아니면 잘 수 없을 정도로 약에 의존하는 대니와 걸핏하면 대마초를 피워대는 남자들처럼 끊임없이 약물에 의지한다. 인위적인 무언가에 의지하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아리 에스터는 특수효과를 통해 환각 상태의 일그러짐을 매혹적이고도 소름 돋게 연출한다. 우리가 옳다고 믿고 생각하는 가치들에 의해 결정되고 선택되는 순간들에 의해 인간의 삶은 유지된다. 그들 공동체 역시 그 가치와 방식이 다를 뿐 목적은 같다. 제물로 사람을 바치는 행위가 무서운 것이 아니다. 집단의 결정에 휘둘리는 개인의 나약함에 아무것도 거부할 수 없는 순간이 무서운 것이다. <위커맨> 속 하위는 제물로 바쳐지는 순간까지도 그토록 믿고 의지하던 신을 찾는다. 그의 기도는 공허한 외침과 같다. 자신의 믿음을 철저히 지키며 수행한 행동이 결국 비극이 되어버린 상황에서도 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바친 제물로 인해 풍족한 수확을 이룬다면 그들의 믿음은 더욱 굳건해질 것이며, 설사 반대의 경우라도 제물의 신성함을 탓하며 새로운 대상을 찾을 것이다. 하위는 그들의 노랫말을 듣고 경악하지만, 그들에겐 그들의 생활양식을 유쾌하게 즐기는 노동요에 지나지 않는다.    

 

 시점의 차이에 따라 누군가에겐 번영의 기도를 하는 축제, 누군가에겐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 된다. 쉽게 바뀌거나 변하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집단이 가진 진정한 무서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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