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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규 Jun 16. 2021

북클럽과 나, 인간의 존엄에 관하여

시사인 읽는 당신×북 클럽

마이클 샌델의 첫 번째 책을 읽은 게 봄의 시작 즈음이었던 거 같은데, 어느새 여름의 초입입니다. 공정하다는 착각을 덮고는 뛰었던 한낮의 서늘한 봄 풍경은 어느새 강렬한 태양에 자리를 내준 지 오래입니다.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을 읽고는 후줄근한 열기를 겨우 식힌 밤의 하천을 따라 뛰어 봅니다. 그렇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천변을 뛸 때면 그날 읽었던 책의 구절들이 생각납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삼 개월, 세 권의 책을 마음속에 담으며 하나둘 되새겨 봅니다.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한 뼘 정도는 올라간 듯하여 기뻤던 시간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달리기가 문학의 원천은 아니지만, 저는 그렇게 봄과 여름의 사이를 달리며 읽은 책을 곱씹곤 했습니다.


달리기를 할 때, 첫 일 킬로미터가 제일 어렵다고 하지요. 어느 페이스로 책을 읽어야 할지, 저자의 주장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나의 주관적 견해를 어느 선까지 투영해야 할지 많이 고민하고 시작했습니다. 저자의 생각과 그 생각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통계 속에서 자칫 속도를 줄였다간 끝내 걷게 되어 완주를 못 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거든요. 또한 독서 내내 책에 대한 가치 중립을 지키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읽지 않을 통계로 가득 찬 저자의 주장에 과몰입할 수도, 삐딱한 시선에 처음부터 끝까지 방어막을 치고 읽을 수도 있으니까요.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에서 샌델의 주장들을 읽어나갔습니다. 미국 사회와 비슷한 맥락이 많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지, 여러 주제에서 한국의 사회 현실이 얼핏 얼핏 보이더군요. 샌델은 책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능력주의가 만들어낸 공정이라는 신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그 신화 속의 기회는 결코 모두에게 공정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쉬이 이입할 수 있는 대학 입시와 능력주의로 시작되는 책은 그 이후 기술 관료의 등장과 소외되는 이들의 포퓰리즘, 능력주의 도덕의 역사, 학력주의 이면의 능력주의, 그리고 일의 존엄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맥락을 통해 현시대의 능력주의를 진단해내죠.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주장은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샌델은 문제를 직시할 뿐 처방을 내리는 데엔 주저했습니다. 현대 포퓰리즘의 등장이 능력주의에 의해 소외된 이들에 의한 저항임을 드러내면서도, 그 포퓰리즘을 없애기 위해 기술 관료적 사회를 개혁할 방안을 제시하지는 않았죠. 부의 양극화가 이루어낸 사회적 불평등을 가리키면서도, 그 양극화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애써 무시하고 지나가기도 합니다. 출발선이 다른 식민 피지배국들의 현재와, 여성, 유색인종, 성 소수자의 이야기는 커다란 담론에 함몰되고, 그 가운데 철학적 물음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는 일의 존엄성에 관해 언급하면서 일의 존엄성을 되살려야만 사회가 불평등과 능력주의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가치를 재현해내며 겸손해지자는 그의 마지막 발언은 사실 어딘지 모르게 제 1세계의 백인 중년 남성의 체면치레 외침으로 들렸습니다. 사실 우리가 들어야 하는 목소리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출발선에 선 이들, 능력주의의 폭정에 주저앉은 이들이 아닐까요.


‘대신 그것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 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함을 뜻한다. 그리고 능력이라는 말로 옹호되어 온, 그러나 분노를 퍼뜨리고 정치에 해를 끼치며 사회를 갈라놓는 부와 명망의 불평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러한 생각 바꾸기는 능력주의적 성공 개념의 핵심인 두 가지 인생 영역, 즉 교육과 일에 대한 집중을 필요로 한다.’ 마이클 샌델


그에 반해 소준철의 가난의 문법은 ‘공정’ 같은 커다란 주제는 없었지만,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주는 책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며, 우리 자신이 처한 사회 문제를 직시해내는 책이었죠. 모두가 알다시피, 사회를 들여다보는 데엔 참 다양한 시선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선들을 아우른 학문을 사회학이라 하고, 사회학은 사회 그리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연구합니다. 저도 처음 석사를 시작할 때 어떤 논문을 써야 할지 참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도처에 존재하는 불평등, 그 불평등이 기반을 둔 사회 구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였죠. 계급과 계층과 성별과 인종과 가족과 법과 규칙, 커다란 주제들은 일상의 맥락들에 쉬이 쓸려 지나갔습니다. 모든 첫 번째 소설은 자서전일 수밖에 없다는 김연수의 말마따나, 사실 모든 첫 논문도 자전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제일 관심이 가는 주제, 나의 피부를 건드리고 그 피부 너머에서 떨림을 만들어내는 주제들, 그게 내겐 보수 태극기를 들고 광장과 거리로 나온 어르신들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태극기를 든 노인들에 관심을 두는 동안 소준철은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들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책은 일흔여섯의 윤영자 씨의 일상을 담담히 그려내는데, 작가가 인터뷰와 리서치를 통해 만들어낸 가상의 여성 노인 윤영자 씨는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재활용품 수집 노인의 일상을 보여줍니다. 그는 윤영자 씨를 통해 위험이 집중되는 존재인 ‘여성 노인’의 삶을, 그녀들이 겪어 왔을 ‘출생’과 ‘진학’, 그리고 ‘취업’, ‘결혼’, ‘육아’, 그리도 ‘자녀와의 분리’로 이어지는 생의 경로를 묘사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폐지를 줍게 되었고, 그들의 노동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따뜻하고 집요한 시선으로 소준철이 그려내는 윤영자 씨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통계 너머의 그네들의 삶이 얼핏 보이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재활용품 수집 노인의 일을 다른 것으로 전환시킬 방법은 사실상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선해야 할 일이란 노인들이 일을 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는 일이며, 그를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 사회의 합의를 끌어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재활용품 수집 노인은 무주물인 자원을 획득해 소득으로 전환하는 일을 하는 이들이다.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이 소득을 ‘재활용품 판매’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획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노인들이 (일을 하지 않더라도) 더 나은 기초소득을 가질 방법을 고민하는 데 있다.’ 소준철


그렇게 두 권의 책으로 숨을 고르던 찰나 여름이 왔고, 어느새 달리기도 막바지에 치닫게 되었습니다. 첫 일 킬로미터의 시작만큼 또 힘에 부치는 게 마지막 일 킬로미터입니다. 목표를 앞에 둘수록 두 다리는 떨리고, 이 정도 뛰면 되었잖아 하는 심정이 들고는 합니다. 아비지트 배너지와 에스테르 뒤플로의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을 읽을 때도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또다시 통계와 사료로 무장한, 무려 ‘경제학’ 책이라니, 이 정도면 된 거 아냐, 하고 몇 번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글에서 ‘좋은 경제학’에 대한 정의를 읽었을 때, 책을 끝까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둘이 믿는 좋은 경제학이 뭔지 알고 싶었거든요.


두 명의 저자는 부족화된 세상과 그 두 세상이 믿는 각기 다른 ‘통념’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의한 ‘나쁜 경제학’ 혹은 ‘잘못된 통념’을 하나둘 파헤칩니다. 통계로 무장된 분석 속에서 이민에 대한 거짓 신화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정치적 양극화, 성장의 비밀과 기후 위기 따위의 진실이 드러납니다. 저자들은 선언적인 주장들에서 신화를 벗겨내는 작업을 통해 트럼프 Trump를 이겨내고자 trump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경제학은 정말이지 좋은 경제학처럼 보입니다. 세상의 골칫덩어리 문제들이 작가들의 통계에 의해 하나둘 해결되거든요. 하지만 이 지점에서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이 또한 부족화 tribalization의 한 예시가 될 수 없을까. 두 작가의 필터 퍼플 filter bubble 혹은 반향실 eco chamber에 둘러 쌓여, ‘이민자, 무역, 불평등, 조세, 정부 역할 등 그 밖의 여러 이슈에 대해서’ 작가와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섣불리 결론에 도달하지는 않았나. 하지만 그들이 말했듯, 좋은 경제학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봅니다.


‘오늘날 좋은 경제학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무엇을 알려 주는가? 우리는 사실과 공상을, 과감한 가정과 견고한 결과를, 우리가 바라는 바와 알고 있는 바를 구분해 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이면서, 현대의 가장 훌륭한 경제학자들이 세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결론만이 아니라 결론에 도달한 과정까지 아울러 보여 주고자 한다.’ 아비지트 배너지, 에스테르 뒤플로


마이클 샌델의 능력주의, 소준철의 가난, 아비지트 배너지와 에스테르 뒤플로의 경제학. 결국 이 세 권이 이야기하는 바는 사실 단 하나의 문장입니다. 인간은 존엄하다. 능력주의의 폐해를 파헤치면서 인간 존엄의 의미를 일깨운 샌델의 저작, 가난한 노인들의 일상을 엿보며 존엄과 일에 대해 보여준 소준철의 책, 그리고 경제학의 시선에서 인간의 존엄을 그려낸 배너지와 뒤플로의 책까지. 달리기를 마치며 인간의 존엄에 관해 이야기 했던 책 세 권을 되돌아봅니다. 시사인, 좋은 날의 책방, 그리고 수요 책 모임과 함께, 참,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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