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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Jun 18. 2021

피고인의 기억법

80대 피고인의 기억, 나의 기억

80대 할아버지를 국선으로 변호하게 되었다.

기록을 보니 할아버지의 주소는 재판을 받고 있는 법원 관할이 아닌, 경북 영주로 되어 있다.     


영주에서 농사를 짓고 사시던 할아버지는 서울에 사는 손녀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가려고,

낯선 도시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손녀가 다니는 초등학교를 찾아 헤매던 중 접촉사고가 났다.

경찰이 사건 현장으로 왔고 할아버지에게 의례적으로 음주측정을 했다.


할아버지는 전 날 밭일을 하고 마신 막걸리 때문에 음주수치가 처벌기준을 조금 넘는 수준으로 나왔다.

피해차량 운전자가 조금 다쳐서, 할아버지에게는 음주운전 중 과실로 사람을 다치게 했다는 내용의 죄도 추가되었다. 기록을 보니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할아버지의 큰 아들이 피해자와 합의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아예 사고가 난 사실이 없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술을 마신 사실도 없고, 길을 잃어 경찰서에 길을 물으러 갔을 뿐 사고는 없었다고 했다.

경찰서에서 작성한 조서를 보여 주면서 이렇게 진술하시고 서명까지 하셨지 않느냐고 하니,

교통사고로 조사받은 사실 자체가 없다며 경찰이 조서를 조작했다며

세상천지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흥분하셨다.  

   

할아버지는 법정에서도 사고를 낸 사실이 없는데 경찰이 사건을 만들어 냈다고 하셨다.

억울하다고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는 모습에 나는 기가 막혔다.

나이가 든다고 지혜와 품위가 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오리발도 정도껏이지 저럴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하다는 할아버지의 주장에, 검사는 피해자와 할아버지를 조사한 경찰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법정 밖으로 나와서 나는 할아버지께 “아드님이 합의까지 했는데, 이렇게 사고사실 자체를 부인하시면 되겠어요?”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뭐? 이 놈이 아버지한테 누명을 씌워?”라고 하셨다.


나는 더 이상 대화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다음 기일은 몇 월 며칠 5시니까 꼭 출석하시라고 말하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할아버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새벽 다섯신교”라고 물었다. “아니요 오후 다섯 시예요.” 할아버지의 표정이 갑자기 환해지면서 “근데 아지매도 봉화에서 올라오느라 고생이 많네요”라고 말했다. 나는 봉화가 고향도 아니고, 봉화에서 산적도 없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영주로 내려갈 차비를 빌려 달라고 했다. 버스를 타고 올라왔는데 지갑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순간, 할아버지가 잃어버린 것은 지갑뿐 만이 아닌 것 같았다. 식사비와 버스비를 드리고 기록에 편철된 합의서를 찾아보았다. 다행히 합의서에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합의한 큰아들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전화하니 할아버지의 아들은,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낸 것이 맞고, 아버지가 있는 앞에서 피해자와 합의했다고 말했다. 가족들 모두 아버지에게 치매가 있다고 확신하지만 아버지가 “나를 정신병자 취급한다”며 강하게 거부해서 차마 치매진단과 진료에 대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꺼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평생 거칠게 일해서 가족들을 보살펴 온 자신이 이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셨다. 그러는 사이 가까운 기억부터 잃어가는 중이었다.   

 


한 달 뒤에 이루어진 증인신문에서 할아버지는 피해자와 경찰에게 사건을 조작했다며 소리를 지르고

욕을 했다. 피해자와 경찰은 어이없어했다. 경찰은 경찰서에서 할아버지와 피해자를 조사했고 경찰서로 온 할아버지의 아들이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모습도 보았다고 했다.

 피해자도 경찰의 말과 같은 말을 했다. 할아버지는 전부 거짓말이라면서 흥분했다.

모든 것이 조작이고 누명이라고 소리 지르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법정 밖에서 할아버지를 진정시키고 정말 조사받으신 것이 기억나지 않느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너도 나를 의심하느냐는 표정으로 “그날 손녀 졸업식에 간 게 다야.”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부인이 말기암으로 투병 중이라 함께 가지 못했고, 혼자서 손녀의 졸업식을 보려고 왔었다고 하셨다. 그러고는 표정이 밝아지더니 손녀가 공부를 아주 잘한다고 자랑하셨다.

아들 형편이 어려워서 손녀의 뒷바라지를 잘 못해주는 것 같은데도 손녀는 영재로도 뽑히고, 나라에서 미국도 보내 준 적이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신이 나 손녀 자랑을 하다가 “우리 손녀는..”이라고 하더니. 말을 멈추었다. 할아버지의 코가 빨개지더니 울음을 삼키듯 멈칫했다. 무언가가 기억나는 것 같았다.     


비슷한 모습을 본 적이 있다.


2015년, 할머니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셨고, 부산에 있는 요양원으로 모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쁜 일을 핑계로, 몇 년 만에 할머니를 뵈러 갔다. 할머니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터라 할머니의 눈빛이 놀랍진 않았다.     


할머니와 함께 방을 쓰는 할머니가 “저 할매가 농사를 짓고 살아서 그런가, 맨날 농장에 가야 된다고 짐을 싸더니 요즘은 영 못 움직이네”라고 했다. 서글펐다. “농장이 아니라 용장일 거예요. 거기가 할머니 친정마을 이름이거든요” 70년 넘게 떠나 살았어도, 엄마가 보고 싶었나 보다.  

  

점심시간이 되자 요양보호사가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에게 밥을 떠먹였다.

나는 요양보호사에게 내가 먹이겠다고 말하고 숟가락을 건네받았다.

할머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밥만 받아 드셨다. 종교가 없었던 할머니는 늘 가족들의 평안을 시골집 뒤 큰 나무에다 비셨다. 7남매를 키우시고, 가정 형편맡겨진 나도 키우셨다.


밭에서 억세게 일하시면서 평생을 고생만 하셨다. 과자 하나 구할 수 없는 시골마을에서 심심하게 있는 내가 안타까우셨는지,  도라지를 캐 껍질을 벗기고 순례길 같은 길을 걸어 5일장에 가서 파셨다. 도라지를 판 돈으로는 나에게 보름달 빵을 사주셨다.    


나는 할머니에게 “할머니, 늦게 와서 정말 미안해. 할머니 나 키워줘서 고마워. 할머니는 내 입에 밥숟가락을 수 백 번도 더 갖다 댔을 텐데, 나는 한 번도 할머니한테 밥을 먹여 준 적이 없었네?”라고 말했다. 밥을 떠서 할머니 입에 넣어 주면 할머니는 반응 없이 아기 새처럼 입만 열었다 닫았다 했다. 한참 할머니에게 밥을 먹이다 보니 할머니의 코가 빨개지고 맑은 콧물이 흘렀다. 나는 할머니가 나를 기억한다고 느꼈었다.     


할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손눈에 가져다 대었을 때, 나는 그가 무언가를 기억해 냈다고 생각했다.


그는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 순간 자신의 처지에 막막함이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는 80대 노인이었지만 어찌해야 될지 몰라 울고 있는 아이처럼 느껴졌다. 할아버지가 다음번에 어떤 기억을 떠 올린다면, 그땐 그 기억은 할아버지를 안심시키는 기억이길 바랬다.


우린 법정 앞에서 각자 다른 것을 기억하며 한참을 소리 없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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