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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재 Oct 28. 2024

하마구치 류스케 <드라이브 마이 카> (2021)

무라카미 하루키의 깊은 고독과 하마구치 류스케의 공감, 둘의 만남

이번에 다룰 영화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Drive My Car)>입니다.


원작: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문학동네, 2014년)에 수록된 "드라이브 마이 카"


- <해피 아워>의 무게중심 찾기 워크숍 시퀀스와 <드라이브 마이 카>의 연극 워크숍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해피 아워>의 그것은 이야기 전개상 불필요하진 않지만, 어떻게 보면 영화예술에 대한 감독님의 해석을 극 중간에 넣어 관객과 공유하려는 대담한 시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픽션영화들 역시 배우 신체의 영상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 정말 단순히 저에게 있어 이 시간이 ‘재미’있습니다. 이야기가 전개 되는 재미와는 다른 종류의 재미입니다. 몇번을 반복해서 볼 수 있는 재미는 오히려 이러한 장면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라 생각합 니다. 이러한 미세함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장면의 길이는 관객이 그 템포에 맞춰 감상 모드를 전환하기 위한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픽션영화 역시 배우 신체의 영상 기록’이라는 것은 제 주장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그러합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드라이브 마이 카>와 <셰헤라자데> 등 다른 단편을 직접 각색하기 전에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와 하마구치 감독님의 관심사가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내나 연인이 사라짐으로써 삶의 블라인드 스폿이나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입구를 발견하는 남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런 것 같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 외에도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와 감독님의 주제의식이 교차하는 점이 있을까요?

=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은 특히 20대 때 즐겨 읽었습니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를 특히 좋아했기에 말씀해준 요소는 그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 스스로 제 영화를 ‘상실’의 영화로 그린 적은 없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관한 것 중 어쩌면 이야기 이상으로 흥미로운 부분이 그 ‘집필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쓰고 있을 때의 몰입감, 그것이 항상 가능한 체력 유지 등의 요소입니다. 그것을 영화 만들기에 대입하면 도대체 어떠한 요소로 환원될까, 하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출처: http://m.cine21.com/news/view/?mag_id=99389


개봉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동안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쓴 글이 충분히 많아서, 또는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비평문 쓰기를 주저하게 되는 작품이 있다. 저번에 쓴 적이 있는 <룩 백>도 그렇지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연출한 <드라이브 마이 카>도 내가 굳이 말 한 마디를 얹기에는—뭔가 말해보려는 시점에서는—다수의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어서 그에 대한 글을 쓰기 어려웠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영화를 두 번째로 볼 때만 해도 특별히 영화에 대해 나 자신의 관점에서 언급하고 싶은 요소가 없었다.


예컨대, 2021년 12월에 나는 이런 글을 블로그에 적었다. (이웃에게만 공개한 글에서 인용한다)

「하루키 선생님의 원작에선 건강의 문제 때문에 지인이 소개해 줘서 운전기사를 구했던 것과는 다르게, 가후쿠의 직업인 연출가, 극작가를 강조해서 히로시마 예술제에서 운전기사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좀 더 작위적으로 바뀌었다. 사브(자동차의 이름)는 핸들이 왼쪽에 있어서 영화 속에서 위화감이 없지는 않았다. 일본은 우측 핸들이 기본 사양이다. (중략)


3. 영화는 가후쿠와 미사키의 이야기(1)와 체호프 <바냐 아저씨>의 줄거리(2)를 서로 결합시킨다. 그런데 (1)과 (2)는 물과 기름처럼 잘 섞이지 않는다. 두 줄거리의 전환에 죽은 아내와 바람을 폈던 남배우까지 섞여버리니 이야기는 알 수 없는 고백과 자기긍정으로 흘러간다. 체호프의 극을 연습하고 상연하는 장면들은 매우 좋았지만, 왜 하필이면 이런 이야기에 이것들을 집어 넣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고, 마지막까지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지게 된다.


4.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하마구치 감독의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았을까? 영화를 본 뒤에, 약간의 미열과 두통을 느끼면서 나는, <드라이브 마이 카>를 평가하는 말들을 일단 내면으로 집어넣고 (프로이트로 돌아가야 한다는 라캉의 명언처럼) 우선 소설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중략)


6. "그런가 하면 미우라 토코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원작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며 "세계적으로 워낙 팬이 많은 분의 원작을 한다는 게 영광이고 기쁘지만 동시에 부담감과 압박감을 느꼈던 것 같다. 소설을 읽는 분이라면 누구나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이미지가 있지 않나. 그런 기본적인 캐릭터에 대한 존경심, 이해를 넘어선 경의 같은 걸 바탕으로 찍으려고 했다. 또 그것과 다르게 영화로 표현할 수 있는 게 뭔지 같이 고민했던 것 같다" 고 고백했다. 이러한 압박감, 부담감과 달리 '드라이브 마이 카'는 제74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데 이어..."

이 글을 읽고 미우라상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참으로 멋지고 대단한 분.」




2021년 12월의 시점에는, 영화를 보고 나서 나에게는 풀어야 될 난해한 질문이 하나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문자답의 형식이기는 하지만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질문이고, 영화를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만 하는 좋은 질문이다.

질문: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하마구치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를 어떻게 보았을까?


내 질문에 직접 대답해주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남긴 꽤 훌륭한 코멘트가 존재하긴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영화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넓은 범위의 코멘트를 남긴 적이 있다.

"단편소설 원작의 영화는 개변(시나리오를 원작에서 바꿈)이 재미있어요."


소설집 『여자가 없는 남자들』을 읽어본 독자들은 아마도 책의 구성에 당혹스러워하지 않았을까 예상해 본다. 이 책은 표제작인 『여자가 없는 남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소설이 '파트너로서 여성'을 잃어버린 중년 남자를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단편소설의 연재를 주로 '문예춘추'라는 문예 잡지에서 하고 있으며, 연재는 일정한 시기에 여러 편이 발표되고 나서 단행본으로 엮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문예춘추'지에 연재되지 않는 단편소설도 있다)

즉 이러한 연재는 작가가 일정한 계획을 가지고 단편소설을 쓰고 있으며, 소재를 고를 때도 신중하게 고른 다음에 테마에 맞추어서 쓴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집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슨 역할을 맡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돌아가지 않고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드라이브 마이 카>는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독 속에 깊이 가라앉아 있는 극작가 겸 배우의 초상을 매우 섬세하게, 그러나 장황하지 않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미사키의 역할은 가후쿠를 어느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주는 운전기사의 역할에 한정된다. 미사키는 홋카이도의 고향으로부터 도망치듯이 도쿄로 내려왔고, 가후쿠의 요청을 받아서 친분 있는 지인이 소개해 준 운전기사다. 단지 그뿐이다. 물론 둘 사이에는 깊어보이는 교류가 있지만, 독자에게 둘 사이의 교류는 암시적으로만 읽힌다.

그러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운전기사 미사키가 가후쿠와 교류하고 우정을 나누는 '방법'은 인간적이다. 미사키는 가후쿠에게 운전 실력을 완전히 인정받고 나서 히로시마 예술제가 열리는 두 달이라는 기간 동안 그의 손발이 되어서 여러 곳을 돌아다닌다.



가후쿠와 미사키의 투 숏


가후쿠는 미사키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는 그녀가 추워할까봐 걱정하며 차 안에서 대기하라고 말한다.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는 미사키에게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 괜찮은 장소가 있는지 물어본다. 그리고 그녀가 자란 홋카이도의 시골인 '가미주니타키무라'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미사키는 가후쿠의 말대로 낡은 사브를 몰고 홋카이도까지 달려간다. 도중에도 가후쿠는 그녀가 잠이 부족함을 걱정하며 교대해서 운전하자고 제안을 하지만, 그러나 그녀는 "이것이 내 일이기 때문에" 가후쿠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한다.

마지막 바로 전 장면에서 둘은 눈이 내린 언덕 위에서 포옹한다. 그곳에서 가후쿠는 미사키에게 자기의 진심을 털어놓고, 비어 있는 '바냐 아저씨' 역을 맡기로 결심한다. 가후쿠의 결심은 히로시마 예술제의 성공으로 이어진다. 다시 원래의 중요한 질문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면, 이 영화의 결론은 소설과는 꽤 많이 다르단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가후쿠와 미사키는 과거를 마주보고 상처를 회복하려고 홋카이도의 시골까지 사브를 운전해 간다. 그들에게 약속된 장소에서 과거를 마주보고 제대로 상처받아야 했음을 깨닫고 나서, 둘은 현실에서 발생한 '연극 중지'라는 문제를 해결한다. 가후쿠는 미사키를 위로하면서 그런 결심을 내렸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다카츠키의 실수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처럼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다. 『노르웨이의 숲』의 두 주인공 와타나베와 미도리가 와세다대에서 함께 들었던 수업이 고대 그리스의 희비극(에우리피데스 등)이란 사실은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이해하는 것에도 작은 도움을 준다. 정리해보면, 운명적인 비극의 사건을 하나하나 밟아가면서 극의 절정에 이른 가후쿠와 미사키는, 자기 자신과 마주보면서 마침내 세상과 화해한다. 깊이 아로새겨진 아픔을 치유하고, 자기 신뢰(에머슨의 개념)를 회복한 두 사람은 연극이 끝난 이후에도 남은 삶을 살아가려고 애쓴다. 미사키가 한국에서 장을 보고 귀가하는 신이 이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부터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빙의해서,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다. 나는 간사이 지방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고베에서 유년기를 보내지도 않았으며,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에 걸쳐서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다니지도 않았다. 나는 몇십년 전 운동권을 지켜보지 않았고 운동권 후일담으로 읽히는 소설을 쓰지도 않았다. (실제로, 『노르웨이의 숲』은 한국과 일본에서 운동권 후일담 소설로 분류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완벽한 재현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 대해서는 하루키 선생님을 내 몸 속으로 빙의시켜서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루키도 이 영화를 재밌게 보셨으리라고 짐작되고, 영화에 대해서 몇 마디를 남겼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럼 지금부터, 무라카미 하루키에 빙의한 채로, <드라이브 마이 카>를 간결하게 이야기해 보겠다.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건 매우 심플한 작업이다.


이 소설, 내가 쓴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하마구치 감독님 나름대로 각색하고, 섬세하게 연출해주신 것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어떻게 한 남자가 아내를 잃어버린 아픔으로부터 회복해 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중년 남성들의 고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주변에는 이혼하거나 상처(아내를 잃음)하거나 여자와 헤어진 남자들이 많지는 않지만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삶은 제게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다가오기도 했지만, 동시에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깊은 인간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표상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제가 쓴 소설에는 모두 모델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허락을 받고, 또는 허락을 받지 않고, 소설을 써 왔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아내를 잃어버린 슬픔에서부터 가후쿠라는 중년 남성이 회복해 나가는 과정을 다이나믹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원래 30여페이지 되는 단편을 세 시간짜리 영화로 재구축하신 점에 감명받았습니다. 제가 예전에 말한 대로, 단편소설 원작의 영화는 시나리오 등을 개변하는 부분이 재밌거든요. 저에게는 소설에서 영화 시나리오로 변환시키며 세 가지가 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차량의 색깔을 제외한다면!)
원작에서는 과묵한 운전기사로 묘사했고, 가후쿠에게 쓸데없는 참견을 하지 않던 미사키가 말이 많아지면서 보여주는 변화가 인상깊었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롱 테이크로 연출하신 장면이 훌륭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체호프의 극작인 '바냐 아저씨'를 가후쿠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와 서로 연결시키는 것도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소설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잘못 시도한다면 큰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거든요. 아, 제가 그런 경험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웃음)

아마 영화 내부에서도 이런 시도를 연출의 곡예를 부려 가며 성공시키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몇 가지 의문은 들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개인의 문제'와 '연극 내부의 문제'가 잘 조화되고 있다는 평가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점은, 다카츠키라는 캐릭터와 미사키가 한국에서 거주하게 되는 마지막 신입니다.
다카츠키는 예술과 사회의 접면에서 갈등하는 예술가적인 캐릭터를 그려내기 위해서 각본가에 의해서 창조된 캐릭터라고 생각하면, 납득이 갑니다. 여전히 남는 의문은, 연극 리허설 중에 다카츠키가 히로시마 경찰서에서 출두한 경찰에게 직접 상해치사죄를 추궁당할 때, 다카츠키가 너무 쉽게 죄를 인정하고 경찰에게 끌려간 게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다카츠키는 자신의 연극을 위해서라도 조금 더 버티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라면, 폭행 사건이 있고 가후쿠와 '칠성장어'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나서부터는 아예 연극 <바냐 아저씨>에 관심이 없어진 걸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과묵하고 말이 없는 미사키라는 캐릭터가 운전기사로서 한국 어느 지방에서 잘 살아갈 수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다른 사람, 예컨대 가후쿠에게 고용돼서 같이 산다면 조용한 한국 라이프를 누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상처와 아픔을 극복하고서 새 삶을 사는 것과, 한국 어느 지방에서의 삶은 제게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둘 사이에 납득이 되는 관계가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몇 가지 사소한 의문이 있었지만, 하마구치 감독님의 영화를 보고 나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제 작품을 영화화해서 성공한 적이 거의 없었기도 하고요.

영화를 연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활동을 응원합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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