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의 이홍위 앞에 놓인 것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화제의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총 관객 수 900만 언저리에서 봤다.
걱정했던 만큼 오열까진 가지 않았으나, 손수건을 챙겨 간 선택은 적절했다.
간만에 찾은 영화관이었다.
먹먹해 진 가슴으로 집에 가려고 상영관 엘리베이터 앞에 섰는데,
누군가 손에 쥔 영화 팜플렛 뒷 면에 영화의 결말을 담은, 보기 전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던 포스터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의미를 뒤늦게 깨닫고 눈물을 참느라 귓 볼을 여러 번 꼬집었다.
이건 분명 갱년기와 상관 없는 눈물이라 되뇌이며 귀가했다.
그 포스터 사진 한 장이 이 글을 쓰고 싶어진 이유가 됐다.
이 영화 속에서 단종(이후엔 이홍위라 쓰겠다)이 유배지 영월에서 맞닥뜨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영화는 크게 네 가지(4가지 아님)로 이홍위의 앞을 가로막는다.
반겨 할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곡기를 끊은 것은 상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기 전인 궁에서부터였다.
두려움 때문이었겠지.
낮밤을 가리지 않고 충신들에게 가해지던 고문의 끔찍한 비명 소리,
숙부인 세조(수양대군)까지 가지 않아도 능히 자신을 압박하고도 남는 한명회의 위세.
살기 위해선 먹어야 하나, 이홍위는 죽을까 두려워 수라상을 물린다.
살았다.
죽지 않고 살았다.
어찌 보면 죽음보다도 못한 생존이지만, 살기 위해선 먹어야 하는 밥상 앞에 이홍위는 밥 한 술을 뜰 수 없다.
난 살아 있는가 살아는 있는가.
난 살아가야 하나, 대체 어떻게, 누구로, 언제까지...
무력함과 좌절감.
먹어야 살 수 있지만, 그래서 먹을 수 없다.
희망 없는 삶.
그게 밥을 거부하는 이홍위다.
사냥은 유희가 아니었다.호랑이와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을 두메산골 광천골 사람들은 살기 위해 누린내 나서 남들은 못먹을 짐승이라 폄하하는 노루를 잡고, 살기 위해 유배지를 자청한다.그래야 배불리 먹을 수 있기 때문에.그래야 살아남아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엄흥도가 밥상을 들고 왔다.
마을 사람들은 먹어보지도 못하는 귀한 것이었다.
시녀 매화가 처음 밥상을 들춰보곤 인상을 찌푸릴만큼 소박한 밥상이었고, 단종은 그 밥상을 계속 거절하고, 엎고, 너희나 먹으라 조소한다.
생에 대한 의지 박약.
마을 사람들은 분노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그 밥이란 게 얼마나 소중하고, 그 밥을 먹고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려는 의지가 있는 마을사람들의 눈에는 이해되지 못할 행동이며, 그것이 궁궐의 담장 안 권세가 이해하지 못하는 백성의 현실이다.
이홍위가 마을 사람들의 밥상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된 때는 '밥'을 생명처럼 여기는, 살아가기 위해 '밥'과 '밥줄' 로 스스로 유배지를 자청한 마을 사람들의 사연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밥을 먹기 시작한 이홍위.
살아가기로 작정한 순간이다. 마을 사람들처럼..그리고, 그 밥이 나 뿐 아닌 남도 살릴 수 있는 것을 깨달은 후, 이홍위는 자신의 밥을 덜어 마을 사람들과 나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 비록 길진 못했지만...
왕이란 이름은 사라졌다.
내가 한 선택은 아닌데, 내 이름이 달라졌다.
누구는 노산군이라 부르고, 누구는 이홍위라 부른다.
그의 이름이 뭐든, 수염이 길고 흰 권위의 전직 관료이기만 바랬던 엄흥도의 실망은 유배 온 양반이 수염이 없는 어린 아이임을 확인하면서부터다.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를 뭐라 불러야 할 지를 혼란스러워 한다.
이홍위는 마을 사람들이 원하던 이름이 아니었다.
영화 속에서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밥상을 깨끗이 비워내는 이홍위를 보며 마음을 연다.이홍위는 마을 사람들의 밥상을 받아들이면서부터 이름을 묻는다.
반찬의 이름을 묻고, 그걸 만들고 잡아온 이의 이름을 묻는다.
그리고, 그 밥상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동안, 그 이름을 가진 마을 사람들과 눈을 마주하고 밥상을 마주한다.
여럿이 둘러 앉은 상이 아니라 서로 마주 앉은 상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걸 만든 아무개를 불러오라, 이걸 잡아온 아무개와 밥을 먹자 하여 받은 밥상이었을 듯.
마을 사람들이 먼저 청할 수 없을 신분 차를 감안하면, 그 밥상 자리는 이홍위가 청한 자리였을 것이다.
이홍위가 불러 준 이름이 마주 앉아 밥을 나누었을 것이다.
이홍위는 생각했을 거다.
내가 불러준 이름에 백성들이 감격해 하고, 함께 나눈 밥상에 즐거워하는구나.
태산이에게 글 공부를 가르치며, 이홍위는 백성들이 원하는 세상이 어떤 것이며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어떤 군주였어야 했나를 고민했을 것이다.
왕의 이름에서 유배지 죄인의 이름으로 내려온 이홍위는, 마을 사람들과 이름을 불러가며 나누는 밥상을 통해 다시 왕의 이름으로 돌아가고 싶어졌을 지도 모른다.
유배지에 내려온 소년 이홍위가 궁에선 느끼지 못한 인간적 유대를 쌓아가는 과정으로 봤을 그 장면이, 왕으로서의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싶어하는 이홍위 의지의 선택 과정으로 읽혀 더욱 슬펐다.
이홍위는 최후의 순간에도 그 때문에 선택했을 거다.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죄인의 이름이 아닌, 제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 왕의 이름으로 남기 위해서.
역도들이 왕의 이름으로 내리는 사약이 아닌, 내가 이름 불러주던 사랑하는 이를 선택해 끝을 마무리하고 스스로 강을 건넌 왕으로 남기 위해서...
당시의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왕의 이름으로 되돌아가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이홍위를 그래서 더 애달파 하는 지도 모르겠다.
노루골 사람들이 그 누린내 나는 걸 왜 잡냐고 비웃는다.그래, 그 냄새나는 노루라도 잡아 식량으로 삼고 싶어하는 광천골 사람들 앞의 간절함을 막아 서는 게 호랑이다.
호랑이를 피해 비탈길에서 굴러 떨어지는 상처 투성이 엄흥도의 모습은 왕 위에서 쫓겨나 먼 유배길을 거쳐 절벽 아래 강을 건너다 뗏목이 부서져 물에 젖은 채로 처연하게 서 있는 이홍위의 모습과 닮아 있다.
호랑이는 조선을 상징하는 영물이자, 추상같은 권력의 상징이다.
이홍위는 그런 호랑이였다가 지금은 쫓겨 호랑이를 피해 도망 다니는 노루에 지나지 않는다.
유배 생활 후 생기 없고, 힘 없는 모습은 노루의 모습과 닮았다. 그 촉촉한 눈망울마저도..
마을 사람들과 이홍위가 절벽 위에서 호랑이와 마주칠 때, 마을 노인이 자신을 희생하려 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호랑이는 한 명만 잡아먹으면 다른 이를 공격하지 않는다."고..
이 대사는 이홍위가 마지막에 사랑하는 마을 사람들과 자신을 따르던 이들을 위해 스스로 최후를 택하는 결말과 닿아있다.
역설적으로 세조와 한명회는 스스로 호랑이의 자리에 앉기 위해 한 명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도륙한다.
한 명만 잡아먹으면 다른 이를 공격하지 않는 자연의 호랑이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짐승만도 못한 놈...이란 표현은 이럴 떄 쓰기 매우 적절하다.
한 편으론 노루같던 이홍위가 처음으로 범의 눈을 갖는 장면이고, 처음 마을 사람들에게 왕으로서의 위엄을 보이고 인정받은 순간이다. 달려드는 호랑이에게
"네 상대는 나다." 라고 외치는 그 순간은 어찌 보면, 자신을 덮쳐오는 한명회 세력을 향해 내내 억누르고 내보이지 못했던 분노와 응징의 마음을 토해 낸 장면이 아닌가 싶다.
백성(마을 사람들)이란 공동체를 지키는 자가 다름 아닌 자신이란 선언이다.
그걸 왕이라 한다. 이홍위의 다른 이름이었던...
호랑이를 제압한 이홍위는 자기 때문에 관아에 잡혀가 장을 맞는 태산을 구하기 위해 한명회 앞에서 다시 한 번 포효한다.
"네 이놈, 네놈이 감히 왕족을 능멸하는가!"
코웃음 치는 한명회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누가 진짜 왕인지 잠시 잊었다는 엄흥도의 말에 이홍위는 지금의 자기 이름으로는 사랑하는 이들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숙부인 금성대군에게 거사를 윤허하는 편지를 쓴다.
호랑이 행세하는 한명회와 세조에게 누가 진짜 호랑이인지를 알려 주기 위해서...
강은 경계다.
강 건너 이 편과 저 편은 다른 세상이다.함부로 건너 올 수도, 건너 갈 수도 없다.
유배지를 향해 강을 건너다 뗏목이 부서져 모두가 강물에 빠진 혼란의 순간, 이홍위는 허리 춤까지 찬 물 속에 서서 처연하게 강을 내려다 본다.
다시는 살아서 못 건널 강이다. 그는 강을 건넌 이후 스스로를 방 안에 가두고 고립시킨다.
이홍위가 유배지에 자리를 잡고 그를 찾는 이들은 절벽 위에서 통곡하며 이홍위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다.고이 싸 온 귀한 음식과 비단과 값진 것들을 절벽 위에서 벼랑 아래 강물로 던진다.
그라나, 강물을 건너는 이는 없다.
복위를 위해 거사를 준비하며 이홍위의 동참 의지를 확인하고자 답신을 기다리는 이도 강 건너에서 기다릴 뿐이다.
이홍위는 호랑이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고, 거사를 위한 답신을 매달아 쏘고,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엄흥도에게 맡기는 수단으로 활을 선택한다.
유일하게 강 너머까지 닿을 수 있는 도구다.
이홍위는 처음 강을 건너며 스스로를 실패하고 나약한 군주로 가두었지만, 그 후엔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으로 강을 건넌다.
태산을 구하기 위해 강을 건너고,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려 금성대군의 거사에 동참하고 강을 건넌다.
지키고, 맞서고, 자신의 이름을 찾기 위해 강을 건넌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자신을 가로막은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지키기 위해 강을 건넌다.
엄흥도에게 이홍위가 자신의 마지막을 부탁하면서 건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내 선택으로 강을 건너게 해 다오."
엄흥도 또한 거절할 수 없는 그의 부탁에,
"다 와 갑니다." 라는 말로 강을 건너게 해 준다.
사실, 이 영화의 포스터엔 이미 이런 결말이 이미 스포일러 되어 담겨져 있다.
이홍위는 결국 강을 건넌다.
세조가 보낸 사약을 마다한 것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
왕으로서의 정통성과 복위를 위한 거사에 실패한 좌절을 죄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그는 스스로 강을 건너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일을 엄흥도에게 부탁한다.
비로소, 강을 건너는 이홍위와 엄흥도..
눈물 주륵주륵 주르르륵...
야사에는 이홍위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가 장지를 찾던 중에 모두 얼어있던 땅 때문에 땅을 파기 힘들었는데, 양지 바른 곳에 한 마리 노루가 앉아있다가 사라졌는데 그곳만 땅이 녹아 있어 그곳에 장사를 지냈고, 그 자리가 지금의 장릉(단종의 릉)이란 이야기가 있다.
끝까지 처절하고 애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영화 속 마을 사람들과 이홍위의 유대가 마냥 상상같지만은 않은 이유도 있다.
그 서슬 퍼렇던 세조가 사라진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사라진 엄흥도의 행방과 단종의 묘를 추궁할 땐 모른다고 잡아 떼던 영월 사람들이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복권된 단종의 묘를 찾을 때, 엄흥도의 후손과 단종의 묘 위치를 알려줬던 것.
목숨을 걸고 비밀을 지켰던 영월 사람들의 무거운 입은 다만 화를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왕과 사는 남자>를 본 관객들이 영월로 몰려들고 있다.
이 영화가 남긴 여운은 대체 무엇이고, 사람들은 그 곳에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서 긴 줄을 서는 걸까.
일찌기 우리 시대의 지식인 유시민 작가는 <알쓸신잡2 영월 편>에서 아래와 같이 말 한 바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단종을 외롭게 두고 싶지 않다고 여기는 것 같다.
단순히 비극의 주인공으로서의 이홍위보다, 그와 함께 했던 영화 속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처럼 마음 한 켠으로나마 이홍위의 곁에 머물러 주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봤다.
호랑이 CG가 어떻고, 흔한 흥행영화의 전형이라느니, 연출이 어떻고, 배우가 멱살잡고 끌고가는 영화라느니 하는 이들의 방구석 평론들을 자주 본다.
닥쳐라, 키보드 워리어들아. (여긴 내 땅이니까 막 험한 말도 막 그냥..)
장항준은 비록 예능에서의 모습이 한없이 가볍고 웃기는 모습으로 비춰질지 몰라도, 본업인 영화판에선 늘 도전을 거듭해 온 감독이다.
한번도 쉬운 선택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고, 몇 년을 준비하던 영화가 엎어져서 택시 안 아내의 무릎에 엎디어 운 적도 있다 고백했던 사람이다.
그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사극에 도전했고, 다들 아는 성취를 이뤄냈다.
과하지 않게 충분히 절제하면서도 그는 이 영화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작금의 시대에 더더욱 값진 성취다.
모처럼만의 극장 나들이에 티켓, 팝콘에 음료수, 뒤풀이 커피만 얹어도 돈 2, 3만원이 우스운 시대다.
방구석, 소파, 침대에 누워 발가락을 까딱이며 뒤져봐도 고를 수 있는 영화가 넘쳐나는 OTT의 시대다.
무슨 영화 볼까가 아니고, 내일 영화 볼래? 로 대화를 시작하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이전의 천만 영화들이 배급사의 힘을 빌어 멀티플랙스를 싹쓸이하고, 마케팅 비용을 쏟아부어 열흘, 2,3주만에 만들어 내던 때가 아니다 지금은.
혹자는 영화관에 <왕과 사는 남자> 로 상영시간표가 꽉 채워졌다며 상영관의 다양성 얘기를 하기도 하지만, 극장 입장에서 팔리는 영화가 있을 때 손님을 불러 모아야 장사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입소문으로 불어난 관객이 천만을 향해 육박 중인 거다.
그 영화를 보기 위해 온 관객들에게 영화관은 그 영화를 틀어 줄 뿐이다.
<왕과 사는 남자>는 별 다섯 개 짜리 영화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충분한 감동을 주는 좋은 영화임엔 틀림 없다.
빨간 안경 이동진 평론가도 칭찬 많이 해 주고 격려 문자까지 보내곤 별 세 개 줬더라.
사람들은 따뜻한 영화를 보고 나와서 채워지지 않은 헛헛함을 위해 N차 관람을 한다.
그것으로도 모자란 위로를 보태기 위해 영월을 찾고 줄을 선다.
늦었지만, 영화를 통해 상상해 보게 된 이홍위의 외롭고 쓸쓸했던 시간을 위로해 주고 싶어서 말이다.
이런 좋은 기회를 제공한 영화라면, 충분히 값진 영화가 아닌가 말이다.
모처럼, 아주 많이 긴 글을 썼다.
3일에 걸쳐 썼다.
다 써 놓고도 자꾸 뭘 더 쓰고 싶은데..
그게 이 영화의 매력 아닌가 싶다.
단점은 없느냐 이 영화에?
굳이 왜 그걸 내 입으로... 난 영화인이 아니니깐..
다음 번 영화엔 알아서 잘 보완해서 더 잘 만들겠지 뭐..
좋은 영화를 볼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영화 하나로 역사에 대한 관심이, 인물에 대한 관심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지금처럼..
또 그런 영화가 나오는 날을 손 꼽는다.
오늘은 이만 총총... 아, 힘드러.. ㅠ
- 2026. 3. 5 끄적이는 영화리뷰 몬테크리스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