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 시절에 마흔 살은 정말 큰 어른으로 보였다. 그때가 되면, 세상 모든 일에 능숙한,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스무 살 이후 노화의 길을 걸어 지금 마흔에 이르렀다. 몸이 이렇게 세월의 직격탄을 오롯이 받아내고 있는 동안, 내 마음은 어디쯤 있는 걸까. 마흔에 걸맞게 성숙하지도, 늙지도 못했다. 잘해야 서른 즈음의 어른에 머문 것 같다. 그런데 세상은 나를 중년이라는 단어로 가두었고, 이제 더 이상 “어리다”거나, “젊다”고 할 수 없는 그야말로 낮과 밤, 생과 죽음 사이의 경계선을 지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삶은 내가 처음 사는 인생이다. 만약 윤회를 거듭했다고 하더라도 기억할 수 있는 첫 인생이다.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삶일지 나는 알 수 없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참 많은 책을 읽어보았지만, 수천 년의 역사 속을 거쳐간 내 인생 선배들도 그 답은 알지 못했다. 로마의 현제로 기억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조차 아침에 이불 밖으로 나오는 걸 싫어했고, 죽음에 초연하려는 의지를 담은 그의 많은 일기들이 되레 나처럼 죽음 앞에서 덜덜 떠는 한 인간일 뿐이라는 걸 반증해주는 듯했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처음 맞는 시대, 처음 맞이한 나이를 살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젊음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내게도 그 시절이 있었고, 젊고 어린 그 사람들도 시간의 출발점이 다를 뿐 다 공평하게 살다 가니까. 물론 세상은 공평하지 않을 때도 많지만, ‘시간’만큼은 어떤 사건으로 인해 단절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비교적 공평하게 주어지니까. 그리고 스무 살 친구를 보면, 나는 나의 스무 살 시절로 여행을 떠난다. 마들렌 하나가 불러온 어린 시절의 기억처럼, 나는 다른 연령대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그때 이랬는데, 저랬는데...’ 하면서, 마흔이 된 지금도 때때로 스무 살의 나를 기억하고, 때때로 서른 살의 나와 공존한다.
내 나이 마흔, 어쩌면 전혀 늙은 것도, 전혀 젊은 것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나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인생은 언제나 스펙트럼의 영역이고, 시간은 언제나 상대적인 거니까. 지하철을 타고 갈 때 내 앞에 호호할머니 여러 분이 앉은 적이 있다. 그녀들은 조곤조곤 담소를 나누다가 마지막에 웃으며 인사했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어요. 잘 지내요.“ 그녀들이 볼 때 나는 아직도 지금보다 한참 더 살아야 할 젊은 사람일 것이다. 나는 자식이 없지만 내 조카가 나를 때 부를 때 ”이모~ 이모~” 할 때면, 중학생 조카 입장에서는 자기 엄마처럼 어른인, 자기보다 한참 나이 많은 어른으로 느껴질 터. 난 조카가 살아온 시간의 두 배하고도 훌쩍 더 살았다. 전자의 할머니들은 그 하루가 못내 아쉬운 듯, 온전히 다 살고 싶어서 매 순간 귀하게 여기는 느낌이었다면, 후자의 내 조카는 오늘도 하루를 힘겹게 보낸다. 끝이 있어서 생이 더욱 소중하다는 흔한 아포리즘. 그 흔한 말이 자꾸 떠오르는 건,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그만큼 귀해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