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
책 <관내 분실> 리뷰
저자인 김초엽은 1993년생, 포스텍 화학과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테드 창처럼 과학을 공부한 sf 소설가이다. <관내 분실>은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단편 7개 소설 중 한 편이다. 제2회 한국과학 문학을 수상한 작품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지민은 임신 8주 차 여성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3년 후에야 엄마를 찾아 도서관에 갔다. 소설 속 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뇌의 시냅스를 스캔하여 ‘마인드’를 업로딩 해서 도서관에 보관한다. 살아있는 사람은 고인의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즉 엄마의 뇌 구조가 들어 있어 행동, 말투 등을 가상현실에서 살아있는 사람처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지민은 도서관 직원으로부터 엄마의 ‘마인드’가 분실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고유 인식 인덱스가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깊은 우울증과 딸에게 집착하는 엄마를 지민은 이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아빠와도 거의 연락하지 않고 지내고, 남동생 유민과는 가끔 연락하는 정도다. 지민은 새삼스럽게 엄마의 마인드를 찾기 위해 가족을 만난다. 마인드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엄마의 특성이 있는 흔적을 찾아야 한다. 엄마의 인덱스를 삭제한 건 아빠였다. 엄마는 마인드를 저장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인덱스를 삭제하는 조건으로 동의했고, 유언에 따른 것이다.
엄마로는 검색이 안 됐지만, 엄마이기 이전 김은아의 흔적을 찾아 검색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자아가 분실되어 살아가면서도 가족과 사회에서 인정되거나 이해되지 않았던 엄마. 지민은 엄마의 마인드와 만난다.
이 소설에는 ‘자기’란 무엇일까에 대한 정체성 문제가 깔려 있다. 죽은 사람의 뇌에 들어있는 기록을 저장하고 재생시키며, 사람들은 영혼을 만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영혼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목소리도 있긴 하다.)
엄마가 정신적 혼란을 겪고 딸과 갈등을 일으킨 것도 자아정체성의 혼란을 겪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딸을 낳기 전 책 표지 디자이너였는데, 없어지는 직업이 되어 가고 있던 참에 출산까지 하고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자아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 엄마는 딸과 자신을 동일시 했다가 인생의 길을 막는 장애물로 여기기도 한다.
지민 또한 관계를 끊고 살았던 엄마를 다시 찾으려는 것은 경력 단절과 출산을 앞두고 자아 정체성의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이런 문제로 사람은 불행해한다. 자신의 경험, 기억, 역할을 ‘자기’와 동일시하여 괴로워하고,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독특성이나 뛰어난 점이 있어야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낀다.
나의 영혼과 다른 것들
요즘은 소설에서와 같이 가상현실에서 자기 생각이나 감정 패턴을 저장해서 영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자기”, ‘본질적 자기’ 혹은 '영혼'이란 경험, 기억, 상태, 역할이 아니다. 자아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키고 고통을 겪는 것은 잘못된 개념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책의 내용 중에 TV에서 패널들이 마인드 업로드와 영혼에 관해 토론하는 내용이 나온다. (255) 여자가 말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들은 부정적입니다. 스캐닝 된 시냅스 패턴이 더 이상 가소적으로 변형되지 않는다는 관찰이 이어지면서 마인드가 영혼이 아니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죠. 한 사람의 자아는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성장하고, 배우고, 반응하고, 노화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변형되지 않는 마인드는 영혼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은 시점에서 고정되어 버려 일종의 박제된 정신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나도 위의 의견에 동의한다. 사람은 변해가는 과정에 있고 정지된 상태의 한 시점이 그 사람의 영혼은 아니다. 뇌를 스캔해서 저장하면 생명체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영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냥 자료다.
그에 대해 인공지능 형태를 띤다면 계속된 변화를 할 수 있다는 반론을 한다. 신문이나 사회 변화를 듣고서 조금씩 업데이트와 자가 학습을 통해 변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인공지능처럼 새로운 자료를 주면 계속 변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험은 외부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고, 다른 경험을 주입할 수도 있다. 경험이란 선택한다고 해도 내면의 것은 아니다. 외부의 것 중에서 고르는 것이고, 그것을 선택한 것이 고유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놀이동산에 A 코스, B 코스, C 코스가 있는데 코스는 외부에서 주어져 있다. 오늘 그중 A 코스를 갔다고 A 코스가 곧 ‘나’의 영혼은 아니다. 경험의 과정은 과정일 뿐 과정의 일부, 단면만 잘라서 '나'라고 할 수 없다. 나는 과거, 현재, 미래에도 계속 변하고 있다. 비록 삶에서 그 과정 일부만을 경험하다가 죽는다고 해도.
기억의 조합이 영혼은 아니다. 기억이란 왜곡되고, 잊기도 한다. 다른 기억을 갖게 된다고 존재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오늘 내가 집에 있었건, 친구들과 만나서 수다를 떨었건, 여행을 갔거나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기억을 갖는다고 해도 모두 내 영혼이다. 같은 체험을 해도 각자의 기억은 다를 수 있다. 내 편견이나 시각, 착각이 내 영혼은 아니다.
존재와 상태도 구별되어야 한다. 술에 취한 것은 상태고 존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피곤하다고 했을 때 ‘피곤’은 피곤한 상태지 내 영혼은 아니다. 사람은 가난할 때도 있고 부자 일 때도 있다. 일에 실패할 때도 있고 성공할 때도 있다. 이것은 옷과 같아서 일시적으로 입고 벗는 것이지 존재나 영혼 자체는 아니다.
존재와 하위적 특성도 다른 문제다. 분홍색 딱딱한 지우개가 있다고 하자, 분홍색이 지우개고 할 수 없고, 딱딱함이 지우개도 아니다. 내가 화를 잘 내는 특성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화가 내 영혼은 아니다. ‘화’가 여러 사람을 이용하고 번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성도 내 영혼은 아니다.
역할과 본질적 존재도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 경험하게 되는 것은 개인의 의지와 달리 이미 형성되어 있다. 자신은 그 역할을 하게 된다. 가족이나 직업에서의 역할, 선생님과 학생, 선배나 후배처럼 우리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연극배우처럼 그 역할은 일시적으로 해 주는 것뿐이다.
가상 세계에서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실감 난다고 해도 그건 그 사람이 아니다. 나의 정보, 상태들의 모음이다. 옷으로 말한다면 빨간색이다. 낡았다. 길다. 부드럽다. 얼룩이 묻었다. 등은 상태인데 상태의 나열이 옷을 입은 사람의 영혼은 아니다. 가상현실이 아닌 지금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고유한 존재가치란 기억, 경험, 상태, 역할과는 관계가 없다. 이런 것들을 자기와 동일시 하면서 사람은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