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기 많은 유피테르(제우스)의 불륜이 그 시작이었다. 유노(헤라)는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에게 암소가 된 이오를 감시하게 했다. 천궁의 유피테르는 연인에 대한 연민으로 고통스러웠다. 어느날 유피테르는 전령의 신인 아들 메르쿠리우스(헤르메스)를 불러 이오를 아르고스의 감시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을 명했다. 메르쿠리우스는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날개 달린 신발과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최면장(催眠杖, 잠들게 하는 지팡이)을 들고 지상으로 내려가 목신의 피리 쉬링크스로 아르고스의 백 개 눈을 잠들게 했다. 그리고 초승달처럼 생긴 칼로 아르고스의 목을 베었다. 머리가 없는 아르고스의 몸통은 절벽 밑으로 떨어졌고, 백 개의 눈은 빛을 잃었다. 유노는 아르고스의 눈을 거두어 그의 신조神鳥 공작의 깃과 꼬리를 장식했다. 유피테르는 신마저도 번복할 수 없는 스틱스 강에 맹세했다. “더 이상 이오가 그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유노의 분노는 가라앉았고 이오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여신이 되었다. 공작의 화려한 아름다움이 있기 전에 신들의 사랑과 질투가 먼저 있었다. 아름다움은 그만큼 치명적인 것이다.
공작孔雀|김무균
백 개 아르고스의 눈을 들어
사랑을 찾는다.
더욱 화려할수록
더욱 강한 것이다.
아름다움은 과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진화다.
그때 너는
너의 가장 부끄런 치부恥部,
항문을 드러내야만 한다.
※P.S. 소설가이자 번역가이며 신화학자인 이윤기 선생님이(2010년 8월 27일 卒) 옮긴 '神들의 전성시대, 변신이야기' 중 '암소가 된 이오, 백안의 거인 아르고스, 갈대가 된 요정 쉬링크스'를 참조했다. 이 책은 1994년 10월 31일 민음사에서 초판 1쇄가 발간됐고, 2쇄가 12월 20일 발간됐다.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이다. 크기는 4·6배판 보다는 조금 크고, 국배판 보다는 조금 작은 데 양장 되어 있다. 페이지 수는 560p에 달할 정도로 두껍지만 판형이 커서 그런지 그렇게 두꺼워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이 책을 1994년 말 아니면 1995년 초 어느날, 지금은 없어진 종로 부근의 종로서적이나, 을지서적, 이도 아니면 지금도 여전히 대형서점으로 명맥을 꿋꿋이 이어가고 있는 영풍문고나 교보문고에서 샀을 것인데 확실하지는 않다. 책값은 당시로서는 큰돈인 무려 23,000원 이나 했다. 그때 상여금을 제외한 내 한 달 월급이 100만 원이 되지 않았을 것이니 책값치고는 무척 큰돈이었다. 책을 사면서 아마 어릴 때 문고판으로 읽은 '희랍신화'를 생각하며 '그리스 신들의 탄생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통달하리라!' 마음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책을 펼치니 신들의 이름이 그리스식 이름이 아니라 전부 로마식 이름이었다. 신들의 이름이 다르니 내용이 집중되지 않았고, 마음의 서사가 없는 로마식 이름에 나는 흥미를 잃어버렸다. 나의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는 신들을 버리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덕분에 이 책은 근 30년을 책꽂이에 꽂혀 있는 신세가 됐다. 이 책을 다시 펼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리스 신들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뭐, 요약된 이야기들은 인터넷에서도 충분히 찾아 볼 수 있지만, 내게 필요한 것은 종이에 적혀 있는 원래의 긴 서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