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무 Oct 26. 2023

현실로부터의 도피…도피처

도망을 쳐도 결국 또 다른 현실에 부딪치게 되더라.

#1

 직장생활을 하며 방문했던 고향에서 동창회의 만남을 시작으로 그 친구와 나는 장거리 연애로 3년을 오가며 만남을 이어갔다. 실제로 만난 횟수는 달에 1,2번이 고작이었지만 매일 쳇바퀴처럼 도는 일상에서 그 친구는 대학생활을 하던 중이어서 내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대학교의 에피소드와 후일담이 제법 재미있게 다가왔다. 그때의 나는 적어도 세상에 오직 나만을 위한 편이 돼줄 든든한 지원군이 함께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도 했다.


#2

장거리 연애가 거듭되고 만나는 가운데 비일비재했던 일은 단언 '술' 문화였다. 종일 술을 마시고 깨도 숙취 하나 없이 거뜬하게 일과를 마칠 정도로 체력이 대단했던 그와 그에 반해 내 체력은 절반도 체 따라가지 못했다. 학교 과 후배들과 열댓 명이서 부어라 마셔라 하던 막걸리와 소주, 맥주의 향연은 아침 낮술이 왜 위험한지를 제대로 깨닫게 해 주었고, 그날 이후로는 그 친구와 술을 마실 때면 술잔을 빼는 습관이 생겼다. 저녁 반주로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까지도 술을 마시는 통에 이대로도 괜찮을까 싶었던 적이 많았는데 대학을 졸업하고도 술 사랑은 계속되었고, 졸업 후 일을 배워 나가는 과정에서도 시간대의 영역만 바뀌었지 저녁부터 자정이 이어지는 술자리는 계속되었다. 소위 말해 친구 많고,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는 남자의 표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3

어느 날, 크게 다툰 일을 계기로 나는 그 친구와 헤어짐을 고했다. 평소 거친 언행, 가부장적인 모습, 측근들에게도 함부로 대하는 모습이 가장 큰 이별의 원인이었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남자는 이래서 이래야 하고, 여자는 이래서 이래야 해.' 라며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마치 옛 사상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 같이 굴었는데, 그때 내가 가졌던 아버지와 상반되는 '그것'이 완벽히 깨지게 되는 계기였다. 책임감이 강하고 남자다웠던 게 아니라, 자기주장이 강하고, 개인주의 성향이 짙었던 것이었다. 남자가 가오가 있지 라는 말은 이 친구에 대고 만든 말이 아닐까 싶다. 가오 빼면 시체였을 이 사람은 타인보단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과 그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이었다.


#4

그와 헤어지고 다시 재회하는 과정 중, 원치 않았던, 계획하지 않았던 임신을 하게 되었다. 아이를 가졌기에 당연하게 결혼의 코스로 가는 굴레도 아니었다. 각자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은 부담스러운 일이었고, 나 역시도 확신이 들지 않은 상태에서 자행해야 하는 결혼이란 것은 버겁기만 했다.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이 9할이라면, 뱃속의 아이의 걱정은 1이었다.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또 한편으론 내가 누리지 못했던 사랑과 가정에서 아이를 행복하게 키우고 싶다는 욕심과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5

준비되지 않은 임신은 예상했던 것만큼 녹록지 못한 상황이 이어져 갔다. 임신 초기 때 임신임을 알았지만 양가 어른들을 뵙는 상견례 자리는 서너 달이 넘도록 잡지 못했고 결혼도 전에 임신을 한 몰지각한 며느라기가 되어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기다리고, 연락을 드리고, 잘 살아 보이겠다는 나의 노력과 아들을 이기지 못한 시댁은 결국 기울어진 집의 딸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이후 시골집에서 신접살림을 하며 아이를 키우다 남편이 룸살롱에서 술접대를 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6

한밤 중 오는 연락에 핸드폰 충전을 연결하던 그때, 우연찮게 보게 된 메시지 하나가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분명 그것은 '낯선 여자'였다. 별 것도 아닌 메시지 한 줄이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 길로 전화번호를 내 핸드폰에 저장을 했고 이내 그 '낯선 여자'는 일반적인 여자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업소에서 일하는 분의 복장, 헤어 스타일과 화장법이었기 때문이다. 깊게 잠을 자고 있는 남편을 깨울까, 말까 몇 시간을 고민하다 남편인 척 문자를 보내보았는데, 이 내 돌아오는 대답이 황당했고, 몇 번을 오가는 문자와 대화내용에 괴로움만 커져갔다. 단순 술자리를 하며 술만 마신 거겠지 라며 생각하려 해도, 룸살롱에 일하는 여자라는 사실과 동시에 언제부터 이런 곳을 오가고 다녔는지 배신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 일을 추궁하자 남편은 거래처와 잠시 들렀던 곳이며 다음에도 접대를 할 때 필요했기 때문에 연락처를 알려준 것이 라며 본인을 의심하는 것이냐고 화를 냈다. 나는 결정적 '증거'도 없이 그저 '의심'하는 와이프가 된 것이다.


#7

그러던 중 둘째의 임신과 출산으로 그 일은 기억 속에 서서히 잊혀 갔다. 아니, 다른 사람들은 더 한 일도 감추고 덮어주며 살아간다고 하던데, 이 일로 더 이상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이 일 후로 남편은 룸살롱에 다니던 여자 두 명과 1년 반 이상 지속적인 연락과 선물, 돈을 지불하며 만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남편에 대한 믿음은 철저히 무너졌다. 남편의 바람, 외도의 심증만 있는 상태에서 겪게 되는 여자의 촉은 어디까지일까? 심증이 확신이 되어갈 때쯤 나는 결정적인 무언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내 심증은 다수의 증거가 모여 확신이 되어갔다. 달라진 남편의 행동에 대해 한번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아이들의 이름을 걸며 술자리에 가더라도 건전하게 술만 마시며 돌아온다는 그에게 나는 달리 이야기할 방도가 없었다. 아니, 그땐 알면서도 묵인했다. 우리 아이의 아빠이자, 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8

남편을 위해 더 맛있는 음식, 더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자 나는 달라지기로 결심했다. 남편을 구속하지 않으면서 집에 계속 들어오고 싶게 하는 일은 맛있는 음식과 편하게 쉴 수 있는 보금자리면 되지 않을까 했던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만든 밥을 먹으러 오지 않았다. 일을 마치면 어딘가의 사장님들과 회식이 있다며 차려입고 다시 집을 나섰다. 저녁을 먹을 시간을 기점으로 새벽 서너 시가 될 때까지 언제 올지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이다 이내 빈자리는 빈자리대로 두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남편은 가정에서 점점 멀어져만 갔다. 내가 뭔가 잘못했을까 생각한다면 나는 남편을 가족같이 생각했다는 것이다. 남편은 가족이자 남자였다. 나는 여자였지만 마누라, 아이들의 엄마로 자리했으니 이게 가장 큰 불행의 시초였을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행복한 결혼 생활은 적어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매일 밖을 나가버리는 남편과 술이 곤죽이 되어 돌아오는 일, 아이들과 매일 지지고 볶아가며 늦은 밤 고단해 잠에 들고, 시댁의 잦은 가족행사자리에 매일 불려 나가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며 순종적이며 착해빠진 며느라기는. 적어도 내가 원하던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아니었다.


#9

"화대를 지불하면 연애를 해 줘, 게네들은 그런 애들이고, 나는 돈을 줬을 뿐이야."

남편의 계속된 외박과 술자리에 나는 정면돌파를 선언했다. 아이들의 아빠로서 지금 이렇게 지내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며, 평소와 같지 않게 굴며 남편의 행적을 요목조목 따졌고, 돌아오는 답은 자신은 젊고 아직 창창한데 더 젊고 예쁜 여자와도 만나보고 연애를 해보고 싶었다는 말뿐이었다. 1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나와 그는 아이들을 키우며 매일 같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 최선은 안정이 어느 정도 되었을 무렵, 철저히 깨졌다. 남편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많이 변해 있었다. 나에 대한 마음도, 가정에 대한 인식도, 적어도 내게 어떤 행동과 말로 상처를 주었는지에 대한 이해는 하나도 없었다. 철저히 '네 탓'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키우며 예쁘게 단장하지 않고 동네 아줌마 같은 행색으로 경제적인 일 하나 하지 않고 집구석에 있는 그런 '집사람'이 나였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나는 적어도 그랬다. 남편이 돌아오면 여성스럽게 차려입고 단장한 예쁜 와이프가 웃으며 반겨주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랬다고 했다. 사랑이 받고 싶은데 너는 내게 사랑을 줄 수 없으니 나는 돈을 주고 그 사랑을 샀다고. 말도 안 되는 궤변이 늘어졌고, 이혼을 할 것이면 아이들은 두고, 빈 몸으로 나가달라는 말이 돌아왔다. 빈 몸으로 시작했으니, 빈 몸으로 나가고, 네가 경제적인 여건이 전혀 되지 않으니 시어머니께 아이들을 키워달라고 말하면 된다는 그에 말에 나는 격분했다. 그리고 그 길로 나는 집을 나왔다. 아이들과 함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