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있는 공기
토요일 오후, 흐린 햇살이 도로 위에 길게 늘어졌다. 요양원으로 향하는 차 안은 유난히 조용했다. 라디오에서 오래된 발라드가 흘러나왔지만 누구도 따라 부르지 않았다. 아빠는 운전대를 두 손으로 단단히 잡고 있었고 엄마는 창가에 고개를 기대었다. 중학생 아들은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잠들지도 깨어 있지도 않은 얼굴로 앉아 있다. 그 옆자리에는 나와 남편, 뒷좌석에는 동생 부부와 초등학생 조카가 나란히 앉아 있다. 여덟 명이 타고 있지만 차 안의 공기는 고요했다. 요양원 입구에 도착하자 바람이 서늘하게 스쳤다. 건물은 흰색이었고 깨끗한 유리창마다 작은 화분이 걸려 있다. 정돈된 풍경이 오히려 낯설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소독약 냄새가 공기 속에 희미하게 퍼졌다. 복도 끝에는 ‘가족면회실’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면회실은 넓지 않았지만 햇빛이 가득했다. 유리창 너머로 낙엽이 바람에 흩날리고 그림자가 바닥 위를 스쳤다. 벽시계의 초침이 일정한 속도로 흘러갔다. 그 소리가 유일한 리듬처럼 들렸다. 가족들은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엄마는 손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손끝으로 끈을 쓸어내렸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요양보호사가 휠체어를 밀며 들어왔다. 휠체어 위의 할머니는 단정하게 빗은 흰머리에 꽃무늬 가디건을 입었다. 희미하게 미간을 찡그린 얼굴이 천천히 우리를 스쳤다. 그 눈빛이 멈추는 순간마다 시간도 함께 굳어졌다.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 앞에 섰다. 짧은 숨을 들이마시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엄마, 나유. 인옥이."
그 순간 할머니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시선은 금세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얼굴에는 낯선 사람을 대할 때처럼 경계와 공손함이 뒤섞였다. 아빠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으며 내 이름을 말하고 천천히 남편과 아이를 소개했다. 그다음은 동생네 가족을 소개하고 설명이 끝나면 다시 내 눈을 보며 할머니가 물었다.
"여이는 누구여?"
짧은 면회 시간 동안 할머니는 몇 번이고 물었다. 기억의 잔편이 불쑥 스쳐 지나가는 듯한 표정이 잠깐씩 스쳤다. 유일하게 알아보는 사람은 엄마와 아빠였다.
"우리 옥이 정민 아빠가 돈 잘 벌어다주지? 고생 안 하지?"
그 말 이후 방 안의 온도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엄마는 눈가를 닦았고 아빠는 멋쩍은 듯이 웃었다. 누구도 크게 울지 않았지만 모두의 마음이 조용히 흔들렸다. 시간이 다 되었다는 보호사 안내에 다들 일어섰다. 엄마는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한참 동안 놓지 못했다. 그 손끝에 억눌린 시간들이 묻었다.
"엄마, 우리 집에 갈까? 나랑 같이 살자."
"싫어. 여기 선생님들이 다 잘해주셔."
할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양병원이 싫다며 완강하게 거부하셨던 할머니가 엄마를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오후의 햇살이 눈부셨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낙엽이 발끝에 흩어졌다. 누군가는 울지 않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는 흐느끼며 이 순간을 붙잡았다. 기억은 사라질 수 있어도 함께했던 시간의 공기만큼은 몸 어딘가에 숨기고 싶었다. 그 면회실의 냄새, 온도, 그리고 할머니의 눈빛이 아직도 내 안에서 천천히 숨 쉬고 있다.